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습격

잊으려 해도 잊히지않는 기억이 있다. 코끝을 맴도는 혈향, 사람들의 비명소리, 그 지옥을 보며 웃는 남자.

"오빠, 제발 멈춰요!"
"아를리. 이건 전쟁이다. 싸움을 먼저 걸어온 건 저것들이야."
"하지만 이건 전쟁이 아니라 그냥 학살이에요! 제발 그만둬요!!"

피가 없는 곳을 찾기 힘들 정도로 잔혹하게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한 소녀가 있다. 차가운 푸른 눈으로 사람을 찢어 죽이는 작은 소녀. 아를리는 그 푸른 눈을 보고서 도망쳤다. 도저히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그 날의 비명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9. 습격



아를리는 그 날 이후 샨을 묘하게 무시했다. 둔한 편인 샨도 어렴풋이 느낄 정도로. 보다 못한 리카나 레바가 지적하면 아를리는 장난으로 넘겨버렸다. 지금까지 이런 아를리의 모습을 본 적이 없기에 당황스럽기만 했다.

"언니, 대체 왜 그래?"
"응? 뭐가아~?"
"어휴...말을 말자..."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아를리는 지금껏 혼혈의 방패가 되면서 순혈들과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 샨은 순혈이기 때문에, 그런 그녀를 싫어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카니와 샨은 순찰대신 마을의 복구를 도와주기로 했다. 외곽 쪽 집이 몇 개 무너졌다. 거친 겨울이 오기 전에 모두 복구해야 했다. 카니와 샨은 많은 일은 도울 수 없지만 작은 일을 하나씩 맡았다.

"카니, 여기는 왜 무너진 거야?"
"숲이 바로 앞이라 마물들이 여기로 오곤 하거든."

그런 위험한 곳이기에 아를리가 이쪽에 머무르려 했었다. 아를리는 어떤 마물이 와도 위험할 일이 없으니까.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아를리가 죽어서는 안 된다'며 반대해 결국 마을 중앙에 집을 지었다.

카니는 복구에 필요한 재료를 지게에 올렸다. 몸이 약한 카니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샨, 의외로 힘 세구나."
"그런가?"

샨은 무거워 보이는 재료도 척척 옮겼다. 다른 사람들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샨은 카니처럼 지게를 쓰지 않고서 빠르게 옮긴다.

"대단하다~"
"아니, 나는 대단한 정도도 아닌걸!"
"아니야. 샨은 대단해."

샨과 카니가 서로 훈훈한 대화를 나누는 동안 마을 중앙에 있는 그들의 집에서는 아를리와 레바가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정말 샨을 거기에 보내도 괜찮아?"
"믿을 만한 사람이야."

아를리는 오늘 아침 받은 답장을 레바에게 건넸다. 답장에는 아를리의 부탁이니 최선을 다하겠다고 쓰여 있었다. 그는 예전에 사막을 헤매다 아를리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자의 아들로, 아버지를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라며 여러가지 부탁을 해결해줬다.

"혼혈은 어디를 가든 차별을 받아."
"하지만 샨은 혼혈처럼 보이지도 않으니 괜찮을 거야."
"그건 그렇지만..."

레바는 어째서인지 그녀를 떠나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 날의 밤을 떠올렸다.

"그럴지도."

그 말 때문일까? 레바는 정말로 그녀를 어디선가 본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공포도 느껴졌다.

'왜 이러지.'
"레바, 레바!"

레바는 아를리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창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왠지 저쪽이 시끄러워. 좀 봐줄래?"
"어, 응."

그는 아를리의 이마에 있는 보석을 바라보았다. 처음 봤을 때보다 작아진 보석. 이 보석은 아를리의 수명을 나타낸다. 아를리는 특수한 종족으로 마력으로 이루어진 종족이다.

이 종족은 몸이나 영혼이 마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몸이 마력으로 이루어진 경우에는 마력을 키워나가며 성장하지만, 어느 정도 성장하면 더 이상 마력을 키울 수 없어 마력을 사용하면 점점 몸이 작아진다.

아를리는 영혼이 마력으로 이루어져있어 몸이 작아지지는 않지만 대신 마력을 쓸수록 영혼이 깎여나간다. 그리고 마력을 모두 사용하면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적어지는 마력만큼 노화가 나타난다. 아를리는 겉모습은 젊어 보이지만 감각들이 점점 퇴화해서 지금은 이렇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레바의 눈을 빌려야 했다.

레바는 밖을 살펴보았다. 마을 외곽 쪽에서 회색의 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잠깐, 저건..."

카니는 샨의 손을 잡고 달렸다.

"꺄아아악!! 살려줘!"
"싸울 수 있는 놈들은 다 모여!!"

거대한 마물이 보수를 하던 장소를 습격해왔다. 몇 사람은 싸우려 모였지만 혼란에 빠진 사람들은 정신없이 도망치기에 바빴다. 카니는 싸울 수만 있으면 싸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 약하기 때문에 오히려 방해만 된다.

"저, 저게 뭐야?!!"
"놀랄 시간 없어! 오빠를 불러와야 해!! 오빠랑 아를리 언니라면 충분히 이길 수 있어!"

별로 멀지 않은 거리를 뛰기만 했는데도 벌써 숨이 가빠져 온다. 카니는 자신의 약함을 원망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앗, 오..."
"카니!!"

카니가 레바를 보며 그가 왔다는 것을 알리려는 순간, 샨이 카니를 밀쳤다. 카니는 몇 바퀴를 구른 다음에야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으윽...무슨...어?"

샨이 없다. 카니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쪽 벽에,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샨!!"

레바가 땅에 내려앉으며 소리쳤다. 샨은 카니를 밀치고 마물의 곤봉 같은 꼬리에 맞고 날아가 이층집 벽에 박혔다. 제발 아니길 바라며 그는 그곳을 바라보았다.

온통 붉은 피로 덮여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피가 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잘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무참하게 짓뭉개진 작은 새장이 떨어졌다. 그 안에 있던 푸른 자물쇠는 그 형태를 유지한 채로 푸른 빛을 내며 사라졌다.


샨이 눈을 뜨자 본 것은 검푸른 공간이었다. 자신은 푸른빛이 나는 신비한 물 위에 누워있었다. 투명하고 단단한 막이 물과 샨의 사이를 가로막은 듯이, 물에 빠지지 않았다. 샨은 엎드려서 그 물 안을 바라보았다. 예쁜 빛이다. 샨은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왜 여기 있지?'

샨은 멍하니 물 안을 바라보았다. 물 안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너, 넌 뭐야?!"

푸른빛의 머리카락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샨과 똑같은 모습을 한 여자였다. 그녀는 차갑고 무표정한 눈으로 샨을 바라보며 말을 걸어왔다.

"신의 아이야, 약속을 지켜라. 너의 영혼에 한 그 맹세를 지켜."
"무슨!"

말을 이으려던 샨은 코와 입 안으로 밀려들어 오는 물에 괴로워했다. 어느새 샨이 물 안으로 들어와 있었고, 자신과 닮은 여자가 그 밖에 있었다. 샨은 곧 정신을 잃고 물 안으로 가라앉았다. 여자는 그런 샨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들어 검기만 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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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1-01 20:00 | 조회 : 1,174 목록
작가의 말
B.B.ZZ

아니 시한부 선고가 얼마나 지났다고 사망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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