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이름

레바의 첫 기억은 낡은 나무집에 삐걱거리는 침대 위에서 눈을 뜬 자신, 그리고 자신을 구했다고 말한 여자의 모습. 아를리라는 이름을 가르쳐준 여자는 숲을 순찰하던 도중 머리가 다친 채로 쓰러진 그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아를리는 그가 머리를 다쳤을 때의 충격으로 기억을 잃은 것 같다고 했다.


기억해야 하는 게 있어. 정말 중요한 거야.


그리고 그는 기억을 떠올리려던 순간 심한 고통에 기절했다. 그리고 다시 깨어났을 때 아를리는 거울로 그의 몸을 비춰주며 말했다. 가슴 중앙에 여러 개의 가지가 뻗어있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검은 원은 그에게 심어진 저주라고.

그녀는 레바의 반응을 보고 그 저주가 기억에 관련된 저주일 것 같다고 말했다.


네가 기억을 떠올리려 할 때 가슴, 정확하게는 심장이 아플 거야. 그 저주는 술사의 영혼으로 너의 영혼에 심어둔 저주.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가지가 뻗어 나가고 그 저주가 온몸에 퍼져 두 눈에 닿으면 넌 죽을 거야.


그는 자신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마저 허락받지 못했다.


이름은 존재의 근원. 떠올리자마자 죽게 될 거야.


아를리는 이왕 기억을 잃은 거 그냥 새로운 삶을 살라고 말했다. 아무리 기억해도 기억나지 않는 거라면 중요하지 않은 기억일 것이라고 말하며 그를 위로해주었다.


...그럼 나는 뭐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이름조차 모르는 자신은 대체 무엇인가.


너는...너는 레바야. 지금부터 그 이름으로 살아. 넌 새로 태어난 거니까.


그렇게 그는 레바가 되어 지금까지 살아왔다.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나가면서 그는 과거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레바로 살아가기로 했다. 레바로 사는 삶은 아주 즐겁고 행복하니까.




8. 이름




아를리는 레바의 몸을 보고서 눈물을 흘렸다. 레바는 아를리의 반응만으로도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짐작할 수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네가 갇힌 날부터 조금씩. 전에 네가 없었을 때는 이러지 않아서 당황했어."
"왜 그런 거야? 그냥 레바로 살라고 했잖아!!"
"떠올리지 않았어."


레바는 아를리를 만나기 전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는 기억을 되찾으려는 시도를 카니를 돌보면서 그만둔 지 오래다. 떠올리려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저주가 진행되고 있다.


"그럼 왜..."
"나도 모르겠어. 이 저주를 건 놈이 날 죽이고 싶어 하는 건 아닐까?"
"그건, 그럴 리가..."


아를리의 말에 레바는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 이 저주를 건 사람을 알아?"
"아니, 그, 영혼을 사용한 저주라고는 하지만 그건 이미 의식이 없어. 자아가 있을 리가 없잖아."


아를리는 그렇게 말하고는 레바를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저주를 살펴보다가 결국 슬픈 눈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레바에게 옷을 가져다주었다.

그녀는 샨에 관해 연락해야겠다면서 밖으로 나갔다. 레바는 집에 혼자 남겨졌다. 카니와 샨은 마을을 둘러보고 해가 질 때쯤 돌아올 것이다. 레바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이건 버려야겠네."


찢어진 옷을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검은 저주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진다. 분명 살아있는 것이 아닌데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임이 느껴져 기분이 나쁘다. 이유도 모른 채로 자신의 목숨을 빼앗기는 것도.

자신이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모든 인간이 그렇듯이 자신의 끝을 상상해 본 적도 있다. 하지만 역시 소중한 이들을 두고 가야 하는 죽음은 두렵다.


"넌 대체 나에게 뭘 원하는 거지?"


레바는 자신의 심장을 움켜잡고 있는 영혼에게 물었다. 의식이 없는, 그저 저주로만 남은 영혼.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다. 차라리 화를 내고, 원망할 수 있는 상대였으면 좋았을 텐데.

레바는 눈을 감았다. 잠을 자는 동안은 현실에서 도망칠 수 있다.


비틀거리며 걷던 아를리는 얼마 못 가 주저앉고 말았다. 레바의 몸에 깃든 저주. 아를리에게는 그의 목숨을 앗아갈 저주를 막아야만 한다.


'안돼, 이대로 가다간 레바가...'


그녀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그 날의 기억. 상냥한 목소리, 그는 언제나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에게 아를리는 소중한 친구였고 아를리에게 그는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이었다.


"너에게 무리한 부탁을 해서 미안해 아를리. 하지만 꼭 들어줘."


그 날만큼 미안하다는 말을 원망해본 적이 없었다. 결국 아를리는 끝까지 자신의 마음을 전하지 못한 채, 그의 친구로 남았다.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는 사람.


"레바..."


아를리는 그를 살려야만 한다.


'그 애가 가지고 있던 그 아이템.'


샨이 항상 차고 다니는 목걸이. 식사 도중 리카는 샨이 그 목걸이를 풀 수 없다며 해결해달라고 말했다. 처음 샨을 보았을 때 아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아이템은 길고 긴 삶 동안 그녀가 본 아이템 중 가장 위험한 물건이다.


'그 녀석들 그걸 노리는 거야. 절대 넘겨서는 안 돼.'


아를리는 마을의 끝, 다른 나라로 갈 수 있는 중립의 사막 앞에 서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 그 종이를 둥글게 말아 말한 후 바람에 날려 보냈다. 종이는 붉은빛을 내는 새처럼 변하더니 목적지를 향해 날아갔다.


"미안해, 애들아."


샨에게 정이 든 아이들과 레바에게는 미안하지만 샨은 다른 곳으로 떠나보내야만 한다. 그리고 절대 돌아와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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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1-01 19:59 | 조회 : 1,193 목록
작가의 말
B.B.ZZ

빠른 전개! 정말 너무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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