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얄미운 만남

가라앉은 기분에 계속해서 무서운 표정으로 톡톡 쇼파 팔걸이만 치던 한울의 핸드폰이 울렸다.

이름도 확인하지 않고 대충 통화버튼을 밀어 귀에 가져다대자 닭살돋을 정도로 단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님, 저 여울입니다."

"아..."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탄성과 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그러고보니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잠시 망각했다.

오랫만에 느껴보는 감정의 소용돌이 때문이었다.

"미안. 아직 다 못 끝냈어. 이제 다시 슬슬 나갈거야."

"아니요. 그게 아니라 선배님이 계신 집 앞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뭐, 안될 건 없지."

한울의 동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현관문을 통해 쑤욱 들어온 여울이 깍듯하게 허리를 굽혔다.

요즘 저승사자들과 다르게 검은색 두루마기까지 꼼꼼하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녀석이 옷차림마냥 단정한 걸음거리로 한울에게 다가갔다.

어차피 뭐라 하는 사람도 없는데 앳된 얼굴에 갓까지 잘도 쓰고 있었다.

"정승사자면서 무슨 허락이야. 문 못열어서 못 들어오는 것도 아닌데. 설마 영혼 데리러 갈때도 창문 앞에서 들어가도 되냐고 물어보는 건 아니지?"

"그러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여긴 선배님이 지내시는 곳이지 않습니까. 이 집 주인분도 저희가 보이실텐데 갑자기 들어오면 놀랄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여튼...."

시간이 지나도 정석대로 사는 녀석은 여전했다.

"그 분은 안 계십니까?"

"공부한다고 나갔어."

"안 따라가셔도 되는겁니까?"

여울의 질문에 한울이 진욱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같이 가는 녀석이 기가 여간 센 녀석이 아니라서. 엔간한 악령들은 달라붙을 생각도 못할거야."

사실 마음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다시 따라가고 싶었다.

하지만 아침부터 연지에게 좋은 꼴을 못 보인 것이 마음에 걸렸다.

계속 신경쓰이게해서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군요."

"그나저나 갑자기 무슨 일이야?"

"아, 전달할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여울이 기다랗게 늘어진 검은 도포 안에서 푸른 액체가 든 병과 부적을 꺼냈다.

"이게 뭐야?"

"저번에 한울님께서 부탁하신 겁니다."

"응?"

한울이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게 구하기 쉬운 것도 아니고, 아무에게나 쉽게 허락해주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게다가 그 망할 영감이 건 조건이 있는데, 아직 다 일을 처리하지도 않았는데 건네다니.

"저도 의문스러우니 어떻게 된 것인지는 묻지 말아주십시오. 옥황상제님께서는 한울님이 일찍 일을 끝내셔도 일주일 뒤에 가져다 주라고 하셨습니다."

"망할 영감. 10년 동안 그렇게 굴려 먹은 걸로 아직도 성에 안 찬데?"

또 한 번 속았었다는 생각에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 된 한울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써봐도 자신이 그렇게 미움받을 짓을 한 적이 없었다.

"그건 여쭤보지 않아서 저도 모릅니다."

차분하고 딱딱하게 한울의 말을 끊은 여울이 다시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래도 이렇게 제가 이것을 가져올 수 있었던 이유는 단율님이 허락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단율이?"

못믿겠다는 듯 한울의 눈동자가 커졌다.

옥황상제가 제 멋대로 구는 고집불통이라면 단율은 절대 규칙을 어기지 않는 고집쟁이었다.

여울보다 훨씬 더한 사람으로 과연 감정이란 게 있을까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리 중요하게 여기는 상관인 옥황상제의 말도 듣지 않고 움직이다니...

".....저번에 10년동안 나 굴리려고 순순하게 보내준 게 미안해서 그런가?"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옥황상제님의 명을 어기고 전해주라고 하신 것이니 적어도 일주일 동안 만큼은 사고치지 마십시오."

"누가 들으면 항상 사고치는 줄 알겠다."

"지금 여기에 계신 것부터가 사고를 치신 것 아닙니까."

여튼 귀여운 맛이 없는 후배였다.

"이것은 그냥 드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 부적은 사람들의 기억을 조작해서 한울님께서 자연스럽게 인간세계에 동화되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알았다. 고마워. 뭐 좀 먹고 갈래?"

"아닙니다. 할 일이 있어서요."

어차피 업무 중에 나온 녀석이 올타구나하고 동의를 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터라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여울이 들어올 때처럼 다시 곱게 허리를 굽히고 밖으로 나가자 한울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물약과 부적을 집어들었다.

"이제 이것도 생겼으니 뭐...."







시설도 좋고 사람도 거의 없는 도서관은 진욱과 지현이 주말에 가끔 공부를 하는 장소였다.

사람들이 없으니 신경 쓸 것도 적었고, 작게 이야기해야하긴 하겠지만 대화를 하는 데에도 불편하지 않아서 애용하는 곳이었다.

오늘도 커다란 창문 앞에 있는 두 명이 넉넉하게 공부하기 딱 좋은 책상에 앉아 각자 음료수 한 캔씩 뽑아와 마주앉은 책 공부를했다.

집중해서 문제를 풀다가 긴장을 풀고 채점을 하던 연지는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왜?"

진욱에게 목소리를 낮춰 묻자 진욱은 그저 고개를 저었다.

"뭐야 재미없게..."

연지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다시 문제집으로 시선을 옮겼다.

실수만 하지 않고 이번 시험만 무난하게 치룬다면 이번 여름방학부터는 편안하게 지내도 될 것 같았다.

커다란 일에는 곧 잘 긴장을 하는 편이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이 아픈 타입이라 처음부터 연지의 목표는 수시였다.

가고 싶은 학교랑 과도 이정도 성적이면 크게 문제 없이 들어갈 수 있었고.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더니 내용이 더 머리에 잘 들어오는 것 같았다.

국어도 이를 갈며 다시 한 번 암기할 것을 외우고 정리를 하다보니 배가 고파졌다.

시간을 보니 슬슬 점심이기도해서 책을 보고 있는 진욱의 팔을 콕콕 찔렀다.

"......!!!"

누가보면 옷벗고 춤추는 사람이라도 본 것마냥 진욱이 갑자기 화들짝 놀랐다.

덩치도 큰 녀석이 연습장까지 꼬옥 안고 놀라는 표정을 보자 연지가 웃음이 터져 두손으로 재빨리 입을 막았다.

"왜?"

부끄러운지 뒷목을 감싸며 진욱이 살짝 퉁명스레 물었다.

차마 가릴 생각을 하지 못한 귀도 사과마냥 붉게 물들어있었다.

"풉...아니, 나가서 밥 먹자고."

작게 키득거리는 모양에 진욱이 아프지 않게 꿀밤을 먹이고 연습장을 덮어 자신의 가방에 챙겨넣었다.






"그래도, 시합도 있고 한데 좋은 거 먹어야 하는 거 아니야?"

피자집 앞에 선 연지가 곤란한 듯 살짝 아랫입술을 내밀며 진욱을 바라봤다.

"너 이거 좋아하잖아."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거고. 운동하는데 뭐지, 막 영양가 가득한거... 음.. 보양식? 이런 거 먹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뭐지 막 보신탕? 삼계탕?"

"됐어. 갑자기 기특하게 그런 생각 하지마. 무섭거든?"

"뭐래? 걱정해줘도."

연지가 투덜투덜거리자 진욱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났다.

"나도 오랫만에 먹고 싶어서 그래. 그리고 우리 엄마 그렇게 보고도 모르겠냐? 아주 밥에 간식에 영양가 좋다고 소문난 것만 먹이신다."

"하긴 이모가 워낙 잘 챙겨주시기는하지."

"그러니까 들어가."

결국 진욱의 말에 함께 피자집에 들어갔다.

진욱이 자연스럽게 연지가 좋아하는 피자와 에이드를 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자가 나오자 오랫만에 먹는 피자에 연지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먹기 시작했다.

"맛있냐?"

"그럼 맛있지. 못 먹은지 한참 됐으니까."

원래 요리하기 싫거나하면 자주 시켜먹는 편이었는데 한울이 밤낮으로 음식을 차려주다보니 음식을 차릴 일이 없었다.

도대체 어떤 마법을 쓰는건지 어렸을때부터 자신이 먹고 싶은 거를 귀신같이 알아채는 녀석이었다.

"많이 먹고 시험 잘 봐라. 이번 시험 잘봐야 나 시합할 때 응원오지. 뇌물이니까 많이 먹고 와라."

"맨날 갔는데 새삼스럽게. 시험 망해도 갈거니까 걱정하지 마."

차가운 탄산음료를 꼴깍꼴깍 넘기며 연지가 웃어보였다.

"마음이 편하고 기분이 좋아야 응원도 잘하고 얘기도 잘 들어주지."

"뭐래? 너는 운동 잘 되가고 있어?"

"뭐.. 그냥 하는거지."

"잘하면서 꼭 그냥 하는 거래 너는."

"그럼 내 입으로 잘한다고 말할까?"

진욱이 장난스레 거만하게 머리를 쓸어넘기며 묻자 연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의 매력은 겸손한 건 것 같아. 아,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몸관리 잘하라고."

"내가 언제 아픈 적이나 있었어?"

"그래도 저번에 다리도 다쳤었잖아. 무서울 정도로 회복이 됐긴하지만... 원래 한 번 부러지고 그런 데는 또 잘 그런다더라고."

확실히 크면서 몸 다치는 건 둘째치고 잔병치레 한 번 제대로 하는 걸 본 적이 없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저번에 다리 다친 것도 있고, 나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곧 시합이라 연습 강도가 높아지는 것도 신경쓰였던 터였다.

"아이고, 다컸네."

진욱이 씨익 웃으면서 손을 뻗어 연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

평소와 다름 없는 평범한 행동이었는데 갑자기 아침에 느꼈던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뭐지...?

"왜 그래?"

갑자기 멍하니 굳어버린 연지에게 진욱이 물었다.

"그게... 아까 아침처럼...."






"아침에 봤던 것처럼 못생긴 얼굴이 갑자기 가까워지니까 당황한거지 뭐. 그렇지?"

검은색 수트를 완벽하게 차려입은 한울이 연지의 말을 끊으며 그 옆에 풀썩 앉았다.

그리고 당황해서 눈이 커진 연지의 손을 잡아 끌어 피자 한 조각을 냠냠 맛있게 씹었다.

"지...지금...이게 뭐..."

다른 사람들에게는 한울이 보이지 않으니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으려고하며 연지가 작게 말했다.

이미 뭔가 이상한 것을 알아챈 것인지, 갑자기 딴 이야기 하는 자신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인지 진욱의 표정이 잔뜩 찌푸려져있었다.

"갑자기 이렇게 나타나면..."

"앗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그 때 서빙을 하던 종업원이 살짝 발을 삐끗해 한울에게 몸을 부딪히자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다시 일 하세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다시 인사를하고 자리를 뜨는 여종업원을 연지가 멍한 눈으로 바라봤다.

확실히.... 인간한테는 안 보이는 게 맞을텐데..

설마... 저 여자분 곧 죽을 운명이신건가...

아직 젋어보이시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다 들어나네. 그런 거 아니니까 상상의 나래는 그만 펼치자."

놀란 표정이다가 동정심 가득한 얼굴로 바뀌는 얼굴에 풋!하고 웃음을 터뜨린 한울이 살짝 연지의 볼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그리고서 연지의 앞에 있던 에이드를 들어 천천히 입에 빨대를 가져다댔다.

그리고 진욱에게 보란듯이 눈을 맞추고서 쪽쪽 맛있게도 에이드를 빨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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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8-29 08:31 | 조회 : 1,464 목록
작가의 말
브리사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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