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증 (1)

집에 돌아오니 거의 9시였다. 왜 중간에 주먹밥 만들어줬는지 알겠다. 확실히 배고프긴 하다. 난 몸을 별로 움직인 것도 없는데.

“왠지 내일 근육통이 일어날지도.”

반 농담, 반 진담의 혼잣말을 하고는 냉장고의 문을 열었다. 좀 늦은 시간이니까 간단하게 먹고 내일 도시락은 미리 만들어두고 자는 게 좋을 것 같다. 이런 거 처음이니까 지쳐서 늦잠 잘지도 모르니까.

조금 마신 뒤에 3일은 방치해 둔 포카리의 뚜껑을 열어 입으로 가져갔다. 목이 말랐다. 500 밀리리터의 병은 순식간에 동이 났다. 전에 마시기 했으니까 400 밀리리터일지도. 딱히 중요한 건 아니지만.

냉장고에 문을 열어보니 거의 텅 비어있었다. 이 세상에 정말 슬픈 것은 그 어떤 것도 아닌 텅 빈 냉장고일 것이다. 아무래도 내일은 돌아오는 길에 장을 봐둬야겠다. 저녁은 어쩔 수 없지만 컵라면으로 때우도록 하자. 저녁은 그렇다 치고 문제는 도시락 반찬이다.

그나마 있는 건 달걀 여섯 개와 잼과 마가린, 당근 쓰다 남은 거, 파 반 뿌리, 어제 데친 브로콜리, 우유 마시고 남은 것 정도다. 일단 잼과 마가린은 도시락 반찬으로는 쓰기 어려우니 제외해 둬야겠지.

이번에는 냉동실을 열어보았다. 국물용으로 쓰는 다시마와 멸치, 건새우와 꽉꽉 채워놓은 얼음통이 보였다.

인스턴트 냉동식품같은 건 전혀 없었다. 좋아하지 않으니 많이 사두지 않기도 하지만 이렇게 비어있었다니, 조금 난감해진다. 귀찮을 때 용이하건만 나는 어째 생각만 해두고 사지를 않는다.
그러다, 어? 새우가 든 비닐봉지 뒤에 연어 토막을 발견했다. 딱 하나. 하지만 제법 큰 사이즈. 다행이다. 이걸로 아슬아슬하게 남아 도시락 반찬을 할 재료가 모였다.

귀여움 따위는 조금도 없는 딱 실용성만을 중시한 앞치마를 두르고 달걀을 깨 젓가락으로 휘저었다. 남아 있던 당근과 파를 잘게 썰어 섞어서 살짝만 간을 한 후, 프라이팬에 얇게 부쳤다.

흔히 말하는 달걀말이라는 반찬을 조리하는 중이라는 거다. 다만 내 취향대로 심심하게 간을 해서 달걀과 달걀 사이에 슬라이스 치즈를 넣었다. 이렇게 하면 간도 딱 맞고 조금 서양풍의 반찬이 된다.
가끔 마요네즈를 한 숟가락 섞어도 부드럽고 촉촉한 맛이 나서 좋다.

다음은 전자레인지로 살짝 해동한 연어 토막을 구웠다. 여기에 마트에서 흔히 파는 쯔유양념을 곁들일 생각이다. 그리고 아침에 밥과 데친 브로콜리만 넣어주면 도시락 완. 성.

이 정도면 충분히 영양소도 섭취할 수 있을 거다. 즐거운 마음으로 설거지까지 끝내고 나니 놀랍게도 밤 11시였다. 어깨까지 푹 몸을 담그고 뜨거운 물로 피로를 풀고 싶지만 아무래도 샤워만 하고 자야할 것 같다. 응. 어쩔 수 없네.

*

“카미야.”
“네?”
“같이 밥 먹자.”
“에? 어, 응.”

제대로 되지 않은 어정쩡한 내 대답에도 스가와라군은 웃으면서 내 책상 위에 도시락통을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주장군, 아니, 사와무라군도 같이 불러서 멋대로 내 앞자리에 있는 책상을 옮겨 상을 만들었다.

‘으, 얘들이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보내와. 아니, 실제로 들리고 있고.’

그것도 그거지만 언제부터 나 스가와라군에게 호칭이 생략되어 불리게 된 걸까. 좀처럼 없는 일이라서 왠지 신경이 쓰인다. 그리고 누군가랑 밥 먹는 일이 (어제 후배들과 같이 먹기는 했지만) 익숙하지 않아서 조금 어색하기도 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카미야, 어디 불편한데라도 있어?”
“네?”
“아까부터 말도 없고 젓가락도 멈춰 있어서-.”
“아….”
“불편한 점이라도 있으면 말해줘. 아니면 혹시 갑자기 밥 먹자고 한 건 싫었어? 조금 친숙해져 볼까-? 하고 해본 거긴 한데.”

사실대로 말해도 되려나? 기분 나빠 하지는 않을까? 싫은 건 아니지만 내 생각이 말로 해도 제대로 전달될지 걱정된다. 아직 두 사람 다 별다른 마음의 소리는 내지 않고 있다. 스가와라군은 단순히 정말로 나를 걱정하는 중이고 사와무라군은 지금 머릿속으로 오늘 연습 메뉴를 짜는 것에 여념이 없는 상태고.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가 식사시간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아. 나는 최대한 편하게 웃으려고 얼굴근육에 힘을 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아무 일도 없어요.”
“그, 래?”
“네.”

「아무래도 어딘가 안 좋아 보이는데-.」
「오늘은 리시브부터….」

아직도 걱정하고 있다. 뭔가 다른 것에 집중하게 하면 걱정하지 않으려나? 하지만 무슨 대화 주제를 꺼내면 좋을지 지금까지 자타공인 아웃사이더였던 내가 알 리가 없었다. 아, 눈물 나는 청춘이여.

마음속으로 눈물을 삼키고 있는 그 때, 오른쪽 허벅지가 욱신거렸다. 그리고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뭐지? 이거, 뭐야?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봐도 아픔이 가라앉지 않는다. 이건 아마도 이름이 새겨진 자리에서 나오는 통증일 것이다.

하지만 왜? 나 아직 그 사람이랑 닿지도 않았는데? 이름이랑 얼굴 말고는 아는 것도 없는데 왜?

왼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이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한다. 반에 아이들의 시선이 피부에 꽂히는 것 같았다. 싫어, 하지 마. 나를. 보지 말아줘.

“카미야!”
“카미야!!”

스가와라군과 사와무라군이 내 이름을 부르는 게 들린다. 너무 크게 들려 고막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시야가 기울어진다. 등을 받쳐주는 큰 손이 있어서 볼썽사납게 넘어지는 것은 면했다. 하지만 닿은 부분이 또 타들어가는 것처럼 아팠다.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등이랑 허벅지가 아파. 그만 놔줘.

아프고 뜨겁고 어지럽다. 발버둥이라도 치고 싶은데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눈앞이 뱅글뱅글 돌고 있다. 회색과 흰색과 검은색이 돌면서 섞인다.

“카미야!”

그리고 완전히 새까매졌다. 암전이었다.

*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낯선 천장이었다. 지나치게 하얀 분위기와 소독약 냄새로 나는 이 곳이 병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동시에 안심했다.

눈동자만을 굴려서 본 창문은 붉은 색이었다. 아마도 해질녘시간.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금 서글펐지만 아무도 없어서 안심되었다. 자고 일어난 무방비한 얼굴을 남에게 보여주는 건 창피하니까.
이미 쓰러지는 모습을 대부분의 클래스메이트들에게 보여줬으니 의미 없는 생각일 수도 있지만.

“아, 일어나셨어요?”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 순백의 옷. 웃는 얼굴. 딱 봐도 친절해 보이는 간호사가 나에게 다가왔다. 목이 조금 따가웠지만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건가요?”

통증 때문에 기절해서 병원에 왔다는 걸 알겠지만 일단은 전형적이니까 이 질문을 했다.

“네임 버스, 시죠? 통증 때문에 기절하셨어요. 친구 분께서 환자분이 쓰러지자마자 119로 전화하셔서 바로 옮길 수 있었습니다.”

낮선 단어에 나는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친구요?”
“아, 아니면 혹시 애인분이셨나요? 아니면 혹시 메이트?”
“아뇨, 친구 맞아요.”

아, 친구라고 긍정해버렸다. 스가와라군은 분명 친구라고 대답해주겠지만 뭔가, 뭐랄까, 역시 어색해.

혼자서 끙끙거리는 나를 보고 간호사가 말했다.

“그럼 먼저 옷을 벗어주시겠어요?”
“에? 왜요?”
“일단 깨어나셨으니 검진을 간단히 해봐야죠. 사실 여기에 옮겨져 오셨을 때 전체적으로 확인은 했지만 그래도 환자분의 의식이 있을 때 하는 게 더 정확하니까요.”

그제야 나는 내가 교복이 아니라 환자복을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여자 분이 갈아입혔겠지만 엄청 부끄러워. 거기다 난 양말이 아니라 스타킹이었는데!

“옷 벗어주세요.”

나의 패닉 상태를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백의의 천사는 웃으면서 검사표를 꺼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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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6-10-18 14:57 | 조회 : 1,638 목록
작가의 말
nic SU

이제 슬슬 진도를 빼야할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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