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생기사귀

울려퍼지는 비명소리를 뒤로하고 집에서 나온 연지는 혹시라도 한울이 따라올까 흘끔흘끔 뒤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쫓아오지 않길 바랬어도 아픈 모습을 보고 그냥 나온 것도 신경쓰였고 아까 보니 무슨 일이 있어도 지구 끝까지 따라올 기세였는데 보이지 않으니 왠지 더 불안해졌다.

"뭐하는거야?"

연지를 따라 슬쩍 뒤를 보고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한 진욱이 물었다.

"응?"

"뭘 그렇게 흘끔흘끔 보는거냐고."

자신의 질문을 못들은듯 되묻는 연지에게 진욱이 다시 또박또박 물었다.

"아,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당황한 연지가 얼버무리며 지나치려고하자 진욱이 연지의 팔을 잡고는 앞으로가 연지를 막아섰다.

"아무래도 수상하단 말이지."

진욱이 살짝 가늘게 눈을 뜨며 연지를 바라봤다.

"뭐가?"

자신의 당혹감을 숨기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연지가 물었다.

"옆에서 안 챙겨주면 밥은 커녕 물도 제대로 안 마셔서 살이 빠지는 애가 무슨 일이지 볼살도 포동포동하니 멀쩡하고."

진욱이 연지의 한쪽 볼을 몰랑몰랑 주무르면서 말했다.

"아니, 뭐."

"뭐?"

역시사 눈썹을 살짝 올리며 그냥 넘어가주지 않는 진욱의 모습에 연지가 살짝 한숨을 쉬었다.

엄마도 이렇게 꼬치꼬치 캐 묻는 엄마가 없었다.

"네가 저번에 그랬잖아. 내가 귀신같은 거 본게 다 기가 허해져서 그렇다고. 그래서 밥도 꼬박꼬박 챙겨먹고 보약도 제때제때 먹고 그랬더니 이런다 왜."

"그때 진짜 무서웠기는 무서웠나보네. 정신도 차리고. 앞으로도 나 없다고 밥 거르지 말고 밥 제때 챙겨먹어라~"

"뭔 소리래. 알았어."

자신의 머리를 살짝 흐트리고 먼저 걸음을 옮기는 진욱의 옆으로 달려 같이 발걸음을 맞추며 연지가 대답했다.

"그리고 나 오늘 병원가봐야하니까 오늘은 꼭 김훈이랑 김서연한테 데려다달라고해. 또 저번처럼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아, 아니 그정도는 아닌 것 같아. 저번에도 헛 것이라고 했잖아. 나 혼자 가도 돼. 밥도 잘 챙겨먹고해서 이제...."

"위험해."

"어?"

자신의 말을 딱 잘라 단호하게 말하는 진욱에 깜짝 놀라 연지가 진욱을 쳐다봤다.

운동을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워낙 덩치나 얼굴이 다정과는 거리가 멀게 생긴것도 있고 실질적으로 말투도 세심하고 부드러운 편이 아니긴 했었지만 확실히 진욱은 다정한 축에 속했다.

귀찮은 척하면서도 항상 이야기를 들어주고 걱정해주는 타입이었지 잔소리라도 말을 쉽게 끊지 않았다. 이렇게 딱딱하게는 특히.

"저번에 위험했다고. 헛것이라고해도 너가 겁먹어서 큰일 날 뻔 했던 건 맞잖아."

워낙 표정이 다채롭지 못한 녀석이기는하나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이 근 20년간 함께하고 있는 친구로서의 촉이 확실히 기분이 안좋다고 이야기하고있었다.

"그리고 친구로서 그정도는 해줘도 당연한거고, 해주고 싶은 거니까 괜히 땅파지 말고 그냥 받아. 저번에도 내가 나간거 그녀석들이 걱정해서 연락와서 그런거라는 건 알지?"

자신에 대한 걱정과 충고가 뒤섞인 말에 연지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교실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조례시간에 선생님과 함께 해맑게 들어와서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한울의 모습에 연지는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자신과 눈이 마주쳤을때 손을 흔드는 것 빼고는 딱히 말을 걸거나 곤란하게 만들지 않고 복도나 교실 뒷편에서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 태도에 점점 경계심과 긴장감이 풀려버린 연지는 4교시 국어시간 머리카락이 가장자리만 남은 선생님의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야....야...!!"

옆에서 서연이 점점 눈을 다시 뜨는 텀이 길어지는 연지를 향해서 작게 소리를 냈지만 연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우개도 던져보고 쪽지도 날려보고해도 안돼 뒷 자리 애한테 도와달라고 할랬더니 똑같이 자고 있는 행태에 열이 확 뻗혀오는 걸 느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서연이 조심조심 몇 번이나 연지를 깨우려고 노력하던 그 때 연지를 발견한 선생님이 불쾌한 표정으로 연지를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이제는 눈을 다시 떠야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게되어버린 연지의 책상을 쾅쾅!!! 소리를 내며 때리자 연지의 눈이 번쩍 떠졌다.

"......!!"

눈을 떠서 국어 선생님의 얼굴을 확인한 연지의 얼굴에는 낭패감이 서려있었다.

서연역시 소리 없이 이를 물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이 없어도 그렇지 지금 잠을 자?!! 공부라도 열심히 하려고나 해야지!"

원래 평판이 안 좋은 분이었다.

성추행이니 여학생 도촬이니 안그래도 안좋은 이야기가 따라붙는 사람이었다. 실질적으로 그런 일을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음흉하고 더럽고 야비한 그의 성품 때문에 돌며 씹히는 이야기이기도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연지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을 정말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다는 데에 있었다.

지금도 자신을 제외하고도 반 아이들의 반 이상이 숙면중인 이 상황에서 자신을 콕 찝어서 혼내는 것을 보면 답이 나오는 일이었다.

심지어 그 중 한명은 자신의 뒤에 있는데 말이다.

항상 자신이 사소한 잘못을해도 소위 찍힌 이상 그냥 넘어가주는 일이 없기에 특히 국어 수업에서는 자지 않고 시험이며 숙제도 잘 준비하는 편이었는데, 긴장이 풀리면서 몰려오는 수마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하여간 작년부터 너는 항상 문제였지. 괜히 멀쩡한 친구들까지 안좋은 물 들이려고하고 말이야."

계속되는 국어선생님의 말에 서연의 얼굴이 잔뜩 굳어져갔다. 그리고 뭐라고 입을 열려는데 연지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부모님도 안 계시고 딱히 튀는 성격도 아닌 자신을 어찌 하면서 괴롭히려던 심산이었는데 괜찮게 사는 애들이 주위에 붙어 경찰서 근처까지 갔으니 당시에는 조심하는 듯 했어도 저 성격에 그 분노가 조용히 사그러들리는 없었다.

"아마도 이렇게 국어시간에 쳐 자는 것 보면 국어에 상당한 자신감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 그럼 어디 칠판에 나가서 '생기사귀' 한자로 써봐. 제대로 쓰면 이번은 넘어가주겠지만 못 쓰면 교무실로 내려와서 벌점이나 교내봉사정도는 기본으로 각오해야할거야."

먹잇감을 물은 맹수같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연지를 향해 말했다.

소란스러움에 눈을 뜬 아이들의 눈에도 동정심이 어렸다.

사자성어의 뜻을 풀이하라는 것도 아니고, 한자까지 외우고다니는 학생이 요즘 시대에 몇 명이나 있겠는가. 게다가 수능 문제에 잘 나오는 흔한 사자성어도 아니고 들어보지 못한 외계어인데.

"빨리 안 일어나?"

다시한 번 매섭게 몰아치는 말투때문에 놀란 연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칠판쪽으로 다가갔다.

"분필 잡아!"

칠판앞에서 쭈뼛거리는 연지에게 다시 한 번 호통이 떨어졌다.

떨리는 손으로 분필을 잡아쥐었지만 자신이 그 답을 알리가 없지 않는가.

하지만 괜시리 시간을 시체했다가는 선생님 호통 뿐만이 아니라 서연이가 나서서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무엇이라도 써내려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손을 들어올렸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분필을 칠판에 가져다대는 순간에 갑자기 손에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쉿. 아무 소리 내지 말고 가만히 앞에 보고 손에 힘 빼."

자신의 손을 포개어 잡은 새 하얀 고운 손에 순간 놀랐지만 왠지 모를 안정감이 느껴졌다.

한울의 말대로 손에 힘을 빼자 자신의 손을 감싼 한울이 거침없이 한자는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生寄死歸]

이내 한자를 모두 쓴 한울의 손이 연지에게서 떨어져나갔다.

슬쩍 한울을 쳐다보자 한울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이 왠지 칭찬을 바라는 멍멍이 같아서 마주 웃으려는데 울그락 불그락해진 얼굴을 한 선생님이 다시 듣기 싫은 목소리를내었다.

"뜻은 뭐지?"

반 아이들은 징하다는 듯 고개를 젓거나 한숨을 내쉬었다.

반항하거나 대적하고 싶은 마음도 안생기는 미친놈 중에 미친놈이었다.

"생기사귀. 산다는 것은 이 세상에 잠깐 머물러 있다는 것이며"

한울이 어깨를 감싸안으며 말하자 연지가 달싹 거리던 입을 열었다.

"생기사귀. 산다는 것은 세상에 잠깐 머물러있다는 것이고"

연지가 잘 따라오자 한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죽는 다는 것은 돌아간다는 것을 뜻해."

"죽는 다는 것은 돌아간다라는 뜻입니다."

뜻까지 완벽히 풀이한 연지에게 칭찬을 해주기는 커녕 인상만 구기고 있던 선생님은 때마침 점심시간 종이 울리자 굳은 얼굴로 책을 들고 연지를 어깨도 툭 치더니교실을 벗어났다.

"생긴 것처럼 성격도 뭣같네 진짜."

문이 닫치자 욕설을 중얼거리며 서연이 다가왔다. 이에 한울은 어깨를 감싸앉은 팔에 한번 살짝 힘을 주고는 연지에게서 떨어져 교실에서 나갔다.

"허우~ 진짜 썩을 놈이지 세상이 말세긴 말세야. 저런게 선생질이나하고. 괜찮아?"

"그러니까. 괜찮아?"

"문제 맞춰서 다행이지. 못맞췄어봐. 으으~~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그나저나 그건 또 어떻게 알았냐. 천재야?"

서연이를 시작으로 반 아이들이 밥을 먹으러가기전 한마디씩 거들었다. 연지는 괜히 걱정시킬까싶어 어제 사자성어책에서 본건데 자신도 맞출 줄 몰랐다고 맞장구를치며 웃어보였다.

"어휴~ 이럴 땐 먹어야돼. 가자. 그놈이라고 생각하고 와작와작 씹어먹어야지."

실컷 욕설을 내뱉었는지 자신의 손을 이끄는 서연에 연지가 그러다가 살쪄서 훈이한테 차인다며 장난스레 웃어보였다.


'쯧. 부모가 없으니 버릇도 없지 진짜.'

하지만 아까 떠오른 과거의 일이 재상영되자 연지의 얼굴이 다시 한 번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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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8-25 10:11 | 조회 : 1,387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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