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표

‘아, 최악이다.’

교문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름표가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집에 예비용이 있긴 하지만 최근 환경미화기간이기 때문에 복장검사가 중요한 때라 선도부에게 감점을 받아버리고 말았다.

작년 2학년 2학기 때부터 깨끗했던 내 기록부에 오점이 새겨지는 역사적인 순간이다. 묘하게 이런 것에 집착하는 나는 아침부터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또 신경 쓰이는 것이 두 가지.

이와쨩이라고 불렀던 나와 부딪힌 남자의 옆에 있던 단정한 인상의 미남. 분명 이름이 ‘오이카와’ 라고 했다. 그 사람이랑 집적 닿지도 않았고, 뒤에 이름이 뭔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 미남이 상대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일단은.

‘최대한 회피한다.’

우리 학교는 아니니까 학교 안에서 만날 일은 없다. 제로에 가깝다. 그렇다면 남은 건 등, 학교 때나 혹은 내가 휴일에 바깥에 나갔을 때 정도. 무슨 일이 있어도 최대한 들키기 전까지는 피하다가 도무지 안 되겠다고 판단 될 때는 다시 전학을 간다.

이와쨩이라는 사람도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일단 내 이상한 점을 바로 앞에서 본 건 그 사람이니까.

그런데 여기서도 한 가지 굉장히 신경 쓰이는 것이 있다.

아무래도 이름표를 떨어트린 때가 부딪혀 넘어졌을 때 같다는 거다.

‘설마 줍지는 않았겠지?’

더해서 주운 걸 돌려주려고 찾아 온다던가. 아,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평온한 (내가 평온한 학교생활이라는 걸 해본 적인 있기는 한가 싶지만) 내 학교생활이 와장창 무너질 요소이지 않는가. 절대 그것만은 피해줬으면 좋겠다.
제발 부탁이니까.

‘아, 제발-.’

“카미야?”

내 이름이 불렀다. 그것과 동시에 나는 최대한 딱딱하고 사무적인 태도로 상대에게 대답했다.

“뭔가요?”
“수학 프린트 거둬가야 해서. 내가 오늘 당번이라.”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아마도 수업 중에 혹은 수업이 다 끝나갈 때 선생님이 말했겠지. 보통은 그런 말 듣자마자 준비해 두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정신이 빠져서 이 모양이다.

「카미야양이 별일이네. 다리는 괜찮은가? 아침부터 보건실 다녀오는 것 같았고.」

이 사람이 제법 괜찮다. 같은 반인 스가와라 코시군. 별로 말 섞을 일이야 없지만 다른 사람보다는 몇 번 대화라는 걸 한 적이 있고, 나에 대해 적대적이지도 않고, 제법 솔직한 편이다. 내가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 중에 한 명. 나는 프린트를 건네면서 말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고마워요. 스가와라군.”

이렇게 말하면 내 다리를 걱정해줬다는 사실에 대해 고맙다고 말하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겠지. 제법 자연스러운 것 같다.

“별 말씀을요.”

스가와라군은 그렇게 대답하며 프린트를 마저 거두어 교무실로 가는 듯 했다. 이제 한숨 돌리려고 하는데 불쾌한 것이 들렸다. 불쾌한 관계로 자세한 표현은 하지 않겠다. 스가와라군은 상냥한 편이고 얼굴도 미형이라 그런지 아무래도 연심을 품고 있는 여학생들이 많은 것 같았다.

덕분에 그다지 친구라고 할 사람도 없고 분위기도 우중충한 나에게 가끔 신경을 써주면 이런 불쾌한 소리가 들리곤 한다. 이 정도는 뭐 참을 만 하니 그냥 넘기도록 하자.

*

여러 가지 의미로 좀 최악인 하루를 정리하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슬슬 냉장고의 내용물이 바닥나려고 하니 장을 보고 가는 게 좋겠다. 실내화에서 학교 규정 신발로 갈아 신고, 운동장을 반쯤 걸었을 때였다.

「와, 잘생겼다.」
「키 엄청 커.」
「다른 학교에서 여자친구라도 데리러 왔나?」
「말 걸어보고 싶다.」

“…….”

설마 아니겠지.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뭐 이딴 개 같은 경우가. 여기서 설마 날 붙잡고 뭐라 뭐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되면 난 당장 전학 갈 거야. 전학 가야한다고. 아침에 있었던 일이나 꼬치꼬치 캐묻는 건 아닐까.

긴장감에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어쩐지 한 발짝도 걸을 수가 없었다. 뒤에서 날 이상하게 보고 있다는 것도 아는데 도무지 앞으로든 옆으로든 갈 수가 없다. 그래서.

일단 뒤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아, 다행이다. 뒤로는 갈 수 있구나. 부탁이니 따라오지 말아주세요.

“오이카와 선배!”

뒤에서 엄청나게 우렁찬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는 게 좋지 않은데 나도 모르게 뒤로 돌아버리게 만든 씩씩한 목소리의 주인은 마찬가지로 키가 제법 큰 남학생이었다. 교문 앞에 선 두 사람과 아는 사이인지 뭔가 인사를 하는 것 같으면서도 살짝 다투는 것 같기도 했다.

다행이다. 나 때문에 온 게 아니구나. 이 얼마나 바보 같은 과대망상인가. 하도 당한 일이 많다고는 하지만 피해의식이 심해진 모양이다. 나는 스스로에 대해 반성하기로 하며 다시 뒤로 돌아 운동장 쪽으로 걸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큰 목소리의 남학생과 함께 걸어오는 두 사람과 제법 떨어진 위치였는데 눈이 마주쳤다. 아뿔싸. 시선을 밑으로 하는 걸 잊어버렸다.

눈이 마주치자 오이카와라는 사람이 씩 웃으면서 손에 든 뭔가를 흔들었다. 손에 들려서 저녁놀에 반짝이는 그것은 다름 아니라 내 명찰이었다. 등 뒤로 오스스, 소름이 지나갔다. 오이카와는 내 얼굴을 보고 이번에는 손으로 어떤 방향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손으로 가리킨 방향으로 다른 두 명과 함께 걸어가 버렸다.

「이러면 알아듣겠지-?」

나에게 말하는 건 아니고 자문자답의 뉘앙스였다. 아침에 있던 일이 크게 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가 아니잖아! 이미 크게 저질러 진 것 같은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무시라고 집으로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 진짜 말아먹은 하루인데 하루가 끝나지 않아.

나는 다시 뒤로 돌아 학교 안으로 들어가 실내화로 갈아 신고 학교 내의 건물로 이동해 아까 전 가리킨 방향에 위치한 제 2 체육관으로 걸어갔다. 체육수업이 아니고서야 좀처럼 올 일이 없는 장소다. 거기다 이 시간이면 보통 운동부가 활동하는 시간 아닌가?

문을 작게 두드려 보았지만 안이 워낙 소란스러워서 그런지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아, 진짜 싫은데. 최대한 표정을 딱딱하게 하자.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체육관의 문을 열었다.

“…….”
“…….”

문을 열자마자 그렇게 시끄럽던 체육관 안이 싹 조용해졌다. 왜 갑자기?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한다. 완전 달아나고 싶었다.

“카미야?”
“네?”
“여긴 무슨 일이야?”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도 스가와라군이 천사로 보였다. 아, 스가와라군 배구부구나. 전혀 몰랐어. 하지만 진짜 고마워.

“그, 저 사람이 불러서-.”

라고 말하면서 나는 최대한 살짝 손가락으로 오이카와를 가리켰다. 그러자 오이카와 생글생글 웃으면서 걸어왔다. 가까이 오지 마!

“응. 맞아. 내가 불렀어.”
“무슨 용건으로? 그것보다 카미야랑 오이카와군 아는 사이?”

순간 스가와라군의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스쳐지나가는 것 같아 보인 건 내 착각이겠지.

“아니요. 오늘 처음 본 사이랍니다. 그런데 아침에 이 꼬마 아가씨가 바보같이 트럭이랑 부딪힐 뻔한 이와쨩을 구해줬거든. 구해주는 과정에 이걸 떨어트려서 돌려주러 온 것 뿐.”
“에?! 오이카와상 그럼 저에게 토스를 보여주시겠다고 한 건!”“당연히 거짓말이지, 토비오쨩은 바보야?”
“그럴 수가!”

목소리가 큰 남학생이 단번에 무너졌다. 거기다 오이카와는 이와쨩에게 왠지 얻어맞고 있었다. 이제는 스가와라군까지 가까이 오고 있다. 주변이 점점 더 어수선해진다. 싫어.

“카미야, 지금 저 말이 사실이야?”
“어? 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남학생이 묻기에 일단 대답했다. 그런데 누구더라? 이렇게 크면 눈에 띨 법도 한데 어쩐지 전혀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혹시 다리의 상처도 그것 때문에 생긴 거야?”
“아니, 이건 내가 넘어진 거니까, 요….”

별로 구하겠다는 생각으로 한 행동도 아니었고 어쩌다보니 내 뒤에 있었던 것뿐이고 넘어진 것도 내 운동신경이 나빠서다. 그러니까 이건 거짓말은 아니다.

“오이카와씨가 보기에는 영웅처럼 날아서 이와쨩을 구해준 것 같았는데? 그리고 그 때에 입은 영광의 상처지!”
“여자애한테 영광의 상처가 어딨냐?! 이 바보카와!”
“바보카와라니 너무 하잖아!”
“바보니까 그렇지!”

진짜 바보들끼리 하는 대화 같았다. 아니 애들 같아. 누가 누구더러 꼬마 아가씨라고 하는 걸까.

“그러니까! 자.”
“?”
“잃어버렸던 이름표랑 이건 감사의 표시로 이와쨩이랑 같이 산거야. 입에 맞으면 좋겠다.”

대중적인 메이커의 민트맛 초콜릿. 아, 이건.

“좋아하는 거에요. 잘…먹겠습니다.”
“좋아하다니 다행이고, 이와쨩을 구해줘서 고마워.”
“…아뇨.”

다시 조용해지려고 한다. 어색해. 거기다 뭐야 이 핑크빛 분위기가 슬쩍 나오려고 하는 상황은! 뭔가라도 말해서 분위기를 바꿔야 하나. 하지만 그런 거 잘 못하는데.

“그리고.”
“?”
“꼬마 아가씨는 자제해주세요, 전 고등학교 3학년이고, 이미 생일도 지났고, 그러니까….”

뭐래는 거야, 나는!

“제 이름은 카미야 토오루 ‘神谷 透’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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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6-09-28 15:04 | 조회 : 1,377 목록
작가의 말
nic SU

에브리타운 계정 날려먹었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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