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시들기를 바라지 않는(3)

마물이라는 건 사실 이 세계에 없다. 과거에는 극악무도하고 잔인하다고 알려졌던 마물들이지만 그들이 다른 차원으로 사라진 이후, 다시 그들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에르미온을 포함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었다.

다만 그 마물들이 남긴 잔해라고 알려져 있는 생물체인 드래곤에게서, 그런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징그러우리만큼 탐욕스러운 그 생명체들 중 떠돌이들은 원하는 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가지기 위해 세계에서 난동을 부렸고, 그들 중 하나인 검은 용에 의해 희생당한 것이 에르미온의 전대 수장이었다.

아마 떠돌이 드래곤을 말한 것이 확실할 오베론의 마물이라는 말을 에르미온은 익숙한 오베론의 집무실 앞에서 다시 한 번 되새겼다.

언제나처럼 윤기 있는 나무문은 어쩌면 얼굴이 비치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 반짝이고 있었다. 손자국을 남기기 미안할 정도로 깨끗한 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던 에르미온은 이내 실없는 생각을 접고 문에 손을 올렸다.

힘을 별로 주지 않았는데도 스르륵 미끄러지는 문 사이로 책상에 걸터앉아있는 오베론의 모습이 보였다. 꽤 책상이 높았기에 오베론은 앉아있기보다는 책상을 배경으로 서 있는 것 같았다.

에르미온이 방 안으로 들어선 순간 농밀한 향이 코끝을 스쳐왔다. 익숙하지 않은 진한 향기는 방 안을 보랏빛 안개처럼 온통 뒤덮고 있었다.

진한 향 한 모금은 도수가 높은 술처럼 정신을 온통 몽롱하게 만들었다. 이미 에르미온의 몸은 제 몸이 아닌 것처럼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어느새 에르미온의 곁으로 다가온 오베론이 굳어버린 에르미온의 몸을 받쳐 올렸다. 주위에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에 왠지 에르미온은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에르, 이번에 기어들어온 도마뱀은...”

에르미온이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자신에게 향해진 시선을 의식하였을 텐데도 오베론은 눈썹 하나 까딱 않은 채 그대로 말을 이었다.

“백발에 푸른 눈의 아이가 신음을 흘리는 걸 좋아한단다.”

미끼, 라는 걸까. 더 무언가를 생각하기에 에르미온의 머릿속은 이미 끈적이는 무언가가 가득 찬 것처럼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인위적인 어둠은 순식간에 그를 잠식해 나갔다.

“아프지 않을 거야...”

잠든 에르미온을 가만히 안은 오베론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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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2-12 04:22 | 조회 : 1,001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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