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게임의 시작

"누구시죠?"

기분이 좋지 않다는 감정을 숨기지 않은 채 진욱이 물었다.

"나?"

기다랗고 하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르키며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한 순진한 표정으로 물은 한울이 다시 입꼬리를 올려 씨익 웃었다.

남자가 보기에도 한 없이 예쁜 모습이기는 했지만 왠지모르게 진욱의 머리에는 수백년 묵은 구미호가 떠올랐다.

"나야, 뭐. 연지랑 같이 사는 사람이지?"

"악! 그게 무슨 소리에요?"

당황한 연지가 비명을 지르면서 한울을 바라봤다.

입을 막으려고 했지만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자연스럽게 피하고는 연신 미소를 걸고 있었다.

연지는 갑자기 나타났는데 평소와 다르게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가 싶더니 잘도 그런 소리를 내뱉는 말에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무슨 소리냐니, 우리 같이 사는 거 아니었어?"

"아니...그게..."

"같이 사는 거 아니야?"

"같이...사는 건 맞죠."

다시 한 번 묻는 한울에 연지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긍정의 말을 내뱉었다.

한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아~"

인상을 찌푸리며 그런 둘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진욱은 무엇인가를 집중해서 바라보는 듯 하더니 이내 무언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연지 친척분이셨던가요?"

"뭐?!"

"예전에 봐서 희미하긴하지만 연지 친척분이신 것 같았는데, 아니신가요?"

진욱이 이제 뭔가 알겠다는 듯 평온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친척이라니...

연지와 혈연의 관계로 묶여버린 한울이 가라앉은 미소를 지으며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대화에 연지는 그저 경악스러울 뿐이었다.

자신은 딱히 가까운 친척도 전무할 뿐더러 제대로 얼굴을 본 기억도없다. 그저 지나가는 얘기로 다들 외국에 사신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친척?

게다가 그런 연지의 집안사정을 진욱이 모를 리는 더더욱 없었다.

자신이 계속해서 진욱의 집의 도움이 받는 이유이기도 한데.

"흐음.... 근데 되게 어색하네요."

"글쎄... 너랑은 어색할 수도 있지만 연지랑은 괜찮으니까 뭐."

싱긋.

예쁘게 웃어보인 한울은 피자조각을 콕 찍은 포크를 들고 있는 연지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당황한 연지가 뭐라 하기도 전에 피자를 자신의 입으로 가져와 오물오물씹어먹었다.

누가봐도 친분을 과시하는 듯한 행동에 진욱의 인상이 구겨졌다.

그런 모습에 한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지만 진욱을 주시하고 있는 눈에서는 절대 즐거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둘의 눈이 공중에서 마주치고 용과 호랑이마냥 적대감이 잔뜩 서려있는 알 수 없는 신경전이 팽팽히 형성되었다.







"도대체 뭐에요?"

매우 불편했던 점심식사가 끝나고 다시 훈련을 받으러 떠나는 진욱과 헤어져 카페에 들어온 연지가 물었다.

체육관으로 가기 전 계속해서 걱정스럽게 흔들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진욱의 표정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찌된 영문인지 꽤나 자연스럽게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지만 진욱을 속이고 있던 걸 모두 들킨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하기만했다.

"뭐가?"

그런 자신과 다르게 태연하게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린 한울이 자연스럽게 커피와 코코아를 주문하고 진동벨을 받아들었다.

뭐가 그리 좋은건지 생글생글 미소를 짓는 한울을 따라 사람이 없는 2층으로 올라왔다.

"도대체 어떻게 된거에요? 왜 갑자기 사람들한테 보이고, 오늘은 또 왜 거기에...!!"

안절부절하며 평소와 다르게 흥분한 목소리에 말을 뱉어내는 연지의 분홍빛 입술에 한울의 하얗고 기다란 검시손가락이 닿았다.

보통 사람들보다 차갑지만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지자 깜짝 놀란 연지의 말이 막혔다.

"그렇게 안 보채도 하나씩 얘기해줄게."

그 상태 그대로 얼어버린 연지를 보고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린 한울이 보드라운 핑크색 입술을 한 번 톡 치고 손을 거둬들였다.

"속상하게..."

그 짜증나는 선생님과 관련된 일에도 차분하던 연지가 진욱과 있던 장소에 나타났던 일로 흥분을 하니 왠지모르게 서운한 마음이 밀려왔다.

웃고는 있지만 무언가 가라앉은 기운을 느낀 연지가 도르륵 눈을 굴리더니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한 여름이었지만 한울의 막무가내의 주문으로 핫초코를 받아들게 된 연지가 살짝 한숨을 폭 쉬었다.

도대체 뭐 때문에 자신에게 계속 따뜻한 것만 먹이려고 하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저번에는 정말 억울한 마음이 들어서 왜 따뜻한 것만 먹게 하냐고 따졌었다.

그 때 한울은 '넌 따뜻한 것만 먹어야 되게 생겼어.'라는 어이없는 대답을했었다.

"이거 안 마시면...."

"그거 안 마시면 어떻게 된 일인지 얘기 안 해 줄거야."

한울의 선포에 울상을 짓던 연지가 핫초코를 꿀꺽 넘기자 한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이제 어떻게 된 건지 알려주세요."

"인간처럼 보이는 약을 받았거든."

"인간처럼 보이는 약이요?"

"응."

한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울이 전해준 푸른색 액체는 저승사자처럼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들을 보이게 만들어 주는 액체였다.

"그건... 갑자기 왜요?"

"아무래도 내가 다른 사람들한테 보이지 않으니까 너랑 같이 행동할 수 있는데 제약이 많잖아. 너도 네 생활이 있었으니 나도 주변 어딘가에 있을 수 밖에 없고."

연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학교에 따라온다고 했을 때나 진욱과 함께 있을 때 모습을 나타내면 이런저런 장난을 치지만 자신이 다른 이들에게 이상하게 비추어지지 않도록 노력을 많이 기울이고 있다는 것 정도는 자신도 알고 있었다.

"일단은 너희 부모님의 부탁으로 널 돌보러 온 보호자로써 속속들이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

"네?"

속속들이라니?

지금 한울이 설명하는 자신들의 관계는 전보다 더 적극적인 듯 보였다.

"나쁜 친구나 선생님들한테서도 막아주고, 보호해주는 게 내 역할이니까. 내 역할을 더 잘 수행하기 위해서 필요할 거라고 판단했어."

"그렇지만 나쁜 악귀들로부터 지켜주시기만 하는 것 아니었어요?"

"그건...."

한울이 말꼬리를 늘렸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연지의 보호를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일이었다.

그런 자신이 해야하는 일은 그저 악령에게서부터 연지를 지켜내는 것.

단지 그거 하나였다.

인간들의 삶이나 관계에 대해서 죽은자들을 관리하는 저승사자가 끼어드는 경우는 적절한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게 될 것 같은 경우 뿐이었다.

"그건, 비밀."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한울은 그저 싱긋 웃으며 덮어버렸다.

"그리고 아까 네 친구가 나를 친척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같이 받은 부적 때문이야. 인간들 틈에 섞였을 때 갑자기 새로운 사람이 나타났다고 인지하게되면 문제가 생기잖아. 그래서 자연스럽게 동화되도록 해주는 거야. 왜 친척으로 인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한테는 아마 친척으로 인식되지는 않을 수도 있어."

"그럼 어떻게 되는데요?"

"사실 상황마다 꽤 유동적이게 바뀌는 편이라서. 직업도 관계도 쉽게 새로 만들어내는 거거든. 갑자기 내 직업이라던지 우리 관계같은 게 바뀌더라도 너무 놀라지 말라고."

"네."

기분좋게 싱글싱글 웃어대는 한울에 연지도 따라 살짝 웃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욱은 아까 보았던 남자의 얼굴을 떨쳐버리기 위해 평소보다 배나 강도가 센 운동을 했지만 얼굴은 더욱 더 선명하게 자신의 뇌리에 박힐 뿐이었다.

"하나도 안 변했어..."

짐승이 경계를 할 때 그르렁거리는 듯 중얼거리는 진욱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갑자기 느껴지는 인기척에 깜짝 놀란 진욱이 고개를 들자 오렌지색의 결 좋아보이는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이 활짝 웃어보였다.

곱상하게 생긴 얼굴과 다르게 커다란 나시티로 보이는 어깨와 팔은 소년이 꽤나 다부진 몸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해 주었다.

"꽤 오랫만이지?"

개구지게 씨익 웃어보이는 소년에 진욱의 눈동자가 커졌다.

설마....

"나 열심히 노력하고 온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너한테 한 것처럼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소년은 그렇게 말하며 진욱의 옆에 풀썩 주저앉았다.

설마...

진짜 올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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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9-05 21:54 | 조회 : 1,416 목록
작가의 말
브리사

오늘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날이 차니까 감기 걸리지 않게 옷 따뜻하게 입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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