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왜 화낸거야?

"아..."

눈이 땡그랗게 커진채로 잔뜩 얼어있던 연지의 연분홍 빛의 입술에서 작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 자그마한 소리에, 저 우주 밖으로 나가있던 정신이 확 들어오는 듯 다시 정신이 돌아왔다.

한울은 조심스럽게 아직 자고 있는 듯한 진욱을 흘끔 보고는 연지를 안은 채 순식간에 진욱의 집 창문 밖으로 나와버렸다.

갑작스러운 풍경의 변화와, 자신이 2층의 창문보다 위에 떠있다는 사실, 게다가 그 것을 인식하고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무서운 속도로 내려가는 통에 잔뜩 긴장한 연지가 눈을 감고는 한울의 옷을 꼬옥 잡아챘다.

한울은 어딘가에 걸리거나, 머뭇거리지도 않은채 유연하게 아까 열어놓은 연지의 방 창문을 통해 방으로 들어왔다.

방으로 들어오고, 아까의 그 빠른 움직임 때문에 느껴졌었던 바람의 감촉이 느껴지지 않자 연지가 조용히 눈을 떴다.

침대 옆에 있는 희미한 스탠드의 불빛에 자신의 방이라는 것을 알아챈 연지가 한울의 옷을 잡고 있던 손에서 천천히 힘을 빼자, 한울이 연지를 조심스레 내려주었다.

"......."

"......"

아직도 보들거리던 그 감촉이 입가에 맴도는 것 같아서 둘은 서로를 쳐다보지 못했다.

그저 어정쩡하니 서서 방에서 나가지도, 무슨 말을 하지도 못한채 꼬물꼬물 어쩔 줄을 몰라 하던 둘의 정적을 먼저 깬 것은 연지었다.

"저.... 저는 이만 먼저 잘게요."

"아, 어. 그래. 잘자."

한울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빠른 걸음으로 연지의 방을 통과해서 밖으로 나왔다.

급히 계단을 내려가던 한울은 쓰러지듯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무릎에 머리가 닿을 듯 고개를 숙인 한울이 커다랗고 차가운 자신의 손으로, 보이지 않지만 붉게 달아올랐을 것 같은 양 볼을 감싸쥐었다..

"으아...."

아까는 머리가 백짓장처럼 하얘져서 무슨 말을 할 수도,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어서 몰랐는데, 얼굴이 화끈화끈한 게 곧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연지가 어둠에 눈이 익숙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결국 다리에 얼굴을 묻고 붉게 달아오르는 얼굴과, 실타래가 엉켜버린 듯한 머리를 진정키려고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하였다.

이게 무슨 짓인지....

무슨 첫사랑을 경험하는 남고생도 아니고.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르자 한울이 바람빠지는 듯이 피식 웃었다.

어둠에 익숙해지면 물체의 윤곽이 서서히 보이듯이, 무언가의 윤곽선이 그려지는 듯한 느낌이들었다.

오늘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영영 후회해버릴 것만 같아서 갔던 것이었는데 그런...

"아... 이야기!"

갑작스러운 입맞춤 때문에 까많게 잊어버리고 만, 오늘 자신이 그곳에 갔던 목적이 떠오르자 한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서원이 말대로 이렇게 또 넘어가고 예전처럼 연지가 자신을 또 피하게 된다면 정말 영영 멀어져 버릴지도 몰랐다.

빨리 문제를 해결하고, 전해야 했다.







"너 바보야?"

창문에 걸터 앉아있는 소년이 진욱을 바라보며 말했다.

확실히 인간이 아님을 보여주는 노란빛 눈동자가 밤 중에서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왜 왔어."

"왜긴 왜 왔어. 니가 걱정되서 왔지."

진욱이 누운 채로 딱딱하게 대답을 하건 말건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니가 왜."

"왜긴 왜야. 네가 내 이름도 지어줬잖아. 도비. 너는 나한테 이름도 준 존재인데, 당연히 특별한 거 아니야? 사실 너도 그렇게 딱딱하게 이야기를 하긴 해도 나를 생각한다는 걸 나는 다 알고 있지."

"착각도 정도껏 해야지."

"으흥~ 그래도 나는 상처받지 않는다네."

아침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생글생글 지으며 도비는 아까까지만해도 다른 사람의 체온이 있던 침대에 풀썩 누웠다.

"그나저나,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뭐가?"

"기회를 준건데, 왜 잡지를 못하냐는 말이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옥황상제가 준 기회인데. 네가 이야기만 잘만 하면 훨~씬 더 좋은 방향으로 풀릴 수도 있잖아. 아니야?"

답지 않게 투덜거리며 자신을 훈계하는 말투에 진욱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나 말이다. 너처럼 단순하고 멍청한데다 다른 사람 생각도 안하는 어린애였으면 뭐라도 했을 텐데."

"친구, 그거 나 욕하는 건가?"

"생각하기 나름이지."

"뭐야, 그거! 내가 부럽다는 걸 돌려서 말하는 건가? 응?"

옆에서 계속해서 쨍알대는 목소리를 가볍게 무시한 진욱이 알 수 없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엑?!"

자신의 침대에 누워 눈을 꼬옥 감아도 계속해서 자신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영상에 뒤척이고 있을 때 갑자기 열리는 문에 연지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문이 열리자마자 엄청난 속도로 성큼성큼 연지쪽으로 다가온 한울은 연지가 있는 침대에 풀썩 걸터앉았다.

그리고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있는 연지와 눈을 맞췄다.

"미안. 아무래도 오늘 이야기 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지내야 할 것 같아서."

"아...."

한울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금방 알아챈 연지가 걱정스러운 듯 자신의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네가 왜 그런지 알 수가 없어서... 괜히 다른 사람이랑 이야기하고 내가 추측하는 것보다는 직접 이야기하는 게 더 좋은 것 같더라고."

한울의 말에 연지가 고개를 숙인채 침을 꿀꺽 삼켰다.

한울이 완전히 침대에 올라와 연지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양 손으로 연지의 볼을 감싸쥐고는 숙이고 있던 연지의 얼굴을 들여올려 자신과 눈을 마주치게 했다.

"말해주라. 이렇게 계속 지내다보면 점점 더 멀어질 것 같아서 그래."

갑작스럽게 들여올려진 얼굴 덕에 가까이에서 한울의 시선을 그대로 받아내던 연지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응?"

눈을 어디에 둬야할지 몰라 당황해하는 연지에게 한울이 다시 채근하듯이 눈을 맞춰왔다.

"........"

고민고민하며 입을 뻐끔거리는 연지를, 한울은 더 이상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게...."

결국 우물우물거리기만 하던 입에서 제대로 된 단어가 나오자 한울은 살짝 미소를 띄며 연지의 볼에서 손을 뗐다.

"그게 사실... 자면서 잠꼬대 하는 걸 들었어요."

부끄러운 듯이 머뭇거리면서 한 문장을 끝낸 연지가 눈치를 보듯이 슬쩍 고개를 올렸다.

그러다 한울과 눈이 마주치자 무슨 귀신이라도 본 듯 다시 황급히 시선을 깔았다.

"그런데?"

다시금 입을 다물어버릴까 한울이 달래는 듯한 차분한 어조로 물어왔다.

"좋은 꿈 꾸는 것 같다가..... 악몽으로 바뀌었는지 끙끙거리다가.... 서원이라고..."

"서원?"

한울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네.... 서원이라고 중얼거리셔서...."

"내가?"

"네.... 아침에 그 분이 그 분..."

잔뜩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지자 연지가 말끝을 흐렸다.

그래도 모두 잘 알아들은 한울이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이상하네. 어쨌든, 내가 잠꼬대를 하면서 내뱉은 이름이 절대 아침의 걔는 절대 아닐거야."

"네?"

연지의 표정도 한울을 따라서 알쏭달쏭해졌다.

그럼 뭐가 이상한거고, 뭐 때문에 절대 아니라는 거지?

한울이 피식 웃으면서 연지의 눈을 마주쳤다.

"나도 확실히 무슨 꿈인지도 모르겠고, 왜 그런 꿈을 꿨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내 얘기 같았단 말이야. 그러면 어찌되었던 간에 내가 인간일 적이었던 때와 관련이 있다는 건데, 아까 아침의 그 여자애는 들어온지 100년 밖에 안 된 애거든. 나랑 죽은 시기도 안 맞고.... 게다가 내가 아무리 꿈이라고해도 정신이 나가지 않았던 이상 걔 이름을 불렀을 리가 없지. 걔나 걔 남편이나 여튼 징글징글한 것들이라고."

한울이 진절머리 난다는 듯이 몸을 부르르 떨면서 말했다.

머리도 좋고 착하지만, 과격한 서연과 그런 서연이 뭐가 좋은지 무슨 여왕님마냥 떠받들며 으르렁거리는 남편의 모습에 절로 한숨이 터져나왔다.

"...!!"

작은 탄성조차 내뱉지 못한채, 연지는 온 몸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저, 단순한 잠꼬대일 뿐이었는데 여지껏 혼자 망상을 더하고 이야기들을 덧붙여가면서 혼자 토라지고 화를 냈던 것을 생각하니 더 이상 한울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흐음~ 근데...."

오해도 풀었겠다 연지의 반응도 읽었겠다.

한울이 다시금 예전의 그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연지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했다.

갑자기 확 다가오는 한울의 얼굴에 연지가 몸을 빼려고 했지만, 연지의 한쪽 손목은 이미 한울에게 잡힌 채였다.

"그런데, 왜 그것 때문에 화 낸거야?"

이마를 맞댄채로 한울이 예쁘게 웃으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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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12-19 14:31 | 조회 : 1,336 목록
작가의 말
브리사

항상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2주동안의 시험에 치이다가 이제 왔네요ㅠㅠ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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