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리셋

15(수정)



카루나가 죽었어도 그 명령은 그들의 몸에 남아있었다. 몇 개의 나라가 멸망하고, 몇 개의 제국이 만들어지고 몰락하는 동안 레스를 찾았다. 그렇게 기나긴 세월을 살아왔다.


"뭐, 대충 그렇게 된 거지."


라휠은 자신의 고통이나 끔찍한 이야기들은 적당히 자르고 설명해주었다. 샨과 라휠이 존재하는 이유, 레바에게 레스라고 한 이유를. 그 외에 그들이 궁금해하는 건 모두 말해주었다.


"그럼 샨은 나를 레스로 보고서 그렇게 친근하게 대한 거군."
"그렇지."


레바는 샨을 돌봐왔다. 그럴 때마다 샨은 애 취급하지 말라며 화냈지만 레바를 잘 따랐다. 처음에 느낀 친근감에 레바는 그녀와 함께 지낸 시간은 짧아도 카니만큼이나 정이 들었다.

그런데 샨은 자신을 통해 레스를 보고 있을 뿐 그 외에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녀가 자신을 공격했을 때는 샨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괜찮았다.

하지만 죽이지만 않을 뿐 샨도 마찬가지였다. 레바가 검은 머리로 염색이라도 한다면 망설임없이 떠날 것이다. 샨은 그런 존재다.
샨이 원한 것이 아니기에 그녀를 원망할 수도 없다.

카니는 레바를 끌어안고서는 토닥여주었다. 그녀도 샨과 지내면서 정이 많이 들었기에 레바의 마음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뭐, 일단 내가 있으니 저 녀석이 죽을 일은 없을 거다. 샨이 죽지 않는 이상 그 녀석도 나오지 않을 거고. 어차피 너희들도 내가 필요하겠지?"


라휠은 아를리와 눈을 마주치고 말했다. 그는 알고 있다. 혼혈과 순혈에 얽힌 복잡한 관계, 지금 처해있는 상황과 앞으로 일어날 일들도. 아를리는 생각했다. 미샤, 그 여자는 가만히 있지 않겠지.


"...저 혼자 지킬 수 있습니다. 레바도 뛰어나니 상관없어요."
"아니. 넌 마법을 쓰면 안 돼. 그 여자하고 싸웠다가는 모든 마력을 소비해서 죽을걸."


아를리는 반박하려 했지만 리카와 눈이 마주쳤다. 아를리는 입술을 깨물고 라휠을 노려보았다. 라휠은 그런 시선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얼마 남지도 않은 마력인데 싸울 결심을 하다니 죽을 작정이었나?"


아를리는 고개만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카니가 당황하며 정말이냐고 울음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라휠은 한숨을 쉬었다.


"나 혼자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놈들이 몇천 명이든 난 안 져."


라휠의 말에 카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혼자만요? 라휠 씨, 아까 샨 말고도 한 명 더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당신과 같은 사람이 한 명 있다면서요."
"사람은 아니다만. 아무튼 그 녀석이 우릴 편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지 마. 그 녀석은 샨을 싫어하거든."
"네? 왜요?"
"레바랑 비슷한 이유지."




15. 리셋




라휠은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얼마나 살아왔는지에 대한 것이나 마법에 대한 이야기를.


"마법은 신의 아이들만 알고 있었어. 그때의 유적을 순혈들이 파헤쳐서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거고."


카니는 라휠이 말해주는 마법에 대한 이야기에 흥미를 보였다.


"마법은 순혈만 쓸 수 있는 데 그건 왜 그런 거예요?"
"순혈들의 마력이 안정되어 있으니까."


라휠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손짓했다. 그러자 공중에 그림이 그려진 거대한 판이 나타났다. 라휠은 어느새 손에 든 작은 봉으로 사람 모양의 한 그림을 가리켰다.


"종족마다 마력이 달라. 혼혈들도 마력을 가지고 있지만, 너무 작고 불안정해. 여러 종족의 마력이 섞인 혼혈들은 마법을 쓰면 몸이 폭발해버린다. 그래서 마법을 쓰면 안 돼."
"저, 그럼 혼혈 중에서도 순혈처럼 한 종족의 특징만 나타나는 혼혈은 마법을 쓸 수 있나요?"


아주 가끔이지만 순혈과 같은 혼혈이 태어나고는 한다. 카니는 한 종족의 특징만 나타나는 체질로, 머리카락 색과 눈 색이 같은 계열이어서 언뜻 보면 순혈로 보인다. 하지만 그 힘과 육체는 순혈보다도 매우 약하다.

너무 몸이 약해서 사냥은커녕 다른 혼혈들처럼 험한 생활을 해서도 안 되는 카니는 자기 나름대로 할 수 있는 마을 순찰이라는 일을 찾았다.


"그럼 잠깐 봐볼까. 흠..."


라휠은 카니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계속되는 그 시선이 견딜 수 없었는지 카니는 고개를 돌렸다.


"안 되겠군. 넌 마력이 안정되있지 않아."
"그런...가요..."


카니는 한숨을 쉬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 자신은 너무나도 약하다. 사냥할 수도 없고 사냥을 하지 않는 다른 혼혈들처럼 마을을 보수한다거나 마법석을 캐내는 일도 할 수 없다. 그런 카니를 보며 라휠이 말했다.


"넌 쓸모없다고 생각하지만 네 능력은 생각보다 쓸모가 많아."
"그래 봐야 약한 걸요. 오빠한테는 통하지도 않아요."
"아니. 넌 틀림없이 도움이 될 수는 있을 거다. 네 능력을 믿은 한 언젠가."
"그, 그런가요?"


그런 둘을 가만히 지켜보던 레바가 입을 열었다.


"라휠, 나랑 잠깐 나가자. 카니는 올라가라."


레바는 라휠의 옷깃을 붙잡고는 밖으로 나갔다. 거실에 혼자 남은 카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잠시만. 난 샨에게 가봐야겠어."


가만히 끌려가던 라휠의 말에 레바는 잡고 있던 옷깃을 놓았다. 라휠은 옷매무시를 가다듬고는 집을 향해서 몸을 돌렸다.


"한 가지만 물어보자."
"뭐지?"
"순혈들에게 마법을 가르쳐 준 게 너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니라고 하면 믿어줄 건가?"
"그것 말고는 믿을 만한 정보가 없다면."
"...넌 정말 이상한 녀석이야."


라휠은 레바를 바라보았다.


"나도 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지켜보기만 했으니까."


라휠은 레바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발걸음을 뗐다. 라휠은 푸른 빛에 휩싸이더니 사라졌다.


고른 숨소리가 작게 울렸다. 세찬 바람이 창문 틈으로 들어오며 덜컹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천천히 소녀의 눈이 떠진다. 샨은 추위에 작게 떨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방 안을 둘러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그때, 문이 열리고 한 소년이 들어왔다. 소년은 샨을 바라보았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가족을 보는 듯이 애틋했다. 샨은 소년에게로 뛰어갔다. 샨은 허리를 숙여 소년과 눈높이를 맞춘 뒤 웃으며 말했다.


"안녕? 넌 누구야?"
"난 라휠이야."


샨은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렇구나! 난 샨이야!"


라휠은 머뭇거리다 그 손을 아주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래.
...반가워, 샨."


소년의 목소리는 어쩐 지 조금 쓸쓸하게 들렸다.


샨은 일어난 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레바가 처음 그녀를 봤던 그때처럼. 샨은 기억을 잃었어도 그들이 아는 샨과 같았다. 맑고, 활기찬 햇살을 닮은 소녀.


"있지, 레스."
"...레바야."
"맞다. 레바!"


평소와 같은 대화인데 같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샨은 레바에게 처음부터 레스라고 했었다. 이름이 비슷해 단순히 실수라고 생각했었지만, 이제는 안다. 그녀가 레스라는 이름을 부르며 레바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레바는 그 날 라휠이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말하자면 넌 후보인 거지."
"후보?"
"그래. 레스 후보."


레바가 레스를 닮은 건 외모뿐이다. 지금 샨은 레바와 같이 지내면서 그가 정말 레스인지를 판별하고 있다고 한다. 레스라고 판단되면 괜찮지만 레스가 아니라고 결론 나면 바로 죽인다.

다시금 헷갈리지 않기 위해서 '불순물'을 거르는 작업인 셈이다.


"그래도 내가 있으니 죽지는 않을 거야. 난 그 녀석을 막을 수 있다. 그 녀석이 나오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지만 바로 다시 봉인할 수는 있지.
물론 이 말을 듣는다고 안심하지는 않겠지만. 샨은 너를 떠나지 않을 거야. 죽이지 않는 이상 후보는 너로 설정되어있어. 나도 그건 막을 수 없지. 카루나가 남긴 제일 중요한 명령이니까."


라휠은 한참을 설명한 후 그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레바는 그런 그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라휠은 몇 십개의 나라와 몇 개의 제국이 멸망하는 것을 봐왔다고 말했다. 수 천년 넘게 자신의 의지대로 살 수 없는 건 어떤 심정일까. 그는 어떤 마음으로 레스를 찾아다니고 있는 걸까.

레바는 아무 말 없이 라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것이 레바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레바."
"왜."


라휠은 가만히 그의 손길을 밀쳐내지 않은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언제나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라휠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행복한가?"
"나름."
"그래. 나름 행복하군."


라휠은 그 말을 듣고는 웃었다.


"그럼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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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1-11 11:36 | 조회 : 1,323 목록
작가의 말
B.B.ZZ

행복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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