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라휠

그녀는 가만히 레바를 바라보았다. 시선은 그의 눈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지만 온몸을 관찰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한참 후 입을 열었다.

"너, 아니구나."

그 순간 레바는 뒤로 물러났다. 레바가 있던 자리에 소녀의 손이 지나갔다. 무언가를 베려는 듯 손날을 세운 소녀는 차가운 눈으로 레바를 바라보았다.

"아니라면 필요 없어."



11. 라휠



소녀의 손안에 작은 마법진이 그려졌다.
마법진은 크기가 아니라 얼마나 겹치느냐에 따라서 급이 달라진다.

세 개의 원이 겹쳐진 마법은 정예마법사들만이 할 수 있는 상위 마법이다. 몇 초 만에 상위마법을 조합한 그녀는 그 손을 레바에게 뻗으려 했다.

"거기까지."
"...너는."

소녀의 뒤로 한 소년이 걸어왔다. 소년은 음산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소녀의 손이 빛나는 사슬에 구속되고 마법진이 사라졌다.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둘은 서로의 눈을 마주쳤다. 소녀가 입을 열었다.

"뭐 하는 거지? 그대 몸에 새겨진 명령만을 수행해라."
"모처럼 자아가 있는데 그러면 재미없지 않나?"

소년이 소녀를 향해 손을 뻗고는 주먹을 쥐었다. 소녀의 주변에 마법진이 그려지더니 그 안에서 사슬이 튀어나와 몸을 휘감았다.

"이래 봐야 그대가 원하는 건 이루어지지 않는다. '관리자'."
"난 관리자가 아니다. 라휠이야."
"아니, 넌 관리자다."

소년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졌다. 소년은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 사실을 잊지 마라 관리자여."

그녀의 몸이 사슬에 감긴다. 몸에 감겼던 사슬이 푸른빛을 내며 풀리더니 작게 뭉쳐 어떤 형상을 만들어갔다. 샨이 하고 있던 목걸이의 모습을.

"기억 삭제를 시작합니다."

작은 목소리와 함께 샨의 눈이 감겼다. 목걸이는 샨에게 채워졌고 마법진이 사라지자 샨은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눈을 감은 채 쓰러지는 그녀의 어깨를 레바가 잡아 지탱했다. 라휠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레바 앞으로 걸어왔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군."

라휠은 잠든 샨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조금 전 노려보던 것과는 다른,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눈길이었다. 그러다 곧 소년은 뒤를 돌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손짓했다.

"너희들도 전부 잊어라."

손짓 한 번으로 사람들은 멍한 눈을 하더니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가서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죽은 사람들에 대한 기억도 조작되어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게 된다.

레바와 카니, 라휠말고는.

"잊는 게 낫겠지. 이런 건. 안 그런가?"
"레바, 무슨 일..."

뒤늦게 따라온 아를리가 라휠을 보고 놀라 멈춰섰다. 라휠은 아를리를 보더니 손을 흔들었다.

"오, 아직 살아있었구나, 꼬마야."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아를리의 말에 라휠은 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잠든 샨의 모습에 아를리가 소리쳤다.

"무슨 일인지 말 안 해도 알 것 같군요. 또 내버려 둔 건가요?!!"
"아를리, 너 이 녀석을 알아?"
"알다마다. 저 녀석의 오빠랑 내가 아는 사이였거든."

아를리는 라휠과 레바의 사이를 가로막더니 라휠을 노려보았다. 라휠은 별 말없이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입에 물었다. 놀라서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카니가 몸을 일으켜 라휠에게 말했다.

"당신, 누구죠?"

현재 상황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라휠이 위험한 존재라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들을 해치려했다면 샨을 막지도 않았겠지. 카니는 그렇게 판단하고 그에게 질문했다.

라휠은 자신을 경계하면서도 눈을 피하지 않고 물어오는 카니를 보고 웃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좋은 질문이구나 아가야. 자, 상으로 주마."
"누구보고 아가...엇?"

카니 위로 마법진이 생기더니 무언가가 떨어졌다. 카니는 본능적으로 떨어지는 물건들을 빠르게 낚아챘다. 사탕과 과자, 초콜릿이 포장된 채 손 안에 가득찼다.

"어, 어, 이건?"
"응? 그러고 보니 이런 건 여기서 보기 힘든 거였던가? 먹는 간식이란다 아가야. 포장은 뜯고 먹어라."

이런 간식거리는 이곳에서는 평생 한 번 먹기도 힘든 귀한 음식이다. 카니가 기뻐하며 포장을 뜯으려 할 때, 아를리가 카니의 손을 쳐냈다. 카니가 들고 있던 간식들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뭐하는 짓이냐 꼬맹아."
"당신하고는 연관되고 싶지 않아!! 저걸 데리고 사라져버려!"
"아를리."

레바가 아를리를 부르자 아를리가 그를 바라보았다. 레바를 바라보는 아를리의 눈은 어째서인지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너, 뭔가 알고 있어?"
"...알 필요 없어. 알아서도 안 되고 엮이지도 마. 널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레바."
"아니, 난 알아야겠어."

아를리는 절대 안 된다고 말했지만 레바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보고도 지나칠 수는 없었다.억울하게 죽은 사람들, 그 일에 자신이 얽혀있을지도 모른다.

라휠은 두 사람의 싸움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말했다.

"이봐, 일단 샨은 나에게 맡겨라."
"너도 말해줘야겠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지금 그럴 얘기할 때가 아니라...아, 늦어버렸군."

라휠의 말에 레바는 고개를 숙였다. 샨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안녕, 난 샨이야. 넌 누구야?"

샨은 처음 보았을 때처럼 환하고, 따뜻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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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1-01 20:03 | 조회 : 1,308 목록
작가의 말
B.B.ZZ

와 다 올렸다! 이제부터 연재에는 조금 시간이 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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