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_ 과거(1)

태호의 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아프고 아릴, 어쩌면 말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아플 이야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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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첫번째 준은 피해자와 경찰로 만났어"

누군가의 신고를 받고 사건현장으로 향했다. 거기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너와 막 강간하려는 피의자를 발견했었다. 강간범은 현행범으로 체포되어 경찰서로 향했고, 너는 병원에서 진술을 받기로 했다. 그게 너와 나의 첫만남이었다.

"여어, 한 형사! 우리는 지금 딴 사건이 들어와서 말이야... 피해자 진술 네게 좀 부탁한다!"
"예엣? 제가요?"
"아이씨, 그게...우리가 피해자를 보기엔 너무 험악하지 않냐?"
"아 그렇긴 하군요"
"뭐야?"
"본인 입으로 그렇게 말하셨으면서..전 갑니다"

병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축 늘어졌다.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까 고민하면서 이런저런 메뉴얼을 들여다보며 면회시간에 대기했다. 처음 너의 병실로 향했을때에는 긴장감이 가득해 손에 땀이 축축하게 배일 정도였다.
"백 준씨?"
나의 부름에 준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순간 공기가 멈춘듯 했다. 하얀 머리칼과 동글동글한 선한 눈매가 이목을 끌었다. 아름답다라는 말로는 부족하도록, 너는 마치 딴세계 사람 마냥 나를 흔들었다.
"형사님? 왜 그렇게 보시는지.."
"아, 하하 안녕하세요. 한태호 입니다. 말씀 편하게 해주시면 됩니다"
이런저런 질문이 오갔다. 너는 내가 질문하는 내내 누군가를 기다린다는듯 자꾸 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준 씨, 누구 기다리세요?"
"와야 될 사람이 오질 않아서요..."
"백 운씨요?"
"어떻게..."
"오해하지 마십쇼, 그분 지금 서에 계십니다. 합의는 절대 안된다 단언하시기에 지금 서에서 이후 처벌에 대해 논의중이십니다"
"그렇군요.."
시무룩한 너의 얼굴이 귀여웠다. 너는 내가 조금 편해졌는지 다음에도 놀러오세요 라는 말을 덧붙이며 첫번째 진술을 끝냈다. 그 뒤로도 나는 매일 너에게 찾아갔다. 경찰 한 형사가 아닌 한태호로써. 우리는 점점 친해졌고 한가로이 병원에서 노는동안 준의 퇴원일자가 가까워졌다.

"퇴원이다!"
"그렇게 좋아요?"
"얼른 가자, 집이 어디랬지?"
너의 집까지 데려다 주고 발길을 돌리려던 찰나, 우물쭈물 할 말이 있다는 듯 머뭇거리던 니가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우리집에 놀러오지 않을래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인채 너는 나에게 초대를 건넸다. 그 초대에 나는 말문이 막혀 벙쩌 있을뿐이었다.
"아, 아니... 친구로써...초대해주고 싶었어요"
멋쩍게 웃는 너에게서 사랑스러움이 풍겨져 왔다. 그때 나는, 지독한 사랑의 시작을 느꼈다. 너의 사랑스러움이, 너의 웃음이 나에게는 다 행복이었다.
"고마워, 초대해주어서"
환하게 웃음으로써 그의 초대에 응했다. 짝사랑의 시작이었다. 그 뒤로도 나는 너의 집에 드나들며 친분을 쌓았다. 아니, 나 혼자만의 사랑을 쌓았다. 사랑의 벽은 높고도 가팔라서, 한번 놓치면 영영 멀어져버린다. 나는 그렇게 네게서 마음을 숨긴채 너와 더 가까워졌다.

2달뒤-
여느때와 다름 없는 날이었다. 곧 방학시즌이라며 분주한 몇몇 형사들 사이에 끼여 이리저리 치인 날이었다. 그날따라 간절한 술 생각에 맥주를 챙겨들고 준의 집으로 향했다. 준은 환한 웃음으로 나를 반겼다. 나는 자연스럽게 자리를 펴고 앉아 한잔, 두잔 술잔을 기울였다. 한 잔이 한병이 되고, 한병이 세병이 된 건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알딸딸해진 기분에 나는, 숨겨뒀던 내 진심을 꺼내보였다.
"준..."
"응?"
"나 너를 좋아해, 아니 사랑해"
조심스러운 내 말에 너는 눈물을 지었다. 그러고는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를때, 너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웃음을 지으면서 나를 타박했다.
"바보야, 왜 이제 말해...기다렸잖아"
"미안하고 사랑해, 준."
"나도, 나도... 사랑해, 태호 형"
그렇게 6월의 어느 날, 우리는 술에 진탕 취한 채 연인이 되었다.

6개월 뒤-
"다녀왔습니다!"
"오늘 늦었네?"
"잠복 걸릴 뻔 했어"
"풋, 잘했어요 남편"
우리는 동거를 시작했다. 그 나날들은 행복했다. 일을 마치고 오면 늘 준이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했다. 박봉에다가 얼굴보기 힘들었다.
"늘 미안해, 여보"
"피, 미안한거 알아서 다행이네. 그나저나 내일모레가 무슨 날이게?"
"알고 있지, 우리 여보 그날이잖아!"
"이이...그날이 아니고 발정기라고!"
"그게 그거지! 쨋든 피나오고 다 하잖.."
"아니야, 바보야."
"우리여보 얼굴 빨개졌다, 귀여워"
"오글거려, 하지마"

행복했다. 더이상 행복을 바란다는 것은 욕심일 만큼. 그리고 그 행복끝에는 불행이 따라온다는것을 나는, 그때의 나는 몰랐다. 준이 발정기였기에 이틀 휴가를 냈다.
"흐읏, 이제 그만...벌써 3판째야"
"피, 봐줬다."
준을 씻기고 침대에 눕혔다. 나는 침대에 몸을 뉘인 뒤에야 내일이 가인의 기일이라는걸 기억해냈다.
"저기, 준"
"음? 아, 잠깐 한판 더는 사양이야!"
"아니, 그런게 아니고.. 저번에 가인이 누구냐고 물어봤잖아"
"아, 그거? 됐어, 이젠. "
"아니, 얘기해주고싶어서 그래. 과거의 나를"
"흐음? 그래 뭐, 해봐"
"가인과 나는 8년지기였어. 고딩때 만났으니까. 같이 경찰이란 꿈을 꾸는 친구로써 점점 연인으로 발전했지. 경찰대 졸업하고 같은서에 배치받으면서, 우리는 점점 깊어졌어. 2년전, 한양시 연쇄살인사건을 맡았던 우리는 그냥 잠복만 했었어. 애초에 그 산에 피의자가 없다고 판단했기에 신입 둘을 붙인거겠지. 근데, 그건 오산이었어. 피의자를 발견하자마자 나는 무전을 치고 가인은 쫓아갔어. 곧바로 따라잡은 나는 가인과 나란히 달리다가, 탕- 하는 총소리가 들렸어. 지원군이 왔나보다 싶었는데..."
거기까지 말한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준에게 이런 얘기를 해주는 자체가 미안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사이에 비밀따위 있으면 안된다고 믿었기에.
"옆에서 달리던 가인이 쓰러졌어. 붉은 피가 낭자한 바닥을 보며 절망했어"
"왜... 나한테해주는거야?"
"우리 사이에 비밀 만들기 싫어서. 내 아픔 따위는 니가 다 없애줬어. 가인도 가슴에 묻었고 무엇보다 지금 내세상의 중심은 너인걸"
"아, 오글거려!!"
"어쩔거야 니 여본데. 근데. 내일이 가인 기일이야. 용서해줄거지?"
"지금 현애인한테 당당하게 전 애인에게 간다고 선포하는거지?"
"아냐아냐, 가인은 그냥 8년지기 친구였을 뿐이야"
"나도 데려가"
준이 칭얼거리길래 난 웃었어.
"일단은 허락"
"일단은?"
"오늘 허리 아작내면 내일 걷지도 못하지 않을까 싶어서. 각오하는게 좋아요, 여보님?"
"우리 각방써"
"에에? 싫어!"
"그럼 데려가줘"
내가 졌다, 하며 웃었다. 그래,그때까진 몰랐다. 가인을 잃었던 그날에 너마저 잃을 줄은. 너마저, 나를 떠날줄은. 그리고 너의 빈자리는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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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1-18 15:25 | 조회 : 2,053 목록
작가의 말
월하 :달빛 아래

으으, 이런 폭스툰,,, 임시 저장좀 만들어줬음 좋겠네요 -3- 어제 올리려다가 다 날아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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