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_ 운명

띠리링-
어두컴컴한 산의 아침, 요란한 벨소리가 울렸다. 준의 집 무선전화기였다. 부스스한 모습으로 잠이 깬 태호는 한결 편안해진 모습으로 준을 내려다 보다가 웃었다.

"힘들었나보네"

색색거리며 잘 자는 준의 모습에 이마에 버드키스를 남기고는 전화를 받으러 갔다.

"여보세요"
"곧, 기억의 봉인이 풀린다"
"누구세요?"
"나야, 운"

백 운, 그였다. 준의 형이라던 사람이 나를 도대체 어떻게 아는 것인가. 깊은 고민에 빠질 새도 없이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었다.

"5"
"아, 잠깐만요!!"
"4"
"날 어떻게 아는 거죠?!!"
"3"
"아이씨, 뭐야"
"2"
"그냥, 또라인가"
"1"
"아무 일도 없는데?"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갑자기 머리가 조일 듯이 아팠다. 관자놀이를 양 쪽에서 누르는 기분.. 끔찍한 고통과 함께 서서히 기억이 돌아왔다. 깨질 듯한 아픔에 신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끝났나"
"....운이 형"
"기억 다 났나보군."
"도대체... 왜..."
"미안, 그날 내가 좀 늦어서 말리지 못했어"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내가 무엇 때문에... 기억을 봉인했는데...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태호, 진정해. 아직 날짜 안 지났어"
"그러니까, 왜 하필 오늘이야... 하필.."
"후..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 과거의 준과 몸을 섞게되거나 사랑하게 되면 봉인이 풀린다고"
"왜 말리지 못한거야, 왜!!!"

내내 담담했던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주륵-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왜 하필 오늘이야. 나 드디어, 준을 사랑하게 되었는데. 아아- 준 우리가 하루만 늦게 만났더라면, 애초에 내가 긴급에 나가지 말껄. 우리는 아직 만나면 안되는 인연인데. 후회해도 늦었지만-

"말렸어. 그날 하루만은 나가지 말라고. 그런데 알다시피 교도소에 있는 몸이라 전화로밖에 안했어. 그러고도 불안해서 탈옥 했더니, 씨X 이미 끝난 뒤더라고. 그래서 족쳤더니 죽어버리더라."
"하아, 그래 지금 이게 중요한게 아니지. 오늘 며칠이야."
"....12월 27일. 내일이다"
"미쳤어!!! 적어도 일주일 전에는 봉인을 풀어줬어야지!!"
"기억 봉인한 건 너잖아, 바보야. 니가 나도 다 잊었으면서."
"아, 씨X..."
"욕 작작해라, 진정하고. 일단 내일 하루만이라도 밖에 나가지마."
"어차피 못 나가. 비가 진창 와서"
"..오늘 그친댔어."
"형, 나 진짜 모르겠다. 이번이 벌써 2번째야. 이번에도 실패하면 꼼짝없이 준 없이 살아야해,나"
"열심히 대책 강구해봐"
"범인은 찾았어, 누군지?"
"알 수가 있나, 난 교도소에 있는 몸인데"
"아이씨, 그러게 누가 교도소 들어가래?"
"니가 쳐 집어넣었거든"
"아, 맞다. 교도소는 살만하고?"
"아오, 내가 나가기만 해봐 죽여버린다 진짜"
"끊을게, 준이 깼어"
"그래"

뚝 끊긴 전화기 앞에서 태호는 애써 삼켰던 울음을 뱉어내었다. 두 번의 준의 죽음이 아직도 생생했다. 가인의 죽음도 기억났다. 내 주변 사람들만 떠나갔다는 그 슬픔과 무력감이 태호를 덮쳤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내일이면 다시 '그 날'이 시작된다. 나는 이제 뭘 해야 할까. 널 지키려 내 기억까지 봉인했다. 네가 날 만나지 않으면 네가 살거라고, 그렇게 믿었는데. 우리는 또 다시 만나고 말았다.

"으흑....흑..."
"으음, 태호 형- 어딨어요?"

잠에서 깬 준이 태호를 찾았다. 태호는 전화기 밑에 쪼그려 앉아 울고 있었다. 그토록 강해 보이던 이가 쪼그려 울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처량해 보였다.

"왜, 우시는 거예요?"

태호에게 다가가 태호를 일으킨 준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태호는 그저 준은 안고 눈물만 흘려낼 뿐이었다. 태호는 한참을 그렇게 준을 부여잡고 울었다. 이윽고 서로를 뗀 태호는 화장실로 가서 씻고 나왔다. 그리고는 마지막 만찬을 준비하듯 준의 손을 잡고 부엌으로 향했다.

"형, 뭐해요?"
"저녁 준비"
"에에-? 점심 아니고?"
"점심에는 간단히 먹자, 라면 어때?"
"라면 좋죠!"

싱글벙글 웃고 있는 준의 얼굴에 또 한번 울 뻔 했다. 태호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는 라면을 끓여 냈다.

"헤헤, 이러니까 우리 첫날 생각난다, 그죠?"
"그러게"

그리 많은 날이 지나지 않았는데, 한달이라도 지낸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에-, 어째 자꾸 대답이 짧아요, 형?"
"아직, 안 익숙해서"
"뭐, 차차 적응하면 되니까요"

니가 살아있고 나랑 대화한다는 게 아직도 안 믿겨서. 내 앞에서 웃고 있는 니가 또 꿈인 것만 같아서. 슬며시 시선을 피한 태호는 말없이 라면만 먹다가 식탁을 치웠다. 준은 그렇게 치우는 태호를 졸졸 따라다녔다.

"준"
"네, 형!"
"준 너는 내가 죽으면 어떡할거야?"

내내 말이 없다가 처음 한 질문이 저거라니, 준은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말했다.

"하루종일 울다가 따라 죽을 것 같은데요?"

그렇게 말하는 준의 말에는 웃음기가 섞여있다. 설거지를 하는 태호 뒤로 준이 백허그를 해왔다. 태호는 낮게 웃면서 말했다.

"따라 죽지는 말고, 새로운 사람 찾아야지"
"쳇, 그러는 형은요?"
"나는, 또 다시 시간을 건너 너를 찾으러 오겠지"
"또 다시요...?"

마침 설거지를 끝낸 태호는 준을 안고는 침실로 향했다.

"준, 나 어떡하지?"
"우음? 왜요?"
"준한테 너무 깊이 빠져 버렸어"
"좋은거네요, 뭘"
"첫번째 준도, 두번째 준도, 그리고 다신 만날 일 없다고 생각했던 준까지. 세번이나 빠져 버렸다고, 나"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러니까, 이 정도면 우리 운명이지 않냐, 이 빌어먹을 하늘아."

낮게 태호는 쓰게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준은 여전히 무슨 소리인지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너를 위해, 두번의 시간여행을 했다. 3번의 너를 만나기 위해 나는 내 능력과 행복을 신에게 바쳐 여기서 너를 만났다. 기억을 봉인했는데도 너를 만나 사랑에 빠진거면, 이정도면, 우리는 운명이지 안 그래? 그것도 하늘이 깊게 맺어준"
"설마, 묘족의 능력을 이용하신 거예요?"
"너의 아버지가, 너의 형이 그리고 내가, 이 세 사람의 염원이 모여 두 번의 기적이 탄생했다."

조곤조곤, 태호의 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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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1-16 15:22 | 조회 : 2,075 목록
작가의 말
월하 :달빛 아래

저는 수 괴롭히기 보다는 공 괴롭히기에 소질이 있는 듯...(삐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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