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선물

한울은 공중에 둥둥떠서 체육관 위에 나 있는 창으로 안을 바라보았다.

체육관 안에는 얼마 남지 않은 시합을 위해 수업시간에도 잠시 나와 훈련을 하고 있는 학생들이있었다.

한울의 그 중에서도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는 진욱을 쫓았다.

대체로 실내에서 훈련을 하기 때문에 하얀 피부를 지닌 다른 학생들과 다르게 약간은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지고 있는 진욱은 키도 또래보다도 훨씬 큰 편이었고 체격도 다부졌다.

훈련을 하는 모습을 오래 지켜본 것도 배구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체격조건이 아깝지 않은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키가 큰 탓에 블로킹에 유리하기도했고 힘도 좋은 데다가 스파이크를 할 때 상대보다 위에 있으니 공격하기에 유리했다. 뿐만 아니라 커다란 몸과는 다르게 꽤 빠른 편이었고 수비에서도 안정적임을 느낄 수 있었다.

"흠..."

마음에 드는 녀석은 아니었지만 괜찮은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 아까부터 코치도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진욱을 주시하고 있는거겠지.

하지만 여전히 마음에 드는 녀석은 아니었다.

저 놈이 운동을 잘하던 못하던 그것은 하등 자신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자신에게 영향을 준 것이라고 한다면 그날 이후 계속해서 거슬리는 태도였다.

혹시나 해서 말도 시켜보고 툭툭 건들이고 찔러보기도 했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확실히 그냥 귀신도 아니고 저승사자인데 생사의 기로에 서있거나 죽지 않은 이상 자신이 느껴지거나 보일리 만무했다. 기가 세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귀신의 기운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자신이 보이는 것처럼 기분나쁜 표정을 짓는다던가 연지가 들리지 않게 작게 욕을 읊조린다던가 갑자기 쾅쾅 문을 닫아대 고통을 주는 탓에 기분이 나빴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마음에 안든단 말이야."

팔짱을 끼며 한울이 중얼거렸다.

무엇보다 기분은 언짢게 만드는 것은 진욱과 연지의 사이에 자신이 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진욱이 찬가운 음료수를 연지에게 권하고 요즘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딱 붙어있을 때에도 자신은 연지에게밖에 보이지 않으니 연지가 곤란할 까봐 뭐라고 한 마디 할 수도 없었다.

해도 진욱이 들을 수 있을리도 만무했고...

'어쩐담.'

어찌되었건 간에 며칠간 둘을 지켜보면서 내린 결론이 있다면 자신이 비록 저승사자이기는하지만 현재 연지의 보호자로써 계속 이렇게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진욱이 케이크를 들고 온 다음날도 다 큰 남자친구랑 그렇게 있는 건 위험하다는 식으로 은근히 이야기했지만 연지는 전혀 신경쓰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살포시 고운 미간을 구기고 톡톡 기다랗고 하얀 손가락으로 창틀을 치던 한울은 이내 무언가 생각난 것인지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서둘러 수트 안 쪽에서 핸드폰을 꺼내서 단축번호 1번을 꾸욱- 눌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신호음이 얼마 가지 않아서 엣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게 아니라 부탁을 좀 할 게 있어서...."






"이제 다음주에 시험이지? 코앞에 시험이 있으니까 다들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오늘은 자습하고 모르는 문제 있으면 와서 물어봐."

수학 선생님은 그렇게 말하고는 교탁 옆에 있는 컴퓨터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주섬주섬 책상 서랍에서 공부할거리들을 꺼내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연지 역시 펜을 들고 수학문제를 풀어나갔다.

수시 원서를 넣을 때 들어가는 마지막 시험이다보니 몇몇 아이들은 상당히 긴장을 하고 있는 분위기였다.

모두 열심하자는 분위기에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며 한 페이지 넘게 꽤 집중을해서 문제를푸는데 옆자리에 앉아있던 서연이 샤프로 톡톡 문제집을 두드렸다.

'왜?'

연지가 입모양으로 작게 묻자 서연이 연지의 문제집에 사각사각 글씨를 써내려갔다.

[다른 건 아니고 시험 끝나는 마지막 날에 훈이랑 나랑 1년 되는 날이잖아. 선물 살까 해서 오늘 같이 가줄 수 있어?]

그러고보니 다른사람들을 닭으로 만드는 이 커플이 만난지도 벌써 일년이 되가고 있었다.

새삼스레 세월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처음에는 서로 눈만 마주쳐도 얼굴을 붉히던 아이들이 이렇게 될 줄을 그때는 아무도 몰랐었다.

'둘 다 얼굴이 새빨게져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진욱이랑 나만 쳐다볼 때도 있었는데.'

[알았어]

왠지 다 키운 자식들을 돕는 마음이 들어 연지가 미소를 지으며 글자를 써내려갔다.

[고맙. 시험 끝나면 언니가 맛있는 거 사줄게]

[완전 맛있는 거 먹을거야]

엄지를 척 올리며 입꼬리를 올리는 서연을보며 연지도 살풋 웃음을 지어보였다.






"오랫만에 나오니까 좋네~"

수업이 끝나고 버스를타고 백화점 앞에 도착하자 기지개를 쫙 펴며 서연이 말했다.

"오랜만은 무슨. 맨날 주말마다 데이트한 거 누가 모를 줄 알아?"

"언니 말에 계속 토 단다? 평일에는 훈이 기다리느라 이렇게 밖에 못 나왔었단 말이야."

오랫만에 공부도 하지 않으면서 자리만 지키고 있었던 야자시간에서 해방된 서연이 싱글싱글 미소를지었다.

"그런데 뭐 살려고?"

"글쎄.... 사실 뭘 사줘야 할 지 잘 모르겠어서. 그냥 지갑이나 옷? 로션같은 거 사주려고했었는데 별로 인 것 같고. 뭘 사야할지 잘 모르겠단 말이지... 워낙 자기 얘기하는 거 좋아하지도 않아서 뭐가 필요한지도 모르겠고."

"그렇긴 하다. 그리고 뭐랄까? 좀 부족한 게 없어보이는 느낌이지?"

연지의 말에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정한 이목구비에 공부까지 잘하는 소위 엄친아인 훈은 딱히 무엇이 부족해보이지도 필요해보이지도 않았다.

고급스럽게 생긴 것 답게 집도 잘 사는지 항상 꽤 고가의 물건만 가지고 다니는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입으로 무엇을 가지고 싶다던가 하는 얘기는 지나가는 얘기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럼 아예 훈이가 안 쓰는 걸 사야하나? 그러다가 또 필요 없어서 처치 곤란하면 문제이긴한데..."

서연은 걱정이 많이 되었다.

항상 자신에게 다정하고 친절한 남자친구인 훈은 자신이 필요한 것 원하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채고는 해주었었다.

이번에는 자신도 훈이 좋아할만한 것을 해 주고 싶어서 용돈도 착실히 모았고 훈이 모르게 새벽 시간에 아르바이트도했었는데 도무지 뭘 사야할지 감이 잡히질 않으니 문제였다.

"진욱이 한테는 물어봤었어?"

"물어봤었지."

서연이 허-하고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뭐라고 했는데?"

"자기도 딱히 그 놈이 필요한 건 모르겠는데 사랑이 가득 담겨있으면 된데. 사랑이면 된다고. 걔는 그렇게 안 생겨서 그런 얘기를 잘도 한단 말이야. 그것보다 사랑이야 넘치도록 충분하다고. 내가 해주고 싶은 거는 물질적인 거라고."

서연의 말에 연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향수 좀 볼테니까 너는 신발매장가서 괜찮은 거 있나 좀 봐주라."

"알았어."

연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향했다.

천천히 훈이에게 어울릴만한 신발이 있는지 보면서 걷는데 스포츠화 위주의 화려한 색깔의 신발들이 즐비한 가운데서 훈에게 어울리는 신발을 찾긴 어려웠다.

괜찮은 구두들도 있긴 했지만 딱히 뭐가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었다.

그렇게 고개를 저으며 한바퀴를 다 돌려는 찰나에 예쁜 배구화들이 눈에 띄였다.






노랑 흰색 빨강 세가지 색깔의 배구화는 그냥 일상생활에서 신어도 될 정도로 디자인도 그렇게 튀지 않으면서 예뻤다.

"누구 사다주게?"

하나 사다줄까 고민하는데 갑자기 옆에서 들리는 소리에 연지가 살짝 움찔했다.

역시나 한울이었다.

"그래도 많이 적응이 됐나보네? 소리도 안 지르고."

'방금 지를 뻔 했잖아요!'라고 말하려던 연지는 한숨을 내쉬고는 살짝 입술을 삐죽였다.

이런 데서 소리 질렀다가는 결국 자신 혼자 이상한 사람이 될 게 뻔했다.

"이거 남자 신발같은데 네가 신을 건 아닌 것 같고... 선물 맞지?"

"진욱이 하나 사줄까해서요."

사람이 있는지 고개를 돌려 확인한 연지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 배구하는 애인데 배구 신발 많을 거 아니야."

"그래도 응원할 겸 하나 사주려는 거죠."

연지는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배구화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 다른 배구화들보다 예쁘기도 하고 슬쩍 들어보니 가볍기도 한 게 좋을 것 같았다.

"차라리 날 사주는 게 낫지 않나..."

중얼거리듯 한울이 말했다.

"딱히 걷지도 않으시잖아요. 맨날 구두만 신으시는 것 같고. 그게 원래 규정된 복장이라면서요."'

연지는 배구화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작게 답했다.

"안녕하세요~ 배구화 보시는 거에요?"

중얼중얼거리는 연지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으며 여직원이 다가왔다.

"아..네."

"이게 이번에 새로나온 제품이에요. 보시다싶이 디자인도 좋지만 가벼워서 아마 신고 활동하시기에 좋을 거에요. 색상도 다양한 편이구요. 다른 제품들보다 탄력성도 좋고 잘 미끄러지지도 않아요."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 여직원의 말에 연지가 마음을 굳혔다.

"음...."

경기복이 원래 하늘색이었으니까....

"그럼 흰색으로 주세요."

"사이즈가 어떻게 되시나요?

"290이요."

고민도 하지 않고 웃으면서 결제를 하는 연지의 모습을 한울이 살짝 찡그린 얼굴로 지켜보았다.






고마워서 그렇다며 집 앞까지 데려다 준 서연과 헤어지자마자 한울이 나타났다.

"선물은 잘 샀어?"

현관에 들어서며 한울이 연지의 손에 들린 두개의 쇼핑백을 흘끗 쳐다보고서 물었다.

아까 친구랑 같이 향수를 고른다고해서 자리를 피한사이에 또 무언가를 산 모양이었다.

"네. 그래도 향수가 나을 것 같다고해서요. 딱히 훈이가 향같은 거 가리는 것 같지도 않고해서 그냥 어울릴 것 같은 걸로 골랐어요."

"잘했네. 바로 씻을거야?"

"네."

"그럼 식사준비하고 있을게. 씻고 바로 내려와."

"저기!"

싱긋 웃고 부엌으로 향하는 한울을 연지가 불러세웠다.

"왜?"

"이거 집에서 입으라고요. 얼굴도 하얀데 맨날 검은 옷만 입는 건 좀 칙칙한 것 같아서 샀어요."

쇼핑백을 한울의 품에 안겨준 연지는 서둘러 계단을 올라갔다.

당황한 듯 잠시 멍하니 서 있던 한울이 정신을 차리고 쇼핑백을 열어보자 편하게 입을 수 있을 만한 몇가지 티가 들어있었다.

얼음이 녹는 것 처럼 당황으로 굳어있던 표정이 사르르 녹고 부드러운 미소가 얼굴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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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8-25 10:13 | 조회 : 1,431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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