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남은 시간

레바는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목을 지나 오른쪽 볼까지 올라온 검은색 불꽃이 이글거렸다. 그는 윗옷을 벗으려다 손을 내렸다.

도저히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천으로 거울을 덮어버렸다. 하지만 왼손에 검은색 줄기가 손가락을 타고 손톱까지 검게 물들여버린 것을 보고 말았다. 그는 장갑을 끼고서 입가를 가릴 수 있는 두꺼운 목도리를 둘둘 감았다.

다가오는 겨울이 반갑게 느껴졌다.




7. 남은 시간




"레스, 좋은 아침~!"
"넌 내 이름 외울 때 지나지 않았냐?"
"헉, 미안!"


샨은 처음 이름을 헷갈린 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레바의 이름을 하루에 한 번씩 틀리고 있다. 전에는 기분이 나쁘기도 했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져 버렸다.

레바가 자리에 앉자 리카가 수프를 담은 그릇을 내밀며 왜 이렇게 늦게 나왔냐고 투덜거렸다. 카니는 옷깃을 여미며 많이 피곤하냐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샨도 오늘의 레바는 너무 힘들어 보여서 오늘은 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거들었다. 레바는 작게 미소 지었다.


"아를리는 언제 오더라?"
"한 이틀이나 삼일쯤 더 있어야 올걸. 그런데 왜 아무 말도 없다가 갑자기 언니를 찾아?"
"일주일 넘게 안 보니까 해야 될 말이 쌓여서 잊어버릴 것 같다."
"나한테는 말 안 하냐? 나도 이제 애가 아니라고. 마을 일에 관련된 거면 나도 의지해도 괜찮아."
"그렇네. 애가 아니라고 하는 게 아직 덜 큰 것 같지만."
"레바, 솔직히 너보다 내가 정신적으로 더 어른 아니냐?"


레바는 가소롭다며 웃었다가 리카가 던진 숟가락에 이마를 맞았다. 평소와 같은 대화, 그러면서도 자신을 걱정해주는 말들. 너무나도 상냥한 아이들.


"매일 같이 봤는데 왜 이렇게 갑자기 자란 것 같냐."
"오빠, 갑자기 무슨 소리 하는 거에요. 부끄럽게."
"레스. 왜 나도 키운 것처럼 얘기해."
"처음에 네가 워낙 애 같았어야지."


샨은 기억을 잃었다. 말하기나 쓰기, 기본적인 생활상식은 있었지만, 숟가락의 사용법을 모른다거나 무릎 아래까지 오는 긴 부츠를 신고서 신발 끈을 푸는 방법을 몰라 공황에 빠지는 일도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 일이 있었기에 레바는 샨을 성인으로는 보기 힘들었다. 레바는 샨을 어린 카니를 돌봐줬듯이 아버지의 마음으로 그녀를 돌봤다.


"나, 난 진짜 성인이야!!"
"그래, 그래."
"렛, 아니 레바!!!"


샨의 외침에 레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샨이 움찔거리며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가 향하는 곳은 출입문이었다. 샨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리카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마?"


레바가 문을 열자 그곳에서는 막 노크를 하려고 했는지 손을 들고 있는 여인이 서 있었다. 이마에 작은 보석이 박힌 선한 인상의 여인을 보자마자 리카가 소리쳤다.


"아를리 언니!!"
"리카~"


리카는 의자를 박차고 달려가 그녀를 껴안았다. 아를리는 리카를 안고서 머리를 쓰다듬으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리고 레바와는 간단한 고갯짓으로 인사를 한 후 카니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어?"


아를리의 시선은 샨에게 고정되었다. 샨은 모두에게 말로만 듣던 아를리가 자신에게 뜨거운 눈길을 보내자 어깨를 움츠리고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레바는 당황했다. 아를리가 놀랄 것은 알았지만 저렇게까지 놀랄 줄은 몰랐다. 게다가 샨을 보는 아를리는 그녀를 겁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를리. 일단 나중에 설명할게. 들어와서 밥 먹어. 춥겠다."
"어? 어, 응."


아를리는 대답을 하고서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리카를 데리고 느긋하게 자리에 앉았다. 레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의 왼손을 바라보고 다시 한숨을 쉬었다.


"음~ 그러니까 기억을 잃어서 돌보고 있는 거라고?"


식사를 마친 뒤, 카니는 마을을 둘러본다면서 샨을 데리고 나갔다. 리카와 레바는 사냥에 나가지 않고서 아를리에게 샨에 대한 이야기를 설명해야했다.


"잘했어. 큰일 날 뻔 했네."
"큰일?"
"비밀로 하라고 했지만 너희 두 사람에게는 이야기를 해줘야겠지."


그 날, 아를리가 불려갔던 이유는 혼혈이 마을에서 난동을 부렸다거나 하는 작은 이유가 아니었다.


"혼혈 한 명이 최정예 마법사 한 명을 죽였어."


마법을 쓰는 수많은 마법사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마법사 10명에게만 내려지는 것이 최정예 마법사라는 칭호. 보통 일반 마법사에게도 혼혈은 이길 수 없다. 그런데 최정예 마법사를 혼혈이 죽였다.


"진짜야?"
"그래. 날 가둔 건 그 과정에서 일어난 목격자와 피해를 완전히는 숨길 수 없어서 그런 것 같아. 혼란을 막으려고 핑계를 댄 거야."


이 일이 알려지면 마법의 힘이 의심받고, 마법사들이 그 힘으로 얻은 여러 이득이나 편의에 항의하는 사람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혼혈들은 마법사를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 다시 한번 과거의 그때처럼 혼혈을 몰아내려고 할 것이다.

혼혈만이 아니다. 주변 나라들도 그동안 마법의 힘 때문에 그들의 나라에 굽히고 살아왔다.

믿기 힘든 말이지만 레바에게는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숲에서 본 마물의 시체, 그리고 그 날의 잔혹한 골목길.


"큰일이군."
"그 혼혈이 여기 있으니 찾아서 넘기래."
"순순히 잡힐까?"
"잡아서 넘겨야 해?"


리카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마법사만 없으면 순혈들은 별거 아니야! 왜 우리가 굳이 그 사람을 넘겨야 해? 그냥 그 사람이랑 같이..."
"리카. 우리가 순혈을 몰아낸다고 해도 주변의 다른 나라들이 있어. 우리끼리 싸우면 그걸로 이득을 취하려는 나라들이 분명 있을 거야."
"하지만!"
"...네 마음은 알아. 하지만 뒤를 생각해야지. 우리는 이 땅을 지킬 수 없을 거야."


현자가 순혈에게 마법을 내려주기 전, 이 나라는 제일 작은 나라였다. 처음엔 나라가 아닌 여러 나라의 땅에서 쫓겨나거나 섞이지 못한 여러 종족이 죽음의 땅을 지나 제일 구석 땅에 부족 단위로 정착한 곳이었다.

자신들의 신세를 바꿔보고자 서로 힘을 합치기도 했지만, 종족끼리 싸우거나 순혈과 혼혈로 나뉘어서 서로 견제하고 차별하는 엉망인 나라였다.

현자가 초대 왕에게 여러 가지를 알려주고 마법을 가르쳐주어 겨우 대륙에서 제일 거대한 나라가 될 수 있었다.


"그래. 마법사를 죽이는 혼혈이 한 번 나타났으니 전처럼 대놓고 억압하지는 못하겠지. 너무 눌렀다가 이번 같은 경우가 또 나오면 곤란하니까."
"그래도 지배받는 건 똑같아."
"어쩌겠냐. 방법이 없는걸. 그놈 안 넘기면 이번에는 마법으로 이 일대 지역을 쓸어버릴지도 몰라."


리카는 분한 듯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런 리카의 손을 아를리의 손이 포개며 토닥여주었다.


"그리고 샨 문제도 있어. 기억을 잃은 샨을 보면 그 일과 연관 지어서 생각할 수도 있어. 그럼 큰일이야."
"그 문제도 어떻게든 해야겠군."
"내가 이웃 나라에 아는 사람이 있어. 급하다고 연락하면 샨을 맡아줄 수 있을 거야."


여러 이야기를 하고 리카는 뒤늦게라도 사냥꾼들에게 합류하기 위해서 나갔다. 레바는 오늘은 쉬겠다고 말하고 아를리와 함께 남았다. 레바는 장갑을 낀 자신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아를리,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일단 그 전에 옷 좀 벗을래?"
"뭐?"


레바가 질색하며 팔로 몸을 감싸자 아를리는 웃으며 그의 옷을 잡았다.


"갑자기 무슨 말이야 너!!"
"왜 그래! 매일 확인하던 거잖아!! 네 몸이 어떤지 알면서!"
"일단 내 말 좀 들어!!"
"네 얼굴에 그건 뭐야? 응??"
"뭐? 보여? 아니, 설명할 테니까 잠시만!!"


한참을 씨름하다 아를리가 잡아당긴 옷의 어깨 부분이 찢어지고 그의 맨살이 드러났다. 레바의 어깨를 본 아를리는 창백한 얼굴이 되어 뒷걸음질 쳤다.


"레바 너..."
"그러니까 말 좀 들으라니까."


레바는 한숨을 쉬고서 윗옷을 벗었다. 온몸에 검은색의 줄이 여기저기 뻗어 나가 있었다. 그리고 가슴의 중앙에 그 중심이 있었다. 검은 불꽃이 뭉친 손바닥만 한 크기의 그것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검은 구멍같이 보였다.


"아를리, 나는 얼마나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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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1-01 19:58 | 조회 : 1,262 목록
작가의 말
B.B.ZZ

설마 주인공은 벌써부터 시한부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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