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밤

샨은 카니를 기다리던 도중, 자신에게 호의적인 마을 아이들을 만났다. 아이들과 놀아주다 보니 카니와는 길이 엇갈려버렸다.

카니가 이미 나와 자신을 찾아다닌다는 것도 모르고 놀다가 시간이 너무 지났다는 것을 깨닫고 지금에서야 돌아왔다.


"으앙~! 걱정했잖아!!"
"으아앙~! 미안해, 카니. 나 때문에!!"
"다음부터는 이야기라도 하고 가라."


레바는 서로 부둥켜안고 우는 카니와 샨을 보고서 한숨을 쉬었다. 샨에게 아무 일도 없었다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딘가 석연치 않다.

그는 시체가 놓여있는 골목길을 바라보았다. 그 참혹한 현장을 치우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아 일단 지나다닐 수 없도록 대충 천과 나무로 막아놓고 카니를 데려왔다.


'대체 누가 저런 짓을.'


잔혹한 살해와 강한 힘. 그런 자가 마을에 있다면 문제가 심각하다. 자신이나 아를리의 힘으로는 막을 수 있겠지만, 만약 다른 마을 사람들을 공격한다면.


'대충 둘러봐야겠다.'
"레바!"


골목길로 걸음을 옮기던 레바의 손을 샨이 잡아 끌어당겼다.


"샨, 나 잠깐 저기를..."
"카니가 열이 많이 나!"
"카니?"


카니는 그동안 긴장했던 것이 풀렸는지 샨의 한쪽 어깨에 쓰러지다시피 기대어 있었다. 몸을 오들오들 떨며 거친 숨을 몰아쉬는 카니의 얼굴이 많이 안 좋아 보였다.
현장은 도망가지 않는다.

카니와 샨을 집으로 데려다주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카니, 이리 와. 샨, 너는 업혀"


레바는 카니를 두 팔로 안아 들고 샨에게 말했다. 샨은 그 말을 따라 등 뒤로 가 레바의 목에 두 팔을 둘렀다.


"꽉 잡아."


가볍게 뛰어올라 바로 건물 지붕으로 뛰어오른 레바는 방향을 확인하고 다시 뛰어올랐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아까 샨의 눈이 좀 이상했던 것 같은데.'


한순간이었지만 레바는 보았다. 샨의 눈이 푸른색으로 빛난 것을. 잠깐이었지만 그녀의 눈은 온몸이 오싹해질 정도로 불길한 빛을 내는 푸른색으로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5. 밤




카니를 눕힌 레바는 샨에게 도저히 음식을 맡길 수는 없었기에 그녀에게는 카니의 간호를 맡기고 내려와 부엌에서 죽을 끓일 준비를 했다. 조금 불안했지만, 방에서 나오기 전 확인한 샨의 눈은 이슬을 머금은 나뭇잎과 닮은 녹색이었다.


"추워서 그랬나?"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는 타지 않도록 냄비 안의 죽을 잘 저었다. 그는 검게 그을린 천장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수프를 데우려다 집에 불을 낼 뻔한 그 샨이 그럴 리가 없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는 어쩐지 그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처음 봤을 때의 미소도, 그 차가운 푸른 눈도 어디선가 본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분명 아주 옛날 어딘가에서...


"윽!"


갑작스러운 통증에 레바는 가슴을 부여잡고 몸을 비틀거리다 바닥에 쓰러졌다. 심장 쪽부터 온몸으로 퍼지는 강렬한 통증. 심한 고통에 레바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잠시 후, 레바는 숨을 몰아쉬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죽는 줄 알았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레바는 옷에 묻은 먼지를 조심스럽게 털고서 자신의 왼손을 바라보았다. 그의 왼손에, 여러 개의 검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것은 일렁이는 불꽃같기도, 넝쿨 식물같이 보이기도 했다.


"여기까지 왔나."


그는 한숨을 쉬고 잠시 왼손을 바라보다 주머니에 넣었다. 어쩐지 씁쓸한 얼굴로 그는 식탁에 기대어 무언가를 생각했다.


"아."


죽이 타는 냄새를 맡기 전까지는.


결국, 죽은 다시 만들어야 했다. 이미 간을 해버려 새로 한 죽에 섞으면 맛이 이상해지기에 탄 냄새가 살짝 나는 그 죽은 결국 레바가 먹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고 말하는 샨에게 그는 솔직히 말하지 못했다.


"기껏 해왔더니 자네."
"레바 기다리다가 잔 거야."


레바는 조용히 그릇 위에 뚜껑을 덮고 숟가락과 함께 침대 옆 수납장에 치워놓았다. 카니는 고른 숨을 내쉬며 편안한 얼굴로 자고 있었다.


"전에도 이런 적 있었는데."
"전에도?"
"어. 내가 없어진 줄 알고."


그 날은 어린 카니가 온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부모를 잃고 불안해하는 카니를 돌보던 레바는 사냥꾼 중 한 명이 다치는 바람에 그 대신 사냥을 하러 갔다.

아직 말을 배우지 못한 카니는 레바가 사라진 것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고, 아를리가 리카를 씻기는 사이 집 밖을 뛰쳐나갔다.

오늘보다도 더 추웠던 겨울, 정신없이 마을을 뛰어다니던 카니는 결국 숲까지 들어와 마을로 돌아가던 레바와 마주쳤고 그대로 쓰러져 며칠을 앓았다.

나중에 물어보니 카니는 의지하던 누군가가 사라진 것이 너무나도 무서웠다고 했다.

카니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던 그 날, 자고 일어나보니 부모님은 없었고 부모님을 기다리던 카니는 곧 들이닥친 순혈들에게 끌려가 부모의 시체를 보고서 죽음의 땅으로 추방되었다.

아를리가 데려온 카니를 돌봐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카니가 너무나도 약해서 곧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카니를 레바가 돌보겠다고 말했다.

아무도 그녀를 원하지 않으면 아를리가 카니를 돌봤을 것이다. 어차피 아를리와는 같이 살고 있고, 리카도 같이 돌보고 있으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같은 결과다. 하지만 그건 왠지 카니가 버려진 채로 남는 것 같아 싫었다.


"한 3살쯤이었나. 그때 내가 없어진 줄 알고 찾으러 뛰어다녔지. 그땐 아빠라고 불렀는데."
"레바는 대체 몇 살이야?"
"난 리카하고 카니가 태어나기 전부터 성인이었어."


수명은 종족마다 차이가 크다. 100년을 사는 종족도 있고 1000년을 사는 종족도 있다. 혼혈은 기본적으로 300살을 넘게 사는데, 그만큼 늙어가는 속도가 달라 카니는 52세, 리카도 65세지만 그 정도는 이제 막 성인이 된 어린애다.

레바는 그 둘과 비슷한 나잇대로 보이지만 두 배는 넘는 나이일 것이다.


"여기 온 지 70년은 넘었는데 그때랑 똑같은 걸 보면 아마 난 카니가 죽고 나서도 한참은 더 살 거야."
"그건 좀 쓸쓸하네."


창문 틈새로 찬 바람이 들어왔다. 이미 해가 지고 창문에는 달빛이 비치고 있었다.


"그러네."


얼마 후, 레바와 샨은 돌아온 리카와 늦은 저녁 식사를 하고 잠이 들었다.

레바의 방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감각이 예민한 레바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져있을 정도로 조용했다. 방으로 들어온 그림자는 침대 옆으로 다가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차가운 푸른 눈이, 레바를 내려다본다.

0
이번 화 신고 2017-01-01 19:53 | 조회 : 1,238 목록
작가의 말
B.B.ZZ

저는 파랑색이 좋습니다

후원할캐시
12시간 내 캐시 : 5,135
이미지 첨부

비밀메시지 : 작가님만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익명후원 : 독자와 작가에게 아이디를 노출 하지 않습니다.

※후원수수료는 현재 0%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