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화 - 모든 것을 놓고 온 장소이기도 했다. 속이 거북해졌다

눈꺼풀이 들리고, 푸른 눈동자에는 빨간 웅덩이가 비춰졌다. 익숙한 장소였다. 8년 전의 저택이었다. 지키겠다고 결심했던 이가 죽은 장소였다.

그리고 내게 남은 모든 것을 놓고 온 장소이기도 했다.

{클레아!! 어떻게 날...! 죽게 놔뒀어!! 네가 어떻게!}
까만 눈에서 붉은 피를 뚝뚝 흘리는 붉은 머리의 여자는 피 웅덩이의 한가운데에 앉아 클레아를 노려보다가, 쇳소리가 나는 목으로 원망스레 소리쳤다.


“...잠깐.”
목이 졸린 듯, 겨우 소리를 내는 클레아를 보며 레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후배님?”

“아니야... 아닌데? 내가 그런 게...”

괴로운 듯 인상을 찡그리는 것을 보다가, 들려오는 하델리오의 목소리를 듣고 레스는 고개를 돌렸다. 일단 마법을 멈춰야 했다.

"혹시 말이야. 두 번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불행한 기억이 있나? 내가 친절하게 다시 떠오르게 해줄 수도 있는데 ."

탁-
“뭐야.”

레스는 클레아에 이어서, 리더시스에게 마법을 쓰려는 체블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제 그 정도면 됐잖아. 하델리오.”

“허? 아직 두 명이나 남았어. 방해하지 마.”

“굳이 마법을 써야겠어? 적당-

“클레아한테 대체 무슨 마법을 쓴 거야. 얘가 대체 왜 이러는 건데.”

탁-
평소처럼 금방 벗어날 거라고 생각하던 루드는 리더시스의 옆에 서서 체블의 행동을 주시하다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깨닫고 클레아를 향해 다가갔다.

“클레아?”

‘나는, 지키려고...! 했, 했는데.’

코앞까지 다가가도 눈치 채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클레아만이 루드의 시야에 들어왔다. 클레아와 시선을 마주하려 숙였던 허리를 펴 체블의 바로 앞으로 가서 멱살을 잡았다.

적당히 하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멈추게 해주겠다고 말하려던 레스는 그냥 저기 쭈그려앉아있는 리더시스처럼 클레아의 상태나 살피기로 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날 지키려고 했던 거야? 사실은 너도 날 죽이려고-!}
‘아니야-!!’

발악하며 아무 소리나 내뱉는 붉은 머리를 보며, 클레아는 소리쳤다.


번뜩-

“아니라고.”
살기를 띤 눈이 레스와 마주쳤다.


“음... 멀쩡해? 후배님...? 멀쩡한 것 같네.”
나름 걱정하고 있던 차에 눈을 뜬 건 좋았지만, 살기를 띄고 있는 눈이어서 당황한 레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클레아에게 말했다.

“......”
눈을 떴지만, 마법이 풀린 것은 아니었다. 정신이 몽롱했다. 이게 마법이란 것을 아는데도 이미 가족으로 인해 한번 흔들린 정신을 찾기는 힘들었다.

천천히 눈이 감겼고, 다시 들려왔다.

{왜...왜 엄마를 그렇게 내버려둔 거야... 너만... 너만 아니었으면!!}
'나 때문인거 아니까.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좀 입 다물어.'

그 생각을 끝으로 기억들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밀어넣는 것 같았다.


‘내 실력이 나쁘지 않다. 이런 평가를 받는 건 말도 안 되는데요.’

‘오피온 소속, ’은월의 마법사‘입니다. 오랜만이에요.’
{내가 아저씨라고 부르지 말랬잖아.! 그리고 시크 좀 말려봐!}

오랜만에 반 아저씨를 만났던 날.

{그 아이는... 루드, 루드 크리시야.}

루드를 처음 만났던 날.

{능글거리는 것도 라노스테랑 똑같아졌어. 이런 애가 아니었는데...}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데? 협회에 남아있을거야?}

‘역시, 아저씨가 맞았네요. 아저씨 맞잖아요? 반 아저씨.’

{아저씨 아니라니깐?!}

{재미있는 녀석이 나타난 줄 알았더니. 쯧}

‘...살고 싶어...죽기 싫어.’

죽을 뻔 했을 때 구해준 시크와 두번째로 가족이 되어준 이들.

‘아빠... 엄마는?’

{아가씨, 피하셔야 합니다.}

악몽 같았던 날. 기억하기조차 끔찍한 날.

{오빠 때문에 리더시스가 도망가 버렸잖아!}

‘응! 아직 멀쩡해!’

{공주님. 오늘 안 피곤했어?}

{딱딱해! 어떻게 우리 아빠보다 더 딱딱할 수가 있지?}

{아가씨! 넘어지시면 다치십니다!}

가족들과 지내온 시간들. 아무 걱정 없던 그 시절에는 마냥 행복했었다.

‘아무래도... 약속 못 지킬 것 같네요.’
씁쓸한 어조로 읊조리며, 앞으로 걸어가는 여자와 그런 여자 뒤에서 어떤 힘에 잡혀있는지, 발버둥치면서 여자의 이름을 부르짖는 어린 아이는 눈물 범벅이었다.

‘카이엘, 내가 항상 말했었죠. 이런 상황에서는 피해있으라고.’
모든 것을 포기한 표정의 앞에 나타난 여자.


[당신만, 무사하면 만족한다고요!!]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이미 한번 경고 드렸습니다. 그만두세요. 더 이상은 곤란합니다. 이 시간 이후로, 힘을 남발하신다면 자격을 박탈하겠습니다.]

‘모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나는 그런 여신님의 책임감이... 정말 싫어.]

‘저희가 각각 관리할 곳을 정해야겠죠. 어디를 맡고 싶나요?’

[나는 륜이라고 불러줘!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이 친구는 베노스!]
반짝거리는 사람, 잠이 많아 보이는 사람.

‘저희의 선택에 후회는 없습니다.’

[(경쟁을 뚫고 올라온 너희들이기에 거는 기대가 크다.)]
이상한 일이었다. 처음 듣는 목소리인데. 처음 보는 얼굴일텐데도. 클레아의 눈에 비치는 이들의 얼굴은 마냥 행복해 보이다가도 무표정했다. 속이 거북해졌다.

0
이번 화 신고 2018-01-03 00:33 | 조회 : 1,236 목록
작가의 말
조그마한 시계

번뜩- 클레아:아니라고 레스:흠칫! (능청)무슨 일 있었어?

후원할캐시
12시간 내 캐시 : 5,135
이미지 첨부

비밀메시지 : 작가님만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익명후원 : 독자와 작가에게 아이디를 노출 하지 않습니다.

※후원수수료는 현재 0%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