에르미온이 눈을 떴을 때는 그의 방 침대에 누워 있는 채였다. 이불에 폭 싸인 채 하얀 번데기처럼 있던 그는 한참동안 상황을 정리해 보고 있었다.
오베론이 자신을 안고 데려갔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왠지 그에게 들린 것 같았던 목소리는 낯설기보다는 오히려 너무 익숙해서 위화감이 들 정도였었다. 그 목소리에 대해 계속 고민하던 에르미온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궁금증이 바로 해결되었다.
담벼락 너머로 내다보는 고양이마냥 에르미온의 침대에 턱을 살짝 괸 채 그를 지켜보고 있던 루젠이 에르미온과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어보였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을지 곧바로 감을 잡은 에르미온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스쳤다. 변한 안색으로 급하게 이불을 떨치고 일어나 앉는 그의 머리칼은 분명 오래 누워있었는데도 꽤나 차분해 보였다.
“이제는 괜찮아요?”
어느새 침대 위로 올라가 앉은 루젠이 손으로 에르미온의 머리칼을 살짝 쓸었다. 장난감이라도 되는 것처럼 매만지는 손길이 하염없이 계속되자 에르미온이 얼굴을 붉히며 루젠의 손을 살짝 쳐 냈다. 밀어내는 손길에 머리칼에 달라붙어있던 손은 의외로 빨리 떨어졌다.
더 달라붙을 줄 알았던 루젠이 의외로 다르게 행동하자, 에르미온이 루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바라보지 마요. 그렇게 부탁 안 해도 이번에는 금방 갈게요.”
에르미온은 잠시 어젯밤에 들었던 목소리가 루젠이 맞는지 의아해졌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신에게는 존댓말을 사용하는 그가 정작 존대해야 할 오베론은 전혀 존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머릿속에서 충돌해서 혼란을 주었다.
네가 맞는지 물어볼까. 하지만 에르미온은 그 후에 닥쳐올 후폭풍이 무엇일지는 몰라도 그것을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마음에 괜한 이불만 만지작거리는 에르미온의 손가락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그를 지긋이 바라보던 루젠이 문득 다가와 에르미온의 뺨을 손가락으로 살짝 쓸었다. 거칠한 손가락은 이상하게도 기름이 발린 것처럼 부드럽게 에르미온의 볼을 만진다. 에르미온의 눈이 반쯤 감기면서 그의 몸이 흠칫 떨리자 루젠이 그를 향해 가까이 다가왔다.
다음 수순은 에르미온도 잘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기에, 그는 루젠의 입술에 두 손가락을 올려 그가 더 다가오는 것을 막았다. 입술에 올려진 손가락의 감촉에 루젠의 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왜 계속, 너는 내 입술만 탐하는 거지?”
에르미온은 정말 이유를 짐작하지 못했다. 왜 계속 그가 처음 만난 남자에게 오랜 연인사이처럼 다가오는지, 왜 그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자신의 기분이 이상해지는지. 단순히 에르미온을 치료해주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그의 한계였다.
“궁금해요?”
루젠이 입꼬리를 올려 씨익 웃었다. 한순간 에르미온의 몸이 앞쪽으로 확 끌어당겨진다. 그의 한쪽 볼을 루젠의 큰 손이 부드럽게 감쌌다. 그 직후 얇은 귀에 와 닿는 뜨거운 혀의 느낌이 꼭 작은 난로처럼 몸을 데웠다.
“아...”
루젠의 혀가 사탕을 굴리듯 핥는다. 고운 턱선을 타고 에르미온의 목 부근에 루젠의 입술이 계속 마주하자 푸른 눈 위에 드리워진 에르미온의 속눈썹이 바람을 타듯 파르르 떨렸다.
루젠을 밀어내려는 듯 그의 어깨에 올려진 에르미온의 손은 그저 옷자락을 붙잡은 손에만 힘을 줄 뿐이었다. 오히려 밀어내는 손보다는 이제는 꼭 감겨진 눈에 힘이 더 들어간 듯 했다.
루젠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고운 꽃구름 같은 흔적은 그의 입술이 한 번도 건드리지 않은 에르미온의 얼굴에까지 피어 있었다. 움찔거리는 몸을 따라 하늘하늘하게 움직이는 꽃구름은 부드러운 주홍색을 띄고 있었다.
헐떡이는 소리가 귀에 닿자 마지막으로 쇄골에 살짝 입맞춤을 남긴 채 고개를 든 루젠의 얼굴에 에르미온의 흰 손이 보였다. 혹여나 붉어진 얼굴을 들킬까 두려워 그가 올린 손 뒤쪽에서 새어나오는 붉은 빛이 오히려 에르미온의 얼굴을 더 붉어 보이게 한다고, 루젠은 차마 말하지 못했다.
그 대신 규칙적으로 들리는 새액거리는 숨소리를 배경음 삼아 조용히 말을 꺼낼 뿐이었다.
“입술이 아니면, 아직은 무리인 것 같아서.”
사실 아직은 그의 눈에 눈물을 내고 싶지 않아서이지만, 루젠은 굳이 그 말까지는 꺼내지 않았다. 멋대로 범해 놓고서는 기묘한 사이인 것 같은 말을 많이 하기는 아직 그에게는 무리였다.
자신의 눈만 손으로 가려 놓은 채 계속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에르미온을 루젠은 지그시 바라보기만 했다. 아마 저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건 분명 가라는 신호일 것이라고 루젠은 혼자서 짐작했다.
“필요할 때, 다시 불러줘요. 언제나 있는 자리에 계속 있을게요.”
에르미온에게서 손을 떼고 창문으로 걸어가는 루젠을 에르미온이 손가락을 벌려 그 사이로 빠끔히 바라보았다. 창문에서 고개를 돌려 에르미온과 눈이 마주친 루젠이 슬쩍 눈웃음을 지은 채 창밖으로 우아하게 뛰어내렸다.
“다시 부를게...”
에르미온은 무언가에 홀린 듯 빈 창문을 바라보며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