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섬뜩한 위험

기분이 안 좋을 수록 많이 먹어야한다며 채근하는 서연이 때문에 평소보다 더 소복히 쌓인 급식판을 손에 쥔 연지가 고개를 들자 자신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훈과 진욱이 눈에 들어왔다.

"훈아~~"

콧소리를 내는 서연을 보며 살짝 한숨을 쉰 서연이 뒤를 따라 진욱의 옆에 앉자 진욱이 연지를 빤히 쳐다봤다.

"....무슨 일 있어?"

"아니 괜찮...."

걱정이 담긴 진욱의 표정에 아니라고 대답을 하려는데, 또 언제 들었는지 표정을 싹 바꾼 서연이 연지의 말을 끊었다.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진짜 선생님만 아니면 콱!! 어디가서 패기라도 하는 건데."

자신의 일인양 씩씩 거리며 말하는 서연의 손에 훈이 살포시 자신의 손을 겹쳤다. 그리고는 진정하라는 듯 눈을 마주치고는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그러자 크게 한 번 숨을 뱉어낸 서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여튼 괜찮지 않아. 그 선생이 또 연지 건들였다고."

돈가스가 아까 그 선생님이라도 되는냥 푹하고 찍어 입에 넣으며 서연이 말했다.

"무슨 일 있었는데?"

구겨진 표정의 진욱이 물었다.

"아니, 그 망할 대머리 새끼가...."

참으려고 노력하는 듯 한 번 입을 열자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마구 비속어를 내뱉으며 아까 있었던 일을 설명하는 서연이었다.

몇 번 서연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던 훈도 이내 포기하고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연지를 바라봤다.

'괜찮아?'

입 모양으로 자신에게 물어오는 훈에 연지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반 이상을 남긴 연지를 사람이 거의 없는 학교 뒷편 벤치로 데려온 것은 진욱이었다.

잠시 기다리라고하더니 뻘뻘 땀을 흘리면서 멀리있는 매점에서 사가지고 온 것은 초코우유였다.

"마셔."

이상한 놈 만났을 때에는 달달한 것이 최고라고 덧붙이며 빨대까지 꽂아 자신에게 건네는 우유를 받아든 연지가 홀짝 한모금 들이마셨다.

그제야 슬쩍 미소를 지어보인 진욱도 우유 하나를 까더니 꿀꺽꿀꺽 순식간에 마셔버리고는 또 다른 하나를 까며 자리에 앉았다.

"풋."

약간 까무잡잡한 피부에 체격도 좋아서는 꿀꺽꿀꺽 초코우유를 먹는 모습에 연지가 웃음을 터뜨렸다.

여튼 어린시절이나 지금이나 외형만 바뀌었지 성격도 입맛도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왜 웃어? 너는 그러고도 웃음이 나와?"

민망한지 툭하고 연지의 머리를 밀며 진욱이 말했다.

"뭐 나만 괴롭히는 것도 아니고...."

"허유~ 진짜. 너는 정말 그런 놈이 뭐라고 하면 욕이라도하던가 순해빠져가지고."

진욱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김서연 걔는 니가 화내지 않는 선에서 무슨 짓이든 하겠다고 이 바득바득 갈고있었잖아. 봤지? 걔 누구 하나 죽일 기세였던 거? 진짜 내가 친구라 다행이지 안그러면 무서워서 이 학교 못 다녔을지도 몰라. 힘은 또 얼마나 쎈지 아직도 코치님이 쟤 데려오라고 난리잖아. 내가 말려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오늘 우린 다 정학 정도는 각오했었을지도 모른다? "

쳐져서 발끝으로 톡톡 바닥을 치고 있는 연지가 걱정되어 진욱이 평소라면 쓸데 없는 소리라고 했을 이야기들을 계속 늘어놓았다.

신경 안쓰려고 했지만 신경 쓰이는 것도 사실이고, 괜찮은 척하지만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어린나이에 부모님을 잃으면서 그것이 멸시든 동정이던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고, 진욱의 부모님께 친 부모님같은 사랑을 받았지만 알게 모르게 움추러드는 경우도 많았다.

속상하기도하고 억울하기도했는데 자기를 생각해서 얌전히 있어준 일하며 자신들의 일보다 더 열을 내며 욕해주는 진욱과 서연에 기분이 좋아져 푸스스 웃음이 새어나왔다.

"어쭈. 이젠 하다하다 웃냐?"

진욱도 웃으면서 연지의 머리를 마구잡이로 흐트렸다.

연지도 이에 질새라 손을 올려 진욱의 머리를 헤집었다.

그렇게 몇 번 장난을 쳤을까 연지와 진욱이 눈이 마주치자 다시 푸스스 웃었다.

진욱은 조근조근, 다정하게 말하는 것은 서툴지 몰라도 자신이 힘들때 누구보다 그 상처를 잘 알아봐주고 돌봐주는 친구였다.

거창한 얘기를 해 준 것도 부드러운 위로의 말을 건넨 것도 아니지만 연지는 아팠던 마음이 살살 달래지는 것이 느껴졌다.

"어이!!~~ 한진욱이!!! 코치님이 부르신다!!!!!"

둘다 웃다 지쳐 널부러져 앉아있는데 건물의 끝에서 한 남학생이 큰 목소리로 진욱을 불렀다.

"아, 오늘 병원가기 전에 코치님 뵙기로 한 거 깜빡했다. 이거 이따라도 배고프면 꼭 뭐 사먹고, 배 안고파도 뭐라고 사먹어. 알았지?"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진욱이 그 와중에도 주머니에서 꺼낸 돈을 연지의 손에 쥐어주면서 말했다.

"알았어."

자신의 대답을 듣고나서야 다친 다리로 열심히 멀어져 가던 진욱의 뒷모습을 초코우유를 쪽쪽 빨아먹으며 보던 연지는 진욱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되자 다시 앞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푸우!!!!"

기척도 없이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한울에 깜짝 놀라 초코우유를 뿜어버렸다.

다행히도 엄청난 속도로 우유세례를 피한 한울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켈룩대는 연지의 등을 두들겼다.

"아이고~ 왜 이렇게 놀라? 귀신 본 것도 아니고?"

한울이 건네주는 검은색 손수건을 받아들며 연지가 슬쩍 흘겨보았다.

"비슷한 거 본 거 잖아요."

"비슷한 거라니?"

연지의 말에 한울이 말도 안된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완전 상처다. 내가 완전 다른 거라고 얘기했잖아."

한울이 작게 투덜거리며 연지의 옆에 앉았다.

"아까 슬쩍 보니까 밥도 제대로 안 먹는 것 같아서 일단 집에서 따뜻한 차랑 샌드위치 좀 가져왔어."

그리고는 일 년에 몇 번 쓸까말까한 분홍색 보온병을 열어 김이 모락모락나는 유자차를 내밀었다.

"지, 지금 여름인데요?"

"여름인 거 누가 몰라?"

"그건 너무 뜨거울 것 같은데...."

연지를 따라 살짝 인상을 찌푸린 한울은 연지가 들고있던 초코우유를 뺏어 자신의 입에 들이붓고는 연지의 손에 유자차를 쥐어줬다.

"다 마시라고 안 해. 한 잔만 마셔. 여름이라고 차가운 거 마시다가 배탈난다?"

한울은 그렇게 말하며 분홍색 도시락 통을 열었다.

어디 딸이랑 첫 소풍이라도 가는 것 마냥 치즈와 햄 으깬 달걀을 야무지게 넣은 샌드위치를 예쁘게 한 입 거리로 잘라 예쁘게도 담아왔다.

"괜찮은데...."

괜히 미안하기도하고 어색하기도해서 말꼬리를 늘리자 그 틈을 타 한울이 샌드위치 한 조각을 연지의 입에 넣었다.

"씁. 빨리 먹어. 차도 마시고. 이열치열 몰라? 이열치열? 여름이라도 괜히 찬거 마시면 탈나고 그런거야. 빨리 마셔."

결국 소리 없는 협박에 못 이겨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샌드위치와 유자차를 다 해치우고 나서야 교실로 돌아갈 수 있었다.






오전에 안 좋은 일이 있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집에 가면 공부를 안 할 것 같기도하고 괜히 친구들을 걱정시킬 것 같기도해서 야자시간에 남은 연지였다.

석식을 먹고도 진욱의 부탁을 받았다며 훈과 서연이 먹으라도 내미는 빵과 간식들로 배를 가득 채우니 야자 2교시는 더 나른하고 노곤했다.

감겨오는 눈에 아까의 분노를 담아서 풀어내리던 문제집에서 눈을 떼고는 슬쩍 교실을 둘러봤다. 다른 반과는 다르게 자유로운 분위기라 반 이상의 학생들이 빠진 널럴한 교실에는 열심히 공부하는 애들부터 침까지 질질 흘리며 고개를 가누지 못하는 애들까지 그 종류가 다양했다.

그런 아이들을 천천히 눈에 담으며 시선을 옮기는데 순간 마주친 눈 때문에 연지가 움찔했다.

창틀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눈은 흰자가 보이지 않았는데 자신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반달모양으로 휘어졌다.

순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쫘악 끼쳤다.

갑자기 시간이 얼어붙은 듯 느껴졌고 누군가 몸을 얼려놓은 듯 숨 한번 내쉬고 눈 한 번 깜빡하는 것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눈을 피하지 않고 빼꼼 얼굴을 더 내미는 아이는 냉기가 느껴질정도로 푸른 입술을 귀까지 한껏 끌어올린 채였다.

잔뜩 얼어있던 연지가 정신을 차리고 입을 떼려는 찰나 아이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잘못봤겠지... 잘못봤을거야. 아까 안 좋은 일도 있었고 졸리고 하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어.'

연지는 급작스레 미친듯이 쿵쾅거리며 움직이는 심장을 애써 외면하며 문제집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 몇 번을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창 쪽을 바라봤지만 아까 그 아이는 커녕 시원한 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고단했던 야자가 끝나고 신나서 뛰어나가는 아이들의 무리에 연지와 서연 그리고 훈도 합류했다.

서연과 훈이 데려다준다고했다며 한울을 설득해 셋이 가는 길은 저번처럼 무서운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나저나 우리 남자친구는 이렇게 학교 끝나고 봐도 너무 잘생겼단 말이야? 맨날 맨날 더 잘생겨지는 것 같아."

"너도 너무 예뻐. 오늘도 공부 열심히했지?"

"응, 근데 역시 네 생각이 나서 힘들긴했어."

'뭔 네 생각이 나긴 나. 자다가 화장하느라 바빠서 공부 못한거지!'

물론 팔장을 끼고 꼭 붙어서 닭털을 폴폴 날려대는 커플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지만 말이다.

조금은 짜증나지만 예쁜 커플 한 쌍을 밉지 않게 흘겨보던 연지가 골목을 빠져나와 집 앞 몇발자국 근처에 다다르자 두 사람 앞을 막아섰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늦었는데 어서 가봐."

어서 가라는 식으로 손을 훠이훠이 내젔자 서연이 피식 웃으면서 연지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오냐. 잘 자고 내일보자."

"그래, 너도 오늘 많이 피곤했을텐데 어서 들어가서 씻고 쉬어."

"응응. 고마워."

베시시 웃으며 두 사람이 골목길로 들어가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기다리던 연지가 약간 들뜬 기분에 괜시리 책가방을 한 번 다시 고쳐매고는 집으로 향했다.

집 앞에 있는 대문을 열고 옅은 불빛 말고는 깜깜한 어둠이 내려앉아있는 작은 정원을 가로질르며 흥얼흥얼 바닥을 보며 걷던 연지가 싸한 기분에 고개를 들었다.

"........."

자신의 현관문 앞에는 아까 봤던 그 꼬마 아이가 좀 전보다 더욱 섬뜩한 모습으로 웃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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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8-25 10:12 | 조회 : 1,616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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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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