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라휠의 기억(3)

어느 날 레스는 라휠에게 칼을 건넸다.


"뭐냐 이건?"


칼은 겉보기에는 단순한 단검이었지만 라휠은 느낄 수 있었다. 칼 안에 담긴 마법을.


"영구 마력 보존? 이게 대체 뭐냐 레스??"
"너를 죽일 수 있는 검."


레스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나를 죽이고 싶어?"
"산다는 것은 언젠가 죽는다는 거야. 그래서 나는 너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라."


레스는 라휠에게 더는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괴로워진다면 그 검을 사용하라고 말했다. 라휠은 쓸데없는 짓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검을 챙겨두었다.


"카루나에게는 비밀이야."


라휠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루나라면 분명 라휠에게 통하는지 실험을 할 것이기에. 그 날, 레스와 라휠은 둘 만의 비밀이 생겼다. 카루나도 모르는 비밀.





14. 라휠의 기억(3)




레스가 있어서 카루나는 웃었다. 레스뿐인 카루나였지만 라휠에게도 잘 대해주었다. 그것이 레스의 부탁때문임을 알아도 라휠은 기뻤다.

세 사람은 나름 잘 어울려 지냈다. 아슬아슬하게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모래성처럼.

그리고 그 날이 찾아왔다.


"왕국에 신의 아이가 모두 모인데."
"뭐? 왜?"
"잘 모르겠어. 나 같은 동족이 늘어나니까 그에 대처하기 위한 회의 같은 건가 봐."
"레스, 너도 가야 하는 거냐?"
"동족들을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보고 싶어."


그의 말에 라휠도, 카루나도 그를 잡을 수 없었다.


"금방 돌아올게 카루나. 라휠, 카루나를 부탁해."


카루나는 불안하다며 레스를 막았지만 레스는 카루나를 달래고 그곳으로 갔다. 그 날 레스는 가지 말았어야 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레스는 엉망이 된 채로 돌아왔다. 등에는 커다란 관을 지고서.


"레스!!"
"난 괜찮아, 카루나. 그보다 이걸 맡아줘. 열지도 말고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 돼."
"무슨 소리야! 어디 가려고!! 대체 무슨 일인데!"


라휠은 그가 어떤 일에 휘말렸음을 알 수 있었다.


"나도 같이 가겠다, 레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널 지켜줄 수 있어."
"아니. 라휠은 카루나를 지켜줘. 걱정하지 마. 난 쉽게 죽지 않으니까. 알지? 내가 돌아올 때까지 나는 모르는 사람인 거야. 부탁해."


그렇게 레스는 둘을 남겨두고 사라져버렸다. 그 뒤 몇 명의 사람들이 찾아왔고 신의 아이인 레스와 아는 사이인지를 물었다. 라휠과 카루나는 그 이야기를 부정해야만 했다.

카루나는 그 날 이후 집 안에 박혀서 나가지않았다. 사실 카루나도 어떤 일인지 대충 예상하였을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후, 신의 아이가 몰살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소식을 접하게 된 카루나는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모두 던지고 때려 부쉈다. 라휠에게 원망의 말을 쏟아부었다. 왜 레스를 따라가지 않았느냐고, 레스를 지키지 않았느냐고.

라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레스의 부탁도 있었지만 카루나의 곁에 있고 싶다는 마음으로 가지 않았기에. 라휠은 카루나의 원망과 죄책감으로 괴로워했다.

카루나와 라휠의 관계는 너무나도 쉽게 무너졌다. 레스가 없으니 카루나는 라휠에게 잘해줄 이유가 없었다. 라휠이 카루나를 떠날 수 없었을 뿐.

카루나가 라휠을 볼 때마다 쏟아내는 원망을 자아를 가진 라휠은 견디기 힘들었다.

어느 날 카루나는 그에게 명령했다.


"저걸 열어."
"뭐? 레스가 절대 열지 말라고..."
"닥쳐! 시키는 대로 해! 내가 만든 도구주제에 내 말에 토 달지 말란 말이야!!"


카루나에게 더는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무력감, 자신의 결정에 대한 후회와 카루나에 대한 죄책감. 라휠은 결국 관을 열었다.

복잡한 봉인 마법과 저주가 걸린 관이 라휠의 손에 너무나도 쉽게 열렸다. 그 안에 있던 건 한 소녀였다.

'그 봉인과 저주가 이 여자 하나를 가두기 위한 거라고?'


처음에 라휠은 그 소녀가 위험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을 뜬 소녀는 너무나도 순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며 레스와 닮은 미소를 지었다.


"안녕, 난 샨이야. 너는 누구야?"
"샨이라고? 그럼 넌 레스가 말한..."


그 미소에 카루나조차도 레스를 떠올렸다. 카루나는 샨과 함께 지내기로 했다. 샨과 지낸 후로 카루나는 물건을 부수거나 라휠에게 심한 말을 하지 않았다. 라휠은 카루나가 레스를 대신할 존재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라도 카루나가 다시 웃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라휠에게 자신이 죽으면 샨과 함께 여행해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라휠은 눈물이 날 만큼 기뻤다.

카루나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부탁했다는 사실에, 레스처럼 샨과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셋이서 함께하는 매일은 너무나도 즐거웠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오래 가지 못했다.


"카루나, 너를 데리러 왔다."
"이...이건...어째서...레스...?"


그 남자는 레스의 머리와 망가진 심장을 들고 찾아왔다. 자신을 왕자라 말한 그는 레스에게 모욕적인 말을 뱉으며 그를 비난했다. 라휠은 그를 죽이고 싶었지만 카루나가 라휠을 막았다.


"...대체 왜 그런 거죠?"
"그들은 너무 오만해. 우리를 내려다보는 그 눈이 싫어서 그들을 죽였다."
"굳이 나한테 그걸 보여주는 이유는?"
"반항해봐야 소용없다고 알려주기 위해서지. 카루나, 네가 필요하다. 우리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우수한 연구자가 필요해."


카루나는 너무나도 쉽게 승낙했다. 라휠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왕자를 죽인다 해도 문제 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 나라, 아니 이 대륙의 모든 사람을 적으로 돌린다 해도 라휠이 그들을 모두 쓸어버릴 수 있다는 걸 카루나도 알고 있었는데도. 라휠은 카루나가 충격을 받아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라휠의 생각과는 다르게 카루나는 끔찍한 계획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도와주는 레스가 없었기에, 자신의 계획을 도울 도구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성으로 가자마자 라휠과 샨은 구속당했다. 모든 마법을 다루는 라휠이지만 카루나에게는 잡힐 수밖에 없었다.

카루나는 라휠이 죄책감에 시달리는 동안 그가 절대 뿌리칠 수 없는 '명령어'를 만들었다. 그것을 사용하면 라휠은 카루나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명령조차도 들어야만 했다.


"카루나, 제발 그만해...제발, 제발..."


카루나는 되살아난다는 샨의 특성을 이용해서 한 가지 실험했다. 구속된 라휠 앞에서 샨이 몇 번이나 죽어갔다.

고통에 비명을 지르고 살려달라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샨을 보며 라휠은 카루나에게 빌었다. 카루나는 라휠의 말에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라휠은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며 그 과정을 지켜봐야 했다.


"정말 이 실험이 끝나면 우리도 죽지 않을 수 있는 건가?"
"믿어보자고. 저런 것도 만들었잖아.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자아를 가진 마법 덩어리라니."


카루나는 샨이 '완성'되어가자 라휠에게도 실험을 시작했다. 모두가 카루나가 무엇을 하는지 모르면서도 그녀가 만들어낸 라휠이라는 존재를 보며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카루나는 한 사람에게 샨을 죽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무 의심 없이 샨을 죽였다. 카루나는 라휠을 풀어주며 말했다.


"라휠, 나를 지켜."
"무슨..."


그 날, 샨에 의해서 나라 하나가 멸망했다. 라휠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신에게 입력된 명령으로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알 수 있었다. 모든 일이 끝나고 샨의 '어떤 부분'을 봉인하자 샨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카루나, 넌 대체 뭘 하려는 거야?"
"레스를 찾을 거야."
"뭐?"
"레스는 다시 태어날 거잖아. 다시 태어난 레스를 찾아서 이번에야말로 지켜줄 거야."


카루나에게는 레스뿐이었다. 샨도, 라휠도 그 대신이 될 수는 없다. 사실 카루나는 어느 정도 그의 죽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레스에게 들은 전설, 그리고 관.

카루나는 그때부터 이 모든 일을 계획하고 있었다. 샨에게 친절하게 대해준 것은 그녀에게 맹세를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신의 아이는 일생에 단 한 번, 영혼에 걸고 맹세할 수 있다. 악용될 수 있는 약점이기에 그들은 누구에게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레스는 카루나에게 무엇도 숨기지 않았다. 카루나는 모든 기억을 잃은 샨에게 맹세를 받아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죽여가면서? 샨은 관계없잖아! 더 늦기 전에 그만둬, 카루나!! 이건 미친 짓이라고!"
"그래도 넌 내가 원하면 도와줄 걸?"
"카루나!"
"내가 널 그렇게 만들었어."
"뭐?"


라휠은 카루나가 어떤 의미로 말하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라휠에게 있는 감정. 카루나를 향한 사랑. 가족의 애정이 아닌 그 마음은 당연히 카루나의 실수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누구든 자신을 그런 식으로 사랑하기를 바라지 않으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런 거야? 나를 만들 때부터?"
"감정이 없으면 못 쓰겠더라고. 레스를 좋아하게 하거나 감정을 만들면 나한테 건방지게 굴고. 그래서 나를 좋아하게 했더니 꽤 성공적이라고 생각했어. 폐기할까 생각했지만 레스를 찾는 데에는 네가 있는 게 편하니까."


라휠은 언제나 괴로웠다. 레스를 사랑하지만 사랑할 수 없어서, 카루나를 사랑하지만 그 마음이 달라서 너무나도 힘들었다.

카루나에게는 레스 뿐이었다. 라휠은 이제서야 카루나가 말한 도구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카루나가 그를 그렇게나 괴롭게 하는 데도, 라휠에게 그녀는 여전히 사랑스럽다.

그런 그녀가 두렵기까지 했다.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두려움보다도, 원망보다도, 그녀를 향한 사랑이 더 깊었다.

"리휠, 나를 도와줄 거지?"

심장이 있다면 부서질 정도로 너무나도 잔인하게 정해진 대답을 묻는 그녀를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라휠은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그는 도구. 그것은 샨도 마찬가지. 라휠은 샨을 지키기 위해 힘든 일은 도맡아했지만 샨에 대한 실험은 멈추지 않았다. 샨을 더 완벽한 도구로 만들기 위해 카루나는 여러가지를 실험했다. 라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카루나는 그 몸이 다할 때까지 연구를 계속했다. 그리고 레스를 찾으라는 명령만을 남긴 뒤 그녀는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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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1-09 22:51 | 조회 : 1,312 목록
작가의 말
B.B.ZZ

삽호ㅏ 넘 올리고 싶어서 올려버렸어요흐흐흫 자르기 애매해서 합쳤더니 분량이 평소 두 배쯤 되버렸습니다. 다음 화는 3일안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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