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흔들리는 관계(1)

여울은 크게 한번 호흡을 내쉬고는 커다란 갈색문에 손을 가져다댔다.

똑똑-

행동거지만큼 단정한 노크소리가 울렸다.

"들어와."

날카로운 목소리가 허락을 알리자 여울은 문고리를 돌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동양적으로 꾸며진 방은 주인을 닮아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단정했지만 사람냄새는 나지 않았다.

병풍을 뒤로하고 책상 앞에 앉아 자신을 보는 눈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한울에 관한 건가?"

"예."

천천히 앞까지 다가가 신청서와 승인자료 등이 정리되어 있는 검은 서류철을 내려놓자 사내가 매서운 눈으로 그것을 넘겨봤다.

단율.

한울의 몇 년 선배로써 아직까지 소원을 이루지 못해서 저승사자직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특이 케이스라면 특이케이스인 단율이 한울과 다른 점이라면 깔끔하고 완벽하게 하는 일처리와 냉철함이었다.

덕분에 몇 년 차이도 안 나는 그는 몇 부대나 되는 저승사자들을 이끄는 책임자 네 명 중의 한명이었다.

자신의 사람이라고 봐주는 것 없고, 편 들어주는 것 없는 이 사람의 성격은 어찌보면 훌륭했지만 상당히 피곤했다.

덕분에 이렇게 한울과 관련된 서류를 올리는 자신의 손에 식은 땀이 맺히고 있었다.

"상제님도 허락하신 일이군."

"예."

호흡도 잊게 하는 눈으로 스윽 여울을 한 번 바라본 단율은 보고서를 덮고는 자신의 서랍을 뒤져서 하나의 약물과 부적을 꺼내놓았다.

"조심히 잘 전달하도록해라."

"네. 기한은 상제님이 말하신 대로 일주일 후 쯤으로 하도록하겠습니다."

물약과 부적을 조심스레 들어올리며 여울이 말했다.

"...아니."

딱딱한 부정의 말에 여울의 눈이 커졌다.

명령은 절대복종.

절대 룰을 어기는 법이 없는 그였다.

"위험하고 귓중한 물건이다. 이 것을 사용하기 적절한 때를 그 녀석이 모를 리도 없다."

"아..."

여울이 말 끝을 흐렸다.

확실히 그렇게 하는 쪽이 한울에게는 좋은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가끔씩 내 마음이 가는 데로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조금은 이상한 태도에 의아했지만 여울은 그저 조용히 허릴 숙이고서 방을 빠져나왔다.






온 김에 같이 공부나 해야 겠다며 열심히 역사책을 보는 듯 하더니 어느새 잠에 빠져버린 연지를 보자 진욱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살금살금 연지의 곁으로 다가간 진욱은 조심스럽게 연지를 안아 올렸다.

가느다란 몸과 온기가 느껴졌다.

짧은 반팔과 반바지를 입은 탓에 보드라운 살결도 느껴졌다.

게다가 새근새근 잘도 숨결을 내뱉고 있었다.

'여자애가 위험한지도 모르고.'

하긴 그러니까 잘도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거겠지.

마음속으로 콩!하고 꿀밤을 먹인 진욱은 조심스레 이불을 치우고는 연지를 눕힌 뒤에 다시 얇은 이불을 연지에게 덮어줬다.

여름이긴하지만 에어컨 때문에 감기에 걸릴 수도 있었다.

꼼꼼히 이불을 챙기다보니 살짝 고개를 돌리자 연지의 얼굴과 한마디 밖에 떨어지지 않은 꼴이 되어있었다.

평소같으면 당황해서라도 자리를 피했겠지만 이번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분명 자신과 같은 바디워시 제품을 사용할텐데도 자신과는 달짝찌근한 향이 느껴지자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가만히 얼굴을 바라보자 풍성하고 길다란 속눈썹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하얗고 깨끗한 보드라운 피부도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무엇보다 진욱의 시선을 잡아챈 것은 붉게 물든 입술이었다.

다른 학생들과는 다르게 틴트나 립글로즈도 거의 바르지 않고 립 보호제만 바르는 연지의 입술은 딱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붉었다.

자동으로 클로즈업되는 듯 오로지 입술에게 시선을 빼앗긴 진욱은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듯 자신의 입술을 연지의 입술에 가져다댔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자신의 입에 닿자 확하고 몸이 달아올랐다.

본능적으로 혀로 말캉하고 탱글한 입술을 조용히 핥아내렸다.

한 번 그 달달함을 맛보고나니 머리보다는 본능이 몸을 지배했다.

살짝 고개를 숙여 통통한 아랫입술도 부드럽게 빨아들였다.

"음...."

입술에서 느껴지는 자극에 연지가 뒤척이자 진욱은 갑자기 뜨거운 것이라도 만진 사람마냥 깜짝 놀라서 튀어올랐다.

침대에서 떨어진 진욱의 얼굴은 귀까지 붉게 달아올라있었다.

'내가 지금 자는 애한테!'

아무리 요즈음 상황에 불만을 가지고 은근한 질투심을 느끼고 있었다고해도 그렇지!

제정신도 아닌 상대에게 이런 짓을 하는 건 비겁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지에게서는 떨어져 나와서도 시선은 다시 연지의 입술로 향했다.

방금 자신과의 입맞춤 때문인지 촉촉하게 젖어버린 입술이 색정적이었다.

건장한 19세 소년의 머릿속의 영상의 폭주는 막을 수 없었고 달아오른 몸은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진욱은 다시 욕실로 뛰어들어가 차가운 물을 쏟아 부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시간 병원 근처의 공원을 내려다보던 한울은 소름끼치게 기분나쁜 느낌에 인상을 팍 찌푸렸다.

왠지 엄청나게 싫은 기분이 전율처럼 전신에 퍼져나갔다.

문득 진욱의 집에 두고온 연지가 떠오르기는 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진욱이 어떻게 생각하든지간에 연지는 진욱을 딱히 좋은 친구나 가족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그리고 살펴봤을 때 진욱 역시 보기와 다르게 꽤 소심한 것인지 연지에게 여지껏 이렇다 할 짓을 한 적이 없으니까.

그래도 기분이 더러운데....

'그 영감이 또 나 엄청 씹어대고 있는 거 아니야?'

한울은 베실베실 웃으면서 자신을 엄청 괴롭혀댔던 옥황상제의 그 짜증나는 얼굴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위인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한울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기고는 목표물을 향해 재빨리 움직였다.





"순순히 그냥 와. 아무리 사람 아닌 귀신이라도 여자한테 딱히 공격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한울이 나무 아래 앉아있는 처녀귀신을 향해서 손짓했다.

잔뜩 겁먹어서 벌벌 떨며 나무에 딱 붙어 있으면서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있었다.

"왜?"

".....아...아직 한번도 남자랑 데이트도 못해봤는데 이렇게 갈 수는 없어요!!"

여하간 처녀귀신이랑 총각귀신들이 상대하기 어려웠다.

귀신이 되어서 자신감이 붙은 건지 뭔지 전생에는 안해봤을 대쉬들을 엄청나게 해 대는데, 이쪽은 나쁜 의도가 없다해도 인간들은 가위 눌리고 난리도 아니였다.

아무렴 억울해봤자 몇백년째 성격 나쁜 늙은이의 노예로 굴려지는 자신만할까.

"저승에도 괜찮은 총각들 많아. 네가 맨날 이런 병원 주변에만 있으니까 건강하고 멋진 녀석들을 못봐서 한도 못 풀고 이러고 있는 건 알겠는데 이제 가자. 거기도 괜찮다니까? 여기 있어봤자 더 슬플 뿐이야."

"......"

의심의 눈초리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지자 한울이 한쪽 입꼬리를 쓰윽 올리며 귀신을 쳐다봤다.

"나 정도 외모면 훌륭하지? 나도 다 죽어서 선택되서 저승사자 된거잖아. 저승가면 나같은 애들 많아."

처녀귀신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그리고 정 걱정되면 저기 옥황상제 궁녀로 들어가던가. 성격이 거지같아서 그렇지 얼굴은 꽤 괜찮거든."

흔들리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아직도 처녀귀신은 나무를 꼭 붙잡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억지로 끌어다가 넣고싶지 않아. 너도 그건 별로지?"

한울은 그렇게 말하면서 검은색 핸드폰을 두드려 커다란 검은 문을 소환해냈다.

"진짜 잘생긴 남자랑 포옹 한번만 하고 갈게요."

자신이 우겨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는지 귀신이 손을 모으면서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럼 나한테 안겨. 나보다 잘생긴 사람 별로 없을텐데?"

당당하게 말하는 한울의 얼굴을 처녀귀신이 다시 찬찬히 뜯어보았다.

확실히 잘생긴 얼굴이기는했다.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하며 손을 잘근잘근 씹는데 다시 한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그냥 억지로 끌려가는거야. 힘 안쓰고 그냥 나랑 한 번 안는걸로 위안받고 갈래, 아님 정말 진 다빠져서 억지로 들어갈래?"

확실히 강한 원한도 힘도 없는 처녀귀신이 저승사자를 상대로 이길리가 없었다.

고민고민하던 처녀귀신은 머리가 나쁘지 않았는지 주춤주춤 일어났다.

그리고 한울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두 팔을 벌리고 곱게 미소를 짓고 있던 한울은 처녀귀신이 자신에게 가까워지는 순간 팔목을 잡아 검은색 문 안으로 순식간에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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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8-25 10:14 | 조회 : 1,666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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