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라휠의 기억

라휠의 손이 샨의 눈을 덮었다. 샨은 금세 다시 잠들었고, 라휠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러니 내가 말했는데...어쩔 수 없군."
"이상한 말 하지 말고 그걸 데리고 사라져버려요!"
"안 된다. 이미 샨이 '인식'해버렸으니까. 이제 이 놈이 죽을 때까지 안 떠날걸."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 놈한테서 샨을 떼어놓을 방법은 없다는 거지."

라휠은 무표정한 얼굴로 한숨을 쉬고는 레바의 등을 토닥였다. 마치 위로라도 하는 것처럼.

"당신이 저걸 막을 수 있잖아요!"
"나는 관리할 뿐. 막을 수는 없다."

라휠은 그렇게 말하고는 아를리를 지나쳐 어딘가로 걸어갔다. 레바가 그를 부르자 그는 계속 그대로 걸어가며 말했다.

"일단 너희들 집에 가서 얘기하자고. 춥잖아?"

아를리가 항의했지만 라휠은 무시하면서 마을 중앙에 있는 그들의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갔을 때쯤, 아를리는 말하다가 지쳐서 식탁에 엎드려있었고 라휠은 태연하게 집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아를리는 리카를 데려왔다. 사정을 들은 리카는 그 말을 믿지 못했다.

"나보고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
"뭐, 못 믿는 게 일반적이지."
"대체 이 꼬맹이는 뭐야? 애늙은이처럼 말하는 게 재수 없어!"
"늙은이는 맞지."
"뭐?"

라휠은 말보다 보여주는 게 빠르다고 말하고는 리카의 앞에 섰다. 그의 몸이 빛나더니 푸른 빛의 작은 조각들로 쪼개졌다. 바람에 휘날리듯 위로 향하던 조각들은 리카의 머리보다 조금 올라가서 멈추었고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자, 이걸 보면 믿을 수 있겠지?"

방금까지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던 라휠이 청년이 모습으로 변했다. 리카는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볼을 꼬집어 보았다. 틀림없는 현실이다.

이런 걸 보면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의자가 부족해 카니가 일어서있겠다고 말했지만 라휠의 손짓 한 번에 고급스러운 의자가 나타났다. 그가 탁자를 향해 손가락을 튕기자 탁자 위에 비단으로 만들어진 테이블보와 고급스러운 식기들과 간식들이 나타났다. 카니가 눈을 빛냈다.
어느새 라휠 손에는 코코아까지 들려있었다.

"그냥 이야기만 하면 심심하잖아? 마음껏 먹어라 꼬맹이들."
"이제 물어볼...저게 뭐야?"
"신경 쓰지 말고 앉아."

방에 샨을 눕히고 온 레바가 묻자 라휠은 손가락으로 비어있는 의자를 가리키고는 코코아를 홀짝였다. 모두가 자리에 앉자 라휠은 웃으며 과자를 하나 집었다.

"그래, 묻고 싶은 게 많겠지? 내가 아는 거라면 전부 대답해주지."
"너와 샨은 대체 뭐지?"

라휠은 레바의 말에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닮긴 닮았어."
"뭐?"
"너희들도 짐작하고는 있겠지만 난 인간이 아니다."

라휠이 손가락을 튕기자 작은 마법진이 나타났다. 아를리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자 라휠은 주먹을 쥐었다. 마법진이 사라졌다.

마법진을 만들고 지운다.
마법사들은 지팡이에 마법을 미리 여러 개 저장해두고 사용한다. 필요할 때는 자기 생각과 마력을 함께 지팡이에 흘려보내면 원하는 마법진이 그려진다. 마력만 있다면 횟수에 제한은 없다.

다만 지팡이의 품질에 따라 넣을 수 있는 마법의 개수가 갈린다. 그러나 마법사들이 절대 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이미 발동된 마법진을 지우는 것이다. 간단한 마법의 경우 위력을 수정할 수는 있지만, 그마저도 없앨 수는 없다.
그런 일을 라휠은 맨손으로 간단하게 해낸 것이다.

"나는 마법으로 이루어졌지. 셀 수 없이 많은 마법에 자아와 사람의 형태를 부여한 거야."
"그런 게 가능하다고?"
"여기 그 증거가 있잖아."

아를리의 말에 라휠은 웃으며 자신을 가리켰다. 라휠은 과자를 한 입 베어 물고는 다리를 뻗어 식탁 위에 발을 걸쳤다. 레바가 그를 보고 물었다.

"그럼 샨도 너와 같은 존재란 말이야?"
"아니. 샨은 좀 달라. 평소에는 그냥 인간이다. 내가 봉인해두니까."

리카는 샨에게서 떨어지지 않던 목걸이를 떠올렸다. 불길한 푸른빛의 자물쇠와 그것을 가둔 새장, 둘러싼 사슬들을.

"샨은 약속때문에 죽으면 몸을 빼앗긴다. 샨 본인의 특성때문에 살아나긴 하지만 그 전까지 그 몸은 그 녀석의 것이야."
"잠깐, 다시 살아나다니? 게다가 그게 샨이 가지고 있는 힘이라고?"
"힘이라기보다는 체질이지."
"그런 종족이 있을 리가..."
"있었다. 샨은 돌연변이지만 그와 비슷한 특성을 가진 종족이 있었어."

라휠은 레바를 힐끔 바라보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그것뿐 다시 시선을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백발에 보라색 눈. 너희들도 알고 있을 거야. 저주받은 아이라면서 바로 죽이라고 들었을 테니까."

혼혈과 순혈이 나뉘기 전부터 있었던 미신으로, 실제로 그런 아이를 죽이지 않은 부모들이 아이에게 살해당한다거나 하는 사건들이 있어서 미신이 아닌 관습의 하나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들은 본래 아주 오래전에 인간에 의해 멸망한 종족이다. 일정 시간만을 성장하고 그 뒤로는 노화되지 않으며 무한한 마력을 가지고 있고,
심장을 부수지 않는 한 절대 죽지 않고 떨어져 나간 몸도 재생이 가능한 데다 죽으면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부모가 어떤 종족이든 원래 자신의 종족으로 환생하는 '신의 아이'라 불리던 종족이지."

라휠은 말을 이어가며 한 남자를 떠올렸다. 흰색 머리카락, 짙은 보라색의 눈동자. 그리고 언제나 미소를 짓고 있던 남자를.



"들리니? 들리면 눈 좀 떠봐."

눈을 뜨자 보인 것은 한 여자와 남자. 그들은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다. 남자가 말했다.

"안녕? 난 레스야. 너와 이야기하는 걸 쭉 기다렸어. '라휠'."

그것이 라휠의 첫 번째 기억이었다.



11. 라휠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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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1-03 17:43 | 조회 : 1,221 목록
작가의 말
B.B.ZZ

본래 삽화를 올리려 했으나 노트북이 타블렛을 인식하지 못하는 관계로(...)올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인식이 되다가 안 되다가 하네요ㅠㅜㅠㅜ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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