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의문(1)

한참을 사내의 품에서 울던 연지의 울음이 점점 잦아듬과 동시에 연지의 등을 토닥이던 사내의 손도 점점 느려졌다.

이내 울음이 그치고 정신이 들자 기껏해야 얼굴이나 두 번 본 사내의 품에서 그것도 코까지 흘려가며 아이마냥 펑펑 울었다는 사실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연지는 사내의 양쪽 어깨를 양 손으로 밀고는 한 발자국 남자에게서 떨어졌다.

사내의 품에서 떨어져 나오면서 자신의 눈으로 코와 가슴팍을 연결하는 얇은 실과 자신이 얼굴을 묻었던 부분만 눈에 확 띄는 사내의 와이셔츠를 확인하니 민망함이 배가 되었다.

"왜 그래?"

갑작스레 자신에게서 떨어져나간 연지를 보며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 발 다가서려고하자 사내의 발만 바라보고 있던 연지가 화들짝 놀라서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왜 그러냐니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한 걸음 다가오는 사내의 발을 보고 연지는 또 다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이에 잠시 고민하듯 미간을 찌푸리던 사내가 무언가 알겠다는 듯 입꼬리를 씨익 말아올렸다.

"흐응~ 너 부끄러워서 이러는 거구나?"

사내는 더 다가가지 않은 채 허리만 숙여서 연지와의 눈높이를 맞췄다.

"허어! 벌써 이러면 쓰나~ 앞으로 같이 살면서 계속 얼굴 볼 사이인데, 안그래?"

장난스러운 미소를 유지하며 푹 숙인 연지의 얼굴을 들어올리려고하자 나쁜짓을 하다 걸린 어린아이처럼 화들짝 놀란 연지가 몸을 돌려 재빨리 자신의 방이 있는 2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사내의 작은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쫓기듯이 엄청난 속도로 자신의 방에 들어온 연지는 빠르게 자신의 옷가지들을 챙겨서 욕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욕조에 마개를 닫고 물을 틀어놓고는 흰바탕에 분홍 고래들이 그려져 있는 변기커버 위에 옷가지들을 올려 놓은 연지는 크게 한 숨을 내 쉬었다.

힘 없이 천천히 옷가지들을 벗어 세탁물을 넣는 통에 대충 던져 놓고는 터벅터벅 욕조에 들어가 앉은 연지는 두 다리를 감싸 안고는 얼굴을 묻었다.

아무리 부모님 얘기에 울컥했어도 그렇지 제대로 얼굴도 모르는 사람.... 아니, 저승사자 품에서 그것도 콧물까지 질질 흘려가며 울었다는 사실이 너무 부끄러웠다.

사내의 옷과 연결된 그 하얀 실타래를 봤을 때는 정말 자신이라는 존재가 사라졌으면했다.

"흐아...."

또다시 폭풍처럼 밀려오는 민망함과 부끄러움에 연지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듯이 잡아 내렸다. 축축히 젖은 머리가 복면이라도 쓴 것처럼 볼에 쫘악 달라붙었다.

밖에있는 저승사자가 들을까 소리를 지르지도 못하고 낑낑거리며 마구잡이로 발을 움직였다.

첨벙첨벙 소리를 내며 불방울들이 욕조 밖으로 뛰쳐나가 현재 자신의 정신처럼 이리저리 조각나서 흩어졌다.

'아까 하는 말도 그렇고 계속 봐야 할 것 같은데...'

아까의 상황을 다시 찬찬히 떠올리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연지의 눈이 일순간 커졌다.

전속력으로 달려가 자신의 머리로 커다란 종을 친 것마냥 머리가 뎅-하고 울렸다.

'앞으로 같이 살면서 계속 얼굴 볼 사이인데, 안그래?'

'앞으로 같이 살면서 계속 얼굴 볼 사이인데'

'앞으로 같이 살면서'

'같이 살면서...'

아까는 너무 당황해서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무한 반복이 되었다.

욕조 안에서 찬찬히 사내에 대해서 생각해보면서 앞으로 얼굴을 계속 봐야겠다고는 생각했지만, 아무리 사람이 아니라 저승사자라고해도 자신의 두 눈으로 보기에는 신체 건장한 젊은 남자인데 같이 산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고 넘길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똑똑-

그 때 욕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 놀란 연지가 자리에서 벌떡일어났다.

"네?!!!....네!"

"뭐야? 왜 그렇게 깜짝 놀라? 벌써 귀신이라도 봤어?"

양옆으로 고개를 젓던 연지는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고 쥐어짜듯 목소리를냈다.

"아, 아니요. 그냥 갑자기 놀라서..."

우물쭈물 변명처럼 내뱉는 말에 피식하고 웃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부끄러운 건 알겠는데 울고 나서 너무 물에 오래 있는 건 안 좋으니까 빨리 나와. 부엌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네!"

기다렸다는 듯이 군인마냥 군기가 바싹 들어 소리친 연지에 사내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연지는 다시 한 번 민망함에 몸부림을 쳐야만했다.







"이리와 앉아."

빨리 나오라는 말에 머리를 말릴 생각도 하지 않고 수건으로 대강 말아올린 뒤 쭈뼛거리며 주방으로 내려오자 사내는 자기집 마냥 자연스레 의자를 빼주며 말했다.

연지가 의자에 앉자 방금 탄 것인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코코아 한 잔을 연지의 앞에 내려놓고는 연지의 맞은 편 자리에 앉아 연지를 바라보았다.

아까와 달리 넥타이와 자켓 없이 팔꿈치까지만 걷은 검은 셔츠를 입고 있는 사내의 팔은 얼굴처럼 결점 없이 뽀얗고 깨끗했다.

"왜 안 마셔?"

몇 초 동안의 정적을 깨고 사내가 붉은 입술을 움직였다.

"원래 따뜻한 건 잘 안마셔서..."

"어허! 안돼, 안돼. 여자가 찬거 마시고하면 몸에 안 좋아. 울어서 기운도 없을텐데 단거라도 먹어야지. 빨리 마셔."

원래 음료수뿐만 아니라 물도 차가운 것만 먹지만 재촉하는 듯한 사내의 눈빛에 어색하게 웃으면서 머그잔을 입에 갖다댔다.

따뜻한 액체가 몸속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던 긴장감을 녹여주는 것 같았다.

연지가 한 모금 넘기는 걸 확인한 사내는 슬쩍 미소를 짓고는 자세를 고쳐 앉아 연지와 눈을 맞췄다.

"이제 내가 저승사자라는 것도 믿는 것 같고, 진정도 된 것 같으니까 얘기가 될 것 같아서. 괜찮지?"

사내의 물음에 연지는 고개를 두어번 끄덕였다.

"일단 내 이름은 한울이야. 저승사자라 성은 없어. 나이는... 조선시대부터 저승사자를해서 세다가 지쳐서 정확히 기억은 안나. 어차피 사람도 아니라 나이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아마 300쯤 됐을거야. 일단 그냥 외모를 봐서 20대 초중반에 죽은 거라고 추정하고 있고, 너희 부모님 부탁으로 너를 지켜주려고 왔다는 거는 아까 말했지? 음... 그리고 또 뭘 말해야 되는지 모르겠네.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

그렇게 말한 한울이라는 남자는 싱긋 웃어보였다.

"저기....."

"응?"

연지가 고민하는 듯 하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자 한울이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 연지를 응시했다.

"아까 저승사자가 하는 일도 많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계셔도 되는 건가요?"

"음... 어디서 부터 설명해야하나?"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희고 긴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치던 한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까 내가 저승사자가 노예급인 저승 공무원이라고 얘기했지? 그래서 인간세계랑 비슷하게 오래있는 놈이 계급이 제일 높거든? 나는 300년 정도 됐으니까 사실상 이름만 있고 아무것도 안해도 돼. 왜, 나이 먹고 거의 명예직으로 앉아만있고 실제로는 일 안하는 사람들 있잖아? 이렇게 오래 일하는 저승사자는 없거든. 아쉽게도 지난 10년은 망할 늙은이한테 잘못 걸려서 꼼짝못했지만."

이해가 안간다는 듯 어색하게 미소를 짓는 연지를 보고는 한울이 씨익 웃어보였다.

"어렵지? 하긴, 주변에 저승사자인 사람이 있어야 저승사자에 대해서 알지. 인간세계에 있는 이야기들은 순 엉터리 얘기들 뿐이니...."

한울은 혀를 쯧쯧차며 중얼거렸다.

"일단 저승사자들은 원래 존재하는 게 아니라 죽은 영혼들 중에서 선발되는거야. 죽은 영혼들 중에 무언가 이루고픈 강력한 소망들이 있는 존재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능력이 되는 사람들을 뽑아서 저승사자를 하게 되는거지. 계약기간은 옥황상제에게 말한 강력한 소망이 기억나서 이루어질 때까지. 소원이 이루어지면 저승사자는 일은 은퇴하게 되는 거고 환생을 하거나 그냥 저승에서 살던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어. 저승사자로 남아도 되지만 그런 경우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거의 없어. 여튼, 나는 특수한 경우고 대부분 소망과 관련된 사람이 죽을 때 영혼을 데리러가면서 소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아무리 길어도 100년 채 되지 않고 은퇴하는 저승사자들이 대부분이지."

"아, 시험같은걸 보는구나."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던 연지가 중얼거렸다.

이승이나 저승이나 살기 팍팍한 건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러고나서 딱히 할 말이 없어 고개를 숙이고 손만 꼬물꼬물 움직이는 연지를 보고 한울이 몸을 기울여 속삭이듯이 말했다.

"사실 일이야 하다보면 적응되는 거잖아. 그러니까 저승사자가 될 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장난스러운 느낌이 은근히 묻어있었지만 뜸을 들이며 이야기하는 탓에 괜히 긴장된 연지가 꿀꺽하고 침을 삼켰다.

"외모야."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며 자랑스러운 미소를 띈 채 한울이 말했다.

"네?!"

신종 잘난척인 것인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당당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외모가 가장 중요해."

"무슨 저승사자가 외모가 중요해요."

물론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한울의 외모가 뛰어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해서 저승사자가 외모가 중요하다는 것을 믿기는 힘들었다.

"네가 잘 몰라서 그러는거지 외모가 얼마나 중요한데? 영혼들 데리러 갔을 떄 저승사자가 잘 생기면 순순히 더 잘 따라온다고. 인생의 마지막인데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괜찮은 외모를 가진 쪽이 에스코트 해주는 편이 훨씬 좋지 않겠어?"

거만한 표정을 짓는 한울을 보며 연지가 '하!'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와~ 안 믿네? 진짠데? 네가 알고 있는 그 갓쓰고 무서운 얼굴을 한 저승사자는 옛날옛날 이야기야. 겁줘서 데리고 가던 시대가 끝난지 언젠대. 요즘 시대가 얼마나 빨리 바뀌는지 너도 알 것 아니야. 이것 봐봐. 지금 나 정장 입고 있는 거. 요즘은 수트 입은 남자가 대세라고 해서 수트 입고 다니잖아."

한울이 자신의 검은 셔츠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앞으로 같이 살 사이인데 믿어야지. 사람과 사람관계든 사람과 저승사자 관계든 가장 중요한 건 믿음과 신뢰거든?"

그래도 연지가 의심의 눈초리를 풀지 않자 믿음을 운운하며 투덜거리는 한울이었다.

그 말에 갑자기 아까 욕실에서 자신의 머리를 울렸던 말이 생각한 연지의 얼굴이 다시 옅게 붉어졌다.

"아! 그러고보니... 그런데 아까부터 같이 산다는 거... 진짜에요?"

괜히 의식하는 것 같이 보이는 것 같아 민망한 마음에 연지가 조심스레 물었다.

"같이 산다는 거? 당연하지. 아까 말했잖아. 지켜주러 온거라고.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계속 곁에 있을거야."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야기하는 한울과 달리 연지의 얼굴은 당황스러움으로 가득찼다.

"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갑자기 이렇게 같이 사는 건 좀... 아니지 않나요?"

"왜 안돼? 아직도 나 이상한 저승사자로 보여?"

"아뇨, 그건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 지붕아래 남녀가 같이 살면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르잖아요!!! 라고 소리지르고 싶지만 부끄러움에 우물쭈물 할 수 밖에 없었다.

"흐음~ 내가 남자로 보이는 건가?"

기다랗고 하얀 손가락으로 톡톡 책상을치던 남자가 눈꼬리까지 휘어뜨리며 웃어보였다.

"누가 그렇대요!!!"

자신은 부끄러워서 제대로 말도 못하는 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팔짱을끼고서는 재미있어하는 모습에 연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면 아니라고하면 되지, 왜 소리를 질러? 안 그래도 죽은 몸인데 영혼까지 소멸하는 줄 알았네."

갑작스런 커다란 목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깜빡깜빡이던 한울이 가슴을 부여잡으면서 말했다.

"네가 한참 예민한 십대 소녀라는 건 알겠는데, 어쩔 수 없어. 그럴려고 온 거니까."

무슨 말이냐는 듯 한울을 올려다보는 연지의 눈빛에 한울이 다시 입을 뗐다.

"10년전 사고로 인해서 너는 악령들이 아~주 탐내는 영혼을 가지게 됐거든. 너는 모르겠지만 살아있지만 죽음의 냄새를 풍기고 있어. 사실, 약간의 봉인을 해 둬서 여지껏 커다란 문제가 될 것은 없었는데 얼마 전에 하늘에서 악령들을 가둬 놓았던 일종의 감옥 같은 게 부숴져서 말이야.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되었거든."

"그러니까.... 악령들이 지금 제 영혼을 탐낸다는 거에요?"

"그래. 네 영혼을 삼키면 훨씬 더 큰 힘을 가질 수가 있거든. 맛있고, 영양가 좋은 영혼이거든. 게다가..."

연지의 표정이 슬며시 굳어졌다.

자신의 기억 속에 존재한 적이 없는 악령얘기가 나오자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도 않을 뿐더러 안그래도 많은 이야기들 속에 허우적대는 데 또 많은 양의 물을 들이붓는 느낌이었다. 수영도 못하는 자신을 키를 훨씬 넘는 풀장에 집어놓은 것 마냥 답답하고 힘들었다.

"그렇게까지 걱정할 것은 없어. 서당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저승사자 짓 300년한 경력이있는데 막 악령한테 잡아먹히게하고 그러지는 않아. 실제로 너에게 원한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렇게 커다란 해를 가할 힘도 없으니까."

표정이 좋지 못한 연지의 눈치를보며 흘리듯이 말을 내뱉은 한울은 자리에서 일어나 연지곁으로가 머리를 툭툭 부드럽게 만졌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힘도 없을텐데 내가 괜히 말을 너무 많이한 것 같네. 미안해, 어서 들어가서 자."

멋쩍은 듯한 표정으로 베시시 웃으면서 미안하다고 사과까지하자 연지도 슬쩍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끈지끈거리는 머리에 더 이상 물을 힘도 따시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갑자기 힘이 쭉-빠진 연유에 대한 궁금증도 피곤함에 잠식되어 가라앉았다.

연지는 살짝 고개를 까딱이고는 자신의 방을 향해서 걸음을 옮겼다.




식탁에 기대에 멀어져가는 연지의 뒷모습을 보던 한울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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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8-25 10:10 | 조회 : 1,893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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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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