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흐름의 변화

따뜻한 물에 오랫만의 외출의 피로를 씻고 나오니 조금은 이른 저녁을 준비하는 한울이 보였다.

아까 옷을 고를 때 장난 반으로 흰 피부니까 괜찮겠지라고 생각하며 산 핑크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뽀얀 피부와 적당한 근육이 잡힌 약간 마른 듯한 몸은 원래 생각과는 다르게 이상하거나 우습지 않고 모델이 입은 것 마냥 딱 잘어울렸다.

"잠깐 이것만 하면 되니까 앉아있어."

"네."

드르륵 의자를 끌어와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울이 보글보글 끓는 순두부찌게와 맛깔나게 잘 만든 가지무침 등 보기만해도 침이 고이는 음식들을 차려냈다.

역시 오늘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맛있는 음식에 연지가 신이 나서 밥을 먹었다.

"맛있어?"

한울의 물음에 연지는 빵빵한 볼을 가지고 고개를 끄덕였다.

똘망똘망하게 눈을 뜨고서 자신을 바라보는 모양에 한울의 입가가 푸스스 힘을 잃고 허물어졌다.

"저번에 들으니까 밥 같은 거 잘 안 먹는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던데 나는 전혀 모르겠네."

연지의 입가에 묻은 밥풀을 뗴서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며 한울이 말했다.

자신의 이런 행동에 당황한 것인지 슬쩍 달아오르는 얼굴이 역시 몸이 커지기는 했어도 그 때 그 아이같아서 귀여웠다.

"뭐... 사실 잘 안 먹는 것 보다는 맛 있는거 없는 거 가리는 것도 있고, 귀찮아서 잘 안 먹는 거에요."

"하긴. 내 음식이 귀찮음도 이겨낼 만큼 맛있기는 하지?"

내 음식이 그렇게 맛있어?도 아니고 맛있는 게 당연하다는 듯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 약이올랐다.

하지만 맛이 있는 걸 부정하지는 못하고 연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래 살면서 는 거라고는 음식 솜씨랑 능청맞음 밖에 없다니까?"

연지의 밥 위에 고소한 냄새가 나는 멸치 볶음을 올려주며 한울이 생글거렸다.

"그래서.. 시험이 다음주라고?"

"네."

"힘들겠네.... 그래도 끝나면 방학이니까... 아, 아닌가? 고3은 방학 때 더 바쁜 건가?"

"보통은 그렇죠."

"보통이라면 너는 아니라는 거야?"

한울의 물음에 연지가 먹던 밥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어갔다.

"저는 막 엄청 높은 대학에 가고 싶어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냥 가까운 대학에 지원하려고해서요. 여지껏 내신 관리해온 게 있으니까 그걸로 수시 넣을 거라서 이번 시험만 평소처럼보면 널널해요. 보충수업같은 것도 안 나갈 예정이에요."

"그래?"

"저보다는 진욱이가 바빠질 걸요? 대회도 있어서요. 그래도 이번 시합도 잘 치루면 상비군든 국가대표든 잘 될 가능성도 있고 특기자로 뽑힐 수도 있으니까요. 아, 그러고보니 몸관리도 잘 해야 될텐데."

연지의 입에서 나온 진욱이라는 단어에 한울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딱히 그 놈에 관해서는 관심도 없었고 연지가 관심을 가지는 것도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몇백살이나 먹고는 이유는 모르지만 신생아 같은 녀석에게 괜한 견제의식을 갖는 것이 유치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괜히 심보가 꼬이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여튼 공부 열심히 해야겠네."

"그렇죠."

"저번에 보니까 한자도 완전 꽝이던데. 국어 잘 하려면 한자도 어느 정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 저 성적 괜찮거든요? 저번에 그 선생님이 저 싫어해서 어려운 문제 내서 그렇지 완전 괜찮아요!"

괜한 마음에 툭툭 건드리자 그 날 그 사건이 어지간히 억울하기는 억울했는지 연지가 잔뜩 힘을 주고 대답했다.

"그 선생님이 얼마나 치사한데요! 제가 저만 괴롭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말을 안해서 그렇지 얼마나 사람이 치사하고 못됐는지 몰라요! 여튼 선생님들 중에서 이상한 분들이 나가야 좋고 그런 선생님들이 들어올텐데요! 맨날 질문해도 답해주는 것도 귀찮아하고, 애들 괴롭히는 거나 좋아한다고요!"

다른 애들한테는 말하지 않은 억울함과 분함을 토해내듯 밥 먹는 것도 잊고는 열심히 작은 입을 놀려 쫑알거리는 연지였다.

그 모습을 보자 잠시 뒤틀렸던 자신의 심보에 자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애들에게는 내비치지 않았던 감정과 표정을 봤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기도했다.






이번 시험에서 국어만큼은 백점을 맞아보이겠다며 열심히 공부를하던 연지는 목표한 분량을 다 해내고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8:20

진욱이 돌아올 시간이었다.

연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까 사 두었던 배구화를 들고 집 밖으로 나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문에서 진욱의 대문까지 1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지만 정원과 상민은 고생많았다고 활짝 웃으면서 연지를 반겨주었다.

"밥은 먹었니?"

평소와 같이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정원이 물었다.

아름다운 얼굴처럼 사랑이 많은 정원은 말씨, 몸짓,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정말 사랑도 많이 받고 사랑이 많다는 것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네."

"요즘은 시험때문에 집에도 자주 안오고해서 걱정이 많았는데 얼굴보니까 잘 챙겨먹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아, 그건 뭐니?"

"아, 진욱이 주려고 하나 샀어요. 집에 있죠?"

"어머, 착하기도하지. 응. 방에 있을 거야. 음료수 좀 가지고 올라가."

연지는 정원이 챙겨준 얼음이 동동 떠있는 차가운 음료수를 가지고 2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 왔다."

연지가 똑똑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자 방금 씻었는지 머리위에 수건을 얹고 있는 진욱이 보였다.

나름 시험기간이라고 침대위에 비스듬히 누워서도 동아시아사 참고서를 보고 있었다.

"왠지 오랜만이네."

"뭐래."

진욱이 쥬스가 올려져 있는 쟁반을 들어다가 침대 옆에 있는 낮은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진욱이 털썩 바닥에 앉자 연지도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다.

"공부하는 데 방해한 거 아니지?"

"공부는 무슨. 그냥 양심상 들고 있는 거지 딱히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아."

"그러면서 시험 점수는 잘나오잖아."

연지가 투덜거리면서 차가운 쥬스를 입에 가져다댔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시원한 기분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집에서는 한울이 계속 뭐라고 하는 바람에 이렇게 얼음까지 들어있는 쥬스를 먹는 것이 반가웠다.

"그나저나 그건 뭐야?"

"아, 맞다. 이거 주러 온거야."

연지가 자신의 옆에 있던 쇼핑백을 건넸다.

진욱이 쇼핑백에서 상자를 꺼내 열고서는 기분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예쁘네."

"응. 예뻐서 샀어."

"오늘 백화점 간다더니 산거야?"

"응. 둘러봤는데 눈의 띄더라고. 시합고 얼마 안 남았고... 배구화 있는 건 아는데 이번 시합 중요한 거잖아. 응원도 할 겸 해서 샀어. 괜찮아?"

"당연하지. 완전 내 취향이야. 고맙다."

빤히 배구화를 쳐다보던 진욱이 씨익 웃으면서 연지의 머리카락을 흐트렸다.

손은 커다랗고 투박하면서도 자신을 머리를 쓰다듬을 때에은 꽤나 부드러운 손길에 연지도 눈을 마주치고는 웃어보였다.

"이럴 때는 또 안심이 된단 말이지."

"뭐가?"

"이제 다 커가지고 이 아빠 품을 떠나서 가버릴까봐 그러지."

진욱이 장난스럽게 눈물을 흘리는 시늉까지 하면서 말하자 연지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사람이나 소개시켜주고 말하지?"

"누구 우정에 금가라고 그런 얘기를 하는거야?"

"이놈이!"

진욱의 말에 연지가 옆에 있던 쿠션을 들어다가 진욱에게 집에 던지고는 헤드락을 걸었다.

'으억!'소리를 내며 아프다고 하면서도 딱히 반격을 하지 않는 진욱이었다.

항복이라고 몇 번이나 진욱이 외치자 그제서야 연지도 팔을 풀었다.

"그래도 너 그거 알지?"

꽤나 오래 친 장난에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려고 노력하면서도 웃고있는 연지에게 진욱이 말했다.

"뭘?"

"과거야 어땠던 간에 지금의 너를 제일 오래 알고, 제일 잘 알고, 제일 많이 생각해주는 건 나라는 거?"

"뭐래~"

징그럽다는 듯 장난스레 인상을 찌푸린 연지였지만 이내 '알지.'라고 대답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부모님의 이야기부터 지금까지 자신과 함께하고 자신을 생각해주는 사람이었다.

"뭐, 우리도 점점 커가고 나한테 예전에 그 애기때처럼 모든 일이나 감정들을 얘기할 수없다는 건 알아. 다들 커가면서 더 많은 비밀이 생기고 자의던 타의던, 자신을 위해서던 남을 위해서던 말할 수 없는 없는 경우도 생기니까."

진욱의 말에 연지의 머릿속에서 한울의 얼굴이 떠올랐다.

죄 지은 것 같기도하고 미안하기도해서 우물쭈물 시선을내리자 웃음소리와함께 진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미안해하라고 한 얘기 하니야. 그냥 그래도 나한테 고민이 있거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도움 청하는 걸 주저하지 않아줬으면해서 말하는 거야."

"....."

"괜히 미안해하거나 폐끼친다고 생각하지 말고 손 벌리라고. 네가 무슨 짓을 벌였어도 네 편 들어줄테니까. 알겠지?"

커다란 손이 다 안다는 듯이 토닥토닥 자신의 등을 두드리자 알 수없는 울컥함이 올라왔다.

".....고마워."






"도대체 왜 갑자기 이러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앳된 소년의 단정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원래 선배님 정도의 경력에 지금 이렇게 한량처럼 돌아다니시는 것이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닙니다만, 딱히 이득도 없어 보이는 일에 그렇게 매달리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도대채 여울 이 녀석은 외형도 어린 녀석이 선배라도 아양떠는 법이 없었다.

"....왠지 뺏길 것같아서 말이야."

연지의 집 지붕위에서 진욱의 집을 내려다보며 한울이 중얼거렸다.

"뭘요?"

"글쎄.... 나도 그건 잘 모르겠는데 확실히 그렇게하면 뺏길 것 같단 말이지."

"그러다가는 직위고 자유고 뺏기지 않으실까 걱정됩니다."

"그러니까 너한테 부탁했던 거잖아. 그렇게 말해도 이미 다 알아본 거 아니까 어떻게 됐는지나 알려줘."

한울의 말에 옅은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냥은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래?"

"네. 딱히 선배님이 예쁨 받는 것도 아니고요."

"뒷 말은 안해도 돼."

"다른 건 아니고 근처에 있는 특히 병원 쪽에 있는 회수 되지 않은 악령들을 회수해주셔야 합니다."

여울의 말에 한울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여지껏 아무 말 없었으면 힘 없는 녀석들인 거 아니야?"

"그렇긴 합니다만 워낙 수도 좀 있고, 무엇보다도 혹시 그 분의 냄새를 맡고 강한 녀석들이 왔을 때 흡수해서 자신의 힘을 늘릴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지.... 알았어."

한울의 수긍의 말에 휴대폰 너머에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할 말 없으면..."

"진짜 그렇게 하실 겁니까?"

"왜? 위에서 뭐라고 많이 그러냐?"

"그런 거는 선배님 밑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항상 있던 일이라서 상관 없습니다만,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요. 경계같은 거 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을 거고요. 아무래도 기운을 느끼는 데에 제약이 크니까요."

"그렇긴 하지. 그래도...."

한울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아무래도 뺏길 것 같아서 말이지."





"하아..."

한울과의 통화를 끝낸 여울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하. 그래서 결국 한데?"

언제 들어온 것인지 남자가봐도 매혹적이게 웃으며 옥황상제가 물었다.

"예."

"역시~"

알고 있었다는 듯 콧노래를 부르며 차를 마시는 옥황상제에 여울이 살짝 불안해졌다.

"그런데 악령은 왜 조건으로 거신 겁니까? 그건 우리들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부분인데요."

"그렇긴하지."

옥황상제가 여울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래도 그 성격에 후배를 잘 둔 건지 마음을 잘 얻은건지 걱정이 많은가 보지? 게다가 내가 이해도 안 되는 조건까지 내밀고."

"....."

더 이상 읽히고 싶지 않다는 생각 반, 괜히 입을 열었다가 한울이 더 곤란해질 것 같은 걱정 반으로 여울이 입을 꾹 다물었다.

"흐흥~ 선배보다 더 똑똑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여하간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내가 그 녀석을 좀 많이 괴롭힌 건 인정. 그래도 어쨌든 저승사자들 모두 내 사람들인데 내가 망하라고 제사지내지는 않아."

"......"

의중을 알 수 없는 표정과 말에 여울은 여전히 무표정을 고수했다.

"똑똑하기는 한데 재미있지는 않네. 하긴 저승사자가 재미있어봤자 뭐하겠어, 그치?"

옥황상제는 싱글싱글 웃음을 띄고 일어나서 여울의 앞에 섰다.

그리고 여울의 토닥토닥 몇 번 두들겼다.

"그렇게 경계하지 말라구, 나 은근히 상처 많이 받는 타입이라서 말이야. 내가 이렇게 하는 건 공평하게 하기 위해서야. 그 녀석만큼이나 내가 신경쓰고 아끼는 녀석이 있어서 말이지. 그 녀석에게도 전생에는 감히 손에 쥐어볼 생각조차 못했던 기회라는 걸 주고 싶어서 그러는거야."

그는 다시 한 번 그 사람 홀리는 듯한 고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것이 마냥 예쁘기보다는 위험한 맹수의 것인 것 같아 여울은 긴장을 풀지 못했다.

다음에는 웃는 낯을 보여달라고이야기하며 상제가 문을 닫고 나가자 그제서야 참았던 호흡을 내뱉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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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8-25 10:14 | 조회 : 1,337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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