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의문(2)

커다란 주택가들이 드문드문 들어서있는 동네는 어둠과 함께 적막이 내려앉았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 아무 소리도 없이 연지의 방문 앞에 서있던 한울은 조용히 문을 통과해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달빛과 옅은 가로등 빛이 조심스레 물들이고 있는 연지의 방은 간간히 들어오는 풀벌레들 소리 이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보통 인간이었다면 허우적 거릴만한 어둠이었지만 고개를 돌려 단번에 연지를 찾아낸 한울은 흰색의 이불이 덮여져 있는 커다란 침대로 가다갔다.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서 색색 작은소리를 내고있는 연지의 옆에 걸터 앉아 연지를 바라보던 한울은 연지를 향해서 손을 뻗었다. 흩어져있는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쓸어넘기자 목 밑에 자그만한 검은색 문양이 보였다.

한울은 그 검은색 문양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10년전 그 날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를 정도로 아슬아슬하고 위험해보였는데 지금 자는 모습은 세상 어디에도 볼 수 없을 정도로 평온해보였다. 얼굴은 그 때랑 별반 다를 것 없지만 키는 그 때에 비하면 훌쩍 커졌다.

새삼 인간의 10년의 세월이 느껴지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느낌이 순간 마음을 스쳤다.

작은 아이는 이제는 아가씨라고 불러도 될 만큼 다 커버렸다. 어린 시절의 희미한 조각같은 기억들은 모두 다 지워버린 채 말이다.

"후...."

살짝 한숨을 쉰 한울이 심술궃은 표정을하고서는 연지의 말랑거리는 볼을 쿡쿡 찔렀다.

내가 자기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그걸 까맣게 다 잊어버리다니!

갑자기 지난 10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가자 울컥해서 살짝 힘을 주어 희고 말캉한 볼을 밀가루 반죽마냥 주물러댔다.

정신적 고통으로 상사만 아니면 그 능글맞게 웃고있는 영감의 얼굴에 주먹을 몇 번이고 날렸을 것이다.

"하아...."

"우음...."

자신의 볼을 조물거리는 손놀림에 짜증이난 듯 살짝 좁혀지는 미간에 한울의 얼굴에는 다시 개구진 미소가 떠올랐다.

"풋!"

아예 다리까지 침대 위로 올리고 한쪽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누운 한울은 입꼬리를 내리지 않고 빤히 연지를 바라봤다. 뭐라도 먹는지 연신 오물거리는 연지의 입을 보면서 한울은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꽉 물어 크게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부들부들 떨리던 몸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한번 크게 숨을 내쉰 한울은 다시 연지를 향해서 몸을 돌렸다.

아직까지도 왜 그날 자신이 그런 행동을 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도무지 왜 그 세월을 참으면서 버텼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날 그러지 않았다면 더 큰 후회가 남았겠지.'






구름이 동동 떠다니는 이질적인 풍경위에 새하얀 소파 위에 앉은 옥황상제와 염라대왕은 텔레비전같이 생긴 커다란 화면이 뚫릴 듯이 바라보며 열심히 듀얼쇼크의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그나저나 그 녀석은 간거야?"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염라대왕이 정적을 깼다.

약간은 길다싶은 검은 머리를 반으로 갈라 정리하고 단정하게 한복을 갖춰입은 그는 날카롭고 바르게보이는 생김새와 다르게 동네에서 좀 노는 고등학생같은 말투를 가지고 있었다.

"뭐, 그렇지. 시간이 됐으니까."

하늘색 셔츠의 단추를 몇 개 풀어헤치고 흰색 마지를 입은 채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있던 옥황상제의 시선이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염라대왕에게로 옮겨졌다.

옅은 금발머리를 뒤로 넘기고 입에 물고 있던 막대사탕을 볼쪽으로 굴린 옥황상제가 대답하자 염라대왕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타탁타닥 버튼을 눌르는 소리가 한참 허공을 매우다가 조금 여유가 생겼는지 염라대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그 놈을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렇게 큰 일을 눈 감아 주는 거 보면 싫어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또 괴롭히는 거 보면 네 놈이 전생이 있었으면 철천지 원수였을 것 같단 말이야. 여튼 싫어하는 거면 봐주질 말던가 좋아하는 거면 그만좀 괴롭혀. 내가 그놈이였으면 너 엄청 싫어했을 거다."

"걔는 이미 나 엄청 싫어해. 내가 윗사람만 아니었어도 진작 맞았을걸? 아마 마음속으로는 백번도 더 죽였을거야."

아무렇지도 않게 허허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모습을 보며 염라대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대체 왜 굳이 욕먹을 일을 찾아서 하는거야? 변태냐? 나도 욕 좀 해줘?"

"하하. 안타깝게도 그건 아니고."

재밌다는 듯이 웃은 옥황상제가 앞에 놓여있는 음료수를 한 모금 삼켰다.

"뭐, 모두에게 공평하게 기회를 주고 싶어서 그렇지. 나는 모두를 사랑하는 옥황상제니까."

싱긋 웃는 모습에 염라대왕이 기가차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방탕한 놈이 어디서 군자인척이야. 맨날 끼고 사는 선녀들 좀 어떻게 한 뒤에 연기를 하던가. 게다가 사고도 덮어주고 괴롭히고 엉망으로 만들어논 놈이... 엄청 꼬였잖아, 지금. 그리고 한쪽은 다 알고 있는데 공평한 게 맞아?"

"하여간 자네는 나를 너무 잘 알아서 뭔 말을 못하겠다니까."

날카로운 말에도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버튼을 눌러댔다.

곧이어 게임이 끝나고 승자가 정해졌다.

"망할!!!"

그냥 대화하는 대도 맨날 말리는 듯한 기분에 짜증과 분노를 담아 열심히 버튼을 꾹꾹 눌러댔지만 또다시 곱상하게 생긴 저 능글거리는 웃음의 소유자에게 진 염라대왕은 듀얼쇼크를 집어던졌다.

폭신한 구름 바닥에 튕겨져나와 부서진 곳 하나 없이 떠오르는 모양을보며 염라대왕은 인상을 더 구겼다.

여하간 이 놈이랑 있으면 맨날 되는 일이 없었다.

"하하. 내가 왜 맨날 게임에서 이기는 줄 알아?"

"뭐? 뭔 또 개소리를 하려고."

염라대왕이 으르렁거리면서 대답했다.

"이 게임은 내가 만든 거잖아."

"그래서 뭐?"

한쪽 주먹을 꾹 주고 차가운 주스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염라대왕이 날카롭게 대꾸했다. 맞받아치고는 있지만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정리될 수록 화내는 스타일인 염라대왕은 지금 무슨 말을 하던지 하나도 안 들릴 것이 뻔했다.

"내가 만든 판이잖아."






주말동안 저승사자와 지내면서 깨달은 것 중에 하나는 엄청나게 요리를 잘 한다는 것이었다.

저승에서 가져온 마법의 가루라도 넣는지 맛깔나게 음식을 해대는 한울 때문에 같이 살 수 없다며 따지려던 말은 쏙 들어가고 얌전히 해주는 음식을 먹으며 길들여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게다가 같은 집에 있지만 자주 부딪히는 것이 아니었기에 딱히 불편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학교까지 정말 따라오겠다구요?!"

"당연하지. 내가 말했잖아."

편한 검정색 반팔티와 바지를 입고는 현관 앞에서 오물오물 토스트를 먹는 한울을 보며 연지가 이상하게 표정을 구겼다.

그래 정말 집에서는 딱히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래! 솔직히 말하면 오히려 밥이고 간식이고 잘 챙겨주는 데다가 청소도 잘해서 도움이 많이 되어 편한 생활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학교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았다.

어디 영화나 소설같은 데서 본 수호천사고 아니고 뱀파이어도 아니고 사람 영혼 잡아가는 저승사자랑같이 학교에 간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느낌이었다. 괜히 자신이 데려갔다가 학교 친구들이 위험할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학교는 아니지 않아요? 저 말고 다른 사람들도 많은데."

"그러니까 가는거지. 그런 데가 더 위험하니까. 사람이 많은 쪽이 기척을 숨기기 쉽거든. 그런 애들은 강하지는 않지만 너 그런거 봤다가는 깜짝 놀라서 쓰러질지도 몰라. 그리고 나 너한테밖에 안보여. 내가 너를 쫄랑쫄랑 쫓아다닌다고해도 아무도 안 보이니까 걱정마."

"그....그래도 제가 이상하잖아요! 저 혼자 막 보이고 그럼 신경쓰이고!"

우물우물 마지막 조각까지 꿀꺽 삼킨 한울이 연지를 보고 한울이 싱긋 웃으며 얼굴을 가까이했다.

"신경쓰여?"

"아, 진짜!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발끈한 연지가 한울의 어깨를 밀고 뭐라고 따지려는 밖에서 진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혼자 꿍시렁 대고 뭐해? 그새 더위먹었냐?"

어젯밤에 고모가 괜찮아지시는 것 봤다고 새벽에 연락이 온 걸 확인했었는데, 늦게 들어온 게 피곤하지도 않은지 평소와 다름없는 쌩쌩한 목소리였다.

"뭐래."

'하하'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문을 열자 가방을 열고 빤히 이쪽을 쳐다보는 진욱의 얼굴이 보였다.

한울이 자신은 곧 죽은 사람 아니면 다른 사람한테는 안 보인다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이렇게 옆에 서서 진욱의 얼굴을 마주하니 어색하기도하고 자신의 양심 어딘가가 콕콕 쑤셔오는 것 같았다.

사람도 아닌 영혼이랑 있는 건데 괜히 부모님 눈 속이고 몰래 비밀을 만들고 죄짓는 기분이었다.

"뭐야? 나 없는 사이에 뭐 잘못한 거 있어?"

뻘쭘하게 서서 자신의 눈치를 보는 연지를 보며 진욱이 물었다.

"아, 아닌데."

"보약 잘 안챙겨 먹었어?"

"아니거든."

진욱의 물음에 연지가 강하게 부정을했다.

집에 계신 저승사자 덕분에 시간까지 꼬박꼬박 맞춰서 렌지에 돌려 따뜻하게 잘 챙겨먹고 있었다.

"그럼 왜 그러고 서 있어. 학교 지각해. 빨리 신발 신어."

"어, 어어."

진욱의 말에 연지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면서 주섬주섬 빨간색 신발에 자신의 발을 끼워넣었다.

"가자."

연지가 신발을 다 신는 것을 확인한 진욱이 현관문을 잡고서 말했다.

"응."

"그럼 나도 가볼까?"

연지의 대답과 동시에 기지개를 펴며 말하는 한울에 연지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왜?"

자신이 여지껏 말한 것은 다 까먹은 건지 '나는 아무 것도 몰라요.'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한울을 보고 연지가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 가만히 좀 있어요.'

"뭐하냐."

진욱에게 들키지 않게 고개를 돌려 열심히 입모양으로만 설명을했는데 그 모양이 더 이상했는지 진욱이 물었다.

"뭐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현관을 나와 아직 집 안에 있는 한울에게 눈짓을 했지만 전생에 자신을 못 약올리다 죽은 한을 풀려는 건지 싱글거리며 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한울이었다.

"으악!!!"

소리도 낼 수 없어 침묵속에서 경악으로 얼굴이 일그러져 가는데, 한울이 딱 현관으로 발을 내민 순간 쾅!!! 소리나게 문을 닫아버린 진욱 때문에 한울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우와! 쟤 뭐야!!! 내가 인간처럼 다치지는 않아도 고통은 느낀다고!!!"

안에서 버럭 소리를 지르는 한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연지가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자기를 곤란하게 놀려먹다니 쌤통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입가가 푸스스 허물어졌다.

"아침부터 왜 그래?"

"오늘은 그냥 너가 참~ 마음에 든다."

대문을 향해 나가며 자신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진욱의 어깨를 툭 치며 연지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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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8-25 10:11 | 조회 : 1,729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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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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