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라이칼 드 로렌(7)

Chapter 2. 던전 위 피의 그림자

12. 라이칼 드 로렌(7)



결국 해가 졌기 때문에 더 이상의 진행을 포기한 우리는 내가 누워있던 던전의 내부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거참, 내가 던전에서 잘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는데.”

자신의 아버지인 로이드 제국 황제폐하 때문에 온실 안 화초처럼 자란 인제니드는 지금의 상황이 놀랍고 신기하다는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한심한 소리에 나는 픽 웃고 누울 자리를 정돈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애초에 첫 번째 수업 자체가 던전 탐험이라는 것부터가 이상한거야.”

“…그건 그렇지. 하긴, 갑작스럽게 모두가 알 수 없는 던전에 뚝 떨어져서 다들 당황했을 법 해.”

하지만 이 말은, 그 당시에 우리가 다른 아이들은 곧바로 다시 피에라로 이송되었다는 것을 몰랐을 때 한 말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수긍한 말이었다.

“그렇죠. 그럴 수밖에 없죠. 아무리 상급반이어도 실질적인 실전 경험은 없으니까요.”

“게다가 던전에 있던 하핏들의 행동이 이상했으니까, 더 그럴 거야. 평소에는 얌전하던 애들이 날뛰니까 더 그렇지.”

“……그런데, 이카르델. 너는 어떻게 던전에 대해서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 거야?”

“…….”

내 말에 이든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애매모호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음……실수인가. 그런데, 던전 탐험은 검을 잡은 사람들은 한번쯤은 다 가는, 그런 곳 아닌가?

딱히 실수도 아닌 것 같은 말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그가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일반인은 던전 탐험에 가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던(사실 나도 황궁에서 도망쳐서 갔던 곳이긴 했지만)내가 잘못한 것인지 모르겠는 상황에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든이 내가 소드 마스터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 주변에 마물이 없는지 살펴보러갔던 라이칼이 돌아왔다.

“…주변에 위협을 가할만한 마물은 없는 것 같았다.”

그 말에 나와 이든 사이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번갈아 바라만 보고 있던 인제니드가 씨익 웃으며 반갑게 대꾸했다.

“고맙다, 라이칼.”

“…고, 고마워.”

아아, 저 불쌍한 영혼 같으니.

아직도 라이칼이 늑대인간이라는 것에 대한 충격의 후유증이 남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든을 안타깝게 쳐다본 나는 방금 전에 나의 신상이 다시 한 번 털릴 뻔 했다는 사실을 잊은 채 진심으로 그를 측은히 쳐다보았다.

“나도 고마워, 라이칼.”

여러 가지 의미로 말이야. 너에게 진 빚은 참 많거든.

“……날도 저물고 내일 아침 일찍 던전의 복판에 이르러야 하니 빨리 자는 것이 좋겠군.”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어머니가 하는 잔소리의 특성을 지닌 그의 말에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린 나는 때맞춰 정돈이 끝난 잠자리에 벌러덩 누워 오묘한 빛을 내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밝다…….”

아름다운 하늘을 바라본 나는 그 기운을 음미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주변에서 스치는 자연의 소리가 기분 좋게 귓가에 울려 퍼졌다.

어느덧 황궁을 나온 지도 2주가 다되어간다. 그동안 나는 엉겁결에 운 좋게도 황궁을 탈출하여, 피에라 에서도 운 좋게 입학시험을 본 후, 지금은 그 수업을 들으며(짜증이 날대로 난 상황이긴 하지만) 황궁에 감금되어 있을 때보다 훨씬 더 평온한 삶을 만끽하고 있다.

이 생활에 나름대로 만족감을 느낀 나는 입가에 사르르 녹는 미소를 지은 채 기분 좋게 청하려고 했다.

-사락.

“……으음……?”

살랑 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은회색의 비단 같은 머리카락이 물결치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고개를 들으니 라이칼이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달밤에 홀로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몸을 일으켜 가까이로 걸어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본 상태로 걸음을 멈추었다.

“……자지 않는가.”

“……그걸 또 알아차리네.”

내 딴에서는 조심조심 소리 안 나게 걸어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또 라이칼에게는 정말 잘 들렸나 보다. 이렇게 바로 대답하다니, 역시 늑대인간은 소리에 민감하다는 것이 사실이긴 한가봐.

결국 내가 한 짓거리는 헛짓거리였다는 것을 깨닫고 이번에는 그냥 소리 나게 그의 곁으로 걸어갔다. 라이칼은 주황빛 눈으로 내가 그를 향해 다가가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아까 나와 이든의 대화를 듣고 있었던 것은 알고 있다.”

“…그렇구나.”

역시, 알고 있었군. 하긴, 모르는 게 더 이상하긴 하지.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의 의미를 표현했다. 눈을 감고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을 때, 내 앞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 같더니 눈을 떠 보았을 땐 라이칼이 어느새 내 앞까지 와 있었다.

보기만 해도 저절로 살벌해지는 표정으로.

그는 한쪽 손을 들어 내 목으로 가져다대고는 서서히 족쇄처럼 손에 힘을 가하여 나의 목을 누르기 시작했다.

“…하나 물어보고 싶군. 분명히 너는 내가 늑대인간이 아니라도 너희와는 다른 ‘이(異)종족’인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게 된 것이지?”

그가 낮게 으르렁대며 눈에 불을 켜고 나를 노려보자 나는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릴 적에, 딱 한번 고어(古語)가 써진 책을 본 적이 있었어. 그때 봤지. 네 이름, ‘라이칼 드 로렌 이카나이스’뿐만 아니라 ‘레이넨 드 로렌 이카나이스’, 그리고 ‘체첸 드 로렌 이카나이스’라는 이름을.”

“…! 어떻게, 그 이름을……!”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이거 하나는 분명해. 분명 나는 그 책을 읽을 수는 있었어. 하지만 발음하거나 쓰는 법은 모르겠는 거야.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몰랐지. 아예 어떤 힘으로부터 가로막힌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

“그때 알았어. 네 이름 뒤에 오는 끝 성(姓), ‘이카나이스.’ 이 성은, 고대에서나 이야깃거리로 등장했던 ‘늑대인간’들의 실존하는 성이니까.”

이제 알겠어? 라는 투로 작은 한숨을 내쉬며 쉴 새 없이 말을 토해내자 라이칼은 어느새 내 목에 가했던 힘을 조금씩 풀더니 아예 오른쪽 손을 떨어뜨렸다.

“뭐, 본의 아니게 네 비밀을 알아버린 것은 정말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어.”

“…….”

라이칼의 표정은 ‘전혀 유감스러워 보이지 않는데’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자연스럽게 그것을 무시해버린 나는 불어오는 따스한 바람에 싱긋 웃으며 눈을 감고 등을 돌렸다.

“유이시아 이샤 르데 루브스카.”

“…….”

“루브스카 제국 제 1황녀. 제국의 2번째 황위계승자이며, 대륙의 번째 소드 마스터이자, 현재는 제국 황녀자리를 포기하고 피에라에 재학 중이고.”

“…….”

“이게 내 전부야. 어때?”

“……생각보다 당돌하군.”

그가 의외라는 듯이 얼굴을 굳히고 말하자 나는 입 꼬리를 말아 올리곤 대답했다.

“그게 내 장점이야.”

나는 인제니드가 들었으면 뒷목잡고 쓰러질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고는 말을 이었다.

“물론, 나는 내가 너의 비밀을 지켜준다는 조건 하에 네가 내 비밀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말해준거야.”

내 말에 라이칼은 침묵으로 자리를 지켰다. 나는 그가 대답이 없자 고개를 돌려 그를 확인하려고 한 찰나, 그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너도……나 못지않은 힘든 삶을 살아왔군.”

“……!”

그의 묵묵한 말에 도리어 조용히 놀란 나는 고개를 완전히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러 감정이 뒤섞인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한방 먹은 기분이 들어 한참을 웃었다. 웃으며 난 눈물인지 지난날이 서러워서인지 모르는 의미모를 눈물만이 내 눈에 맺혀있었다.

“……정말, 이건 내가 도리어 한방 먹었잖아.”

“……네 고난은 지금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갑작스럽게 동문서답을 한 라이칼은 나에게 천천히 다가와 바라보고 있으면 무서워지는 주황색 눈동자를 빛내며 나를 뚫듯 쳐다보았다.

“이카르델. 너는 정말 이상하군. 무엇인가 네 자체를 가로막은 느낌이 든다.”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안 좋은 소리인 것은 알겠다.”

“……알아들으라고 한 소리가 아니다. 그냥 흘려들어라.”

갑자기 뜻 모를 말만 열심히 쏟아 붓는 그에게 심드렁하게 대답하고 이내 그가 말해온 대답에 웃었다.

“…너는, 왠지 거부감이 들지 않는군. 오랜 친구를 보는 느낌이다.”

“……그 말이 내가 늙어 보인다는 뜻만 아니길 빌게.”

라이칼의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들이 총총히 박힌 검은 배경에서, 홀로 빛나고 있는 달은 빛을 내며 아름답게 부서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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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6-07-23 15:40 | 조회 : 1,655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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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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