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악惡입니다


-왕녀를 죽일거야. 레지스탕스에 들어오지 않을래, 알렌?

제르메인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헤집는다. 으..요즘 얼굴 보기 힘들었던 이유가 있었구나. 왕녀를 죽이기 위한...

제르메인과 자주 못 만난 건 오히려 다행이었다. 내겐, 제르메인에게 반드시 숨겨야만 하는 잘못이 있으니까.

그나저나, 이제 어떡해야 할까.. 레지스탕스를 멈출 수도, 왕궁을 대비시킬 수도 없다. 레지스탕스에는 제르메인이, 왕궁에는 릴리안느가 있는데..

갑자기 초록 머리, 아름다운 얼굴이 떠올라 다시 멍해진다. 여전히 나는 똑같아.... 예전이나 지금이나, 어느 한쪽 편도 들지 못하고, 선택하지 못하고, 그러다가 결국 둘 다 무너져 내리는 것을 그저 보고만 있게 되는, 나는..


"알렌, 무슨 일로 이렇게 정원에 드러누워 있는 거야?"

왕궁이라는 새장에 갇힌, 왕녀라는 이름의 새가 내게 물었다. 기척도 눈치채지 못한 내가 바보같다. 예를 갖추기 위해 일어서려는 날, 릴리안느가 손을 내저어 말린다. 그리고 자기도 의자에 기대 앉는다.

"이렇게 의자도 있는데 말이지."

"하하하..그냥 하늘을 보고 싶었어요."

"하늘?"

그렇게 물으며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 보는, 그 모습이 너무 순진해서 입가에 웃음이 걸린다. 이 여리고 순진한 왕녀를 누가 악의 딸이라 부르던가. 저 갑갑해 보이는 왕실의 상징들만 없애면, 릴리안느는 그저 귀여운, 그리고 평범한 소녀가 될 것이였다.

"근데 하늘엔 아무것도 없는걸?"

왕녀는 입을 삐죽 내밀고 나를 쳐다본다.

"하지만..가만히 보고 있으면 구름도 지나가고, 새도 날아간답니다."

"알렌도 새처럼 날고 싶어?"

동문서답인가. 금발머리가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순진하게 생긋 웃으며 다시 하늘을 쳐다보는 왕녀. 그 두 눈에서 잠시, 자유를 갈망하는 열 네살짜리 소녀가 비쳤다.

"날다가 떨어질까봐 무서운데요. 전 지금이 좋아요."

그래, 괜찮아. 이렇게라도 널 지킨다는 것이, 널 지켜야 한다는 것이 날 버티게 해 주니까.

"왕녀님, 릴리안느 왕녀님! 어디 계십니까!"

멀리서 외침이 들려오자 릴리안느는 황급히 일어선다. 그 와중에도 살짝 웃으며 덧붙인다.

"좀 쉬다 와, 알겠지?"

대신 꼭 와야 해, 라고 중얼거리며 쭈뼛거린다. 으음. 내가 몇년동안 곁을 지켰는데도 아직도 둘만 있으면 날 대하기 힘들어하는 것 같아. 나는 일어나 웃으며 왕녀를 배웅했다.


그 뒷모습을, 멀어져가는 위태로운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문득, 갇힌 새를 풀어주고 싶었다. 한번도 날아 보지 못했을 저 드높은 푸른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다.

아마도 지금 신하들이 릴리안느를 찾는 건 반란군, 혹은 혁명군 때문일 것이다. 제르메인이 이끄는 레지스탕스는 벌써 루시페니아를 반쯤 뒤흔들고 있었다. 바다 건너 마론 왕국의 왕이 그 배후에서 도움을 준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었으니 왕궁에게 그 위협은 더욱 클 터.

누군가 날 지금 발견한다면 왕녀의 호위로써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고 꾸짖겠지.

괜찮아, 난 내 방식대로 널 지킬 거야.

정원의 분수대로 가만히 다가가 물에 비친 내 모습을 본다. 시선을 그곳에 고정한 채 꽁지머리를 풀어 보았다. 그런 대로 완벽하다. 요즘 들어 바빠 머리를 자르지 못한 게 이럴 때 쓸모가 있다니.

레지스탕스와 제르메인은 왕녀를 붙잡을 것이고 릴리안느는 무사히 도망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제르메인도, 릴리안느도 다치거나 죽지 않겠지.

그래, 새를 붙잡으려는 이들은 어쩄거나 성공할 것이였다..하지만 그들이 원하던 새는 이미 새장 안에 없을 거다. 그들이 붙잡은 새는 다른 새일 테니까.

다시 한 번 물에 비친 모습을 내려다본다. 저건 나야. 하지만 혁명군이 쳐들어오면 저 모습은 릴리안느다. 그들은 왕녀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어쩌면 설핏 마주친 사람이 한둘은 있을지도. 하지만 괜찮아, 나도 착각할 정도인걸.


쌍둥이니까, 우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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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9-29 17:58 | 조회 : 1,430 목록
작가의 말
히에

제가 젤 좋아하는거 악시리즈. 사진출처는http://cafe.naver.com/fpsfpsfpsfps/47여깁니다ㅎ 그리고 이 소설 내용은 완전히 창작이며(알렌이 어떻게 그런 결심을 했는지에 대한 과정을 써보고 싶었다죠) 문체나 이런건 악의P소설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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