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갑작스러운

"........."

진욱의 눈빛을 받아낸 한울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소름끼치도록 짜증나는 기분이 확 끼쳐왔다.

진욱의 말을 무시하고 연지의 팔을 잡으려는데 아까보다도 더 낮아진 목소리가 한울의 움직임을 제지시켰다.

"그만."

억눌린 목소리로 자신과 마주친 눈을 피하지 않으면서 낮게 소리치듯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짐승의 것 같았다.

"그만하라고 했습니다. 연지는 만지지 말고 그냥 가시죠."

"......"

"얘가 왜 여기 와서 이러고 있는지도 설마 모르시는 건 아니시죠?"

"....."

한울의 입술이 꾸욱 다물렸다.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수는 없지만 이렇게 도망치다싶이 진욱의 집에 와 있는 것은 분명히 자신의 탓이었다.

"그 쪽이 불편해서 온 애를, 당신이, 그것도 애 자는 사이에 몰래 데려가면 애가 어떨 것 같습니까?"

기분나쁜 얼굴이 구구절절이 맞는 말만 내뱉었다.

그 때 순간 한울의 머리가 무언가에게 맞은 듯 징-하고 울렸다.

진욱이 다른 사람과 겹쳐보이며 갑자기 아찔해진 정신에 인상을 더욱 찌푸렸다.

"돌아가시죠. 깨어나고서 집에 돌아가고싶다는데 억지로 붙잡지는 않을 거니까."

살벌함이 감도는 말을 내뱉은 진욱은 더 이상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듯 연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

당혹스러움과 궁금증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분나쁜 느낌이 스물스물올라왔다.

무어라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부어주고 연지를 데려오고 싶었지만 자기 때문에 도망간 애를 데려올만한 아무란 명목이 없었다.

하고 싶은 말들에 입이 움찔움찔 거렸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자격이 없는 것 같아서 입이 꾹 다물어졌다.

결국 한울은 소심하게 진욱을 노려보고는 순식간에 방에서 사라져버렸다.

"....."

한울이 없어진 자리를 슬쩍 바라본 진욱이 다시 고개를 돌려 연지를 바라보았다.

아까 꼼지락거리는가 싶더니만 어느새 이불 밖으로 나온 연지의 손목을 보며 인상을 확 찌푸렸다.

가느다란 손목에는 붉은 손자국이 나 있었다.

누가 그랬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모양이었다.

딱 봐도 여려 보이는 애 손목을 어떻게 잡았길래 이모양이 된 것인지 슬쩍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조심성이 없어."

붉게 물든 손목을 투박한 손으로 조심조심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진욱이 중얼거렸다.

그 때나 지금이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남자였다.







순식간에 다시 연지의 방으로 돌아온 한울은 돌아오자마자 갓을 풀어 던져버렸다.

벽에 부딪힌 갓이 다시 발 밑으로 굴러오자 발로 뻥하고 차버린 한울은 편한 복장을 하고 있던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연지의 침대에 몸을 던지듯이 뉘였다.

옅은 연지의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바디워시인지, 비누인지, 아니면 샤워를 하고 나와서 토닥토닥 바르는 몇 개 안 되는 기초 화장품의 향인지 모르는 냄새에 괜히 울컥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진짜... 도대체 뭐냐..."

가만히 누워있다가 진욱의 기분나쁜 눈빛이 떠올라 씩씩대며 이리저리 뒤척대던 한울이 어젯밤, 침대에서 마주보던 연지의 얼굴이 생각나자 한울의 눈꼬리가 축 쳐졌다.

어제처럼 진욱 앞에서 새근새근 옅은 숨을 내쉬며 말랑말랑한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속에서 욱하고 뭐가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아무리 친구라고 그래도 다 큰 남자 옆에 누워서 그렇게 새근새근 잠을 자는건지!

게다가 아까 방에 들어갔을 때 연지를 바라보던 진욱의 눈빛은 확실히 기분나쁜 것이었다.

"미쳤어..."

생소한 감정에 한울이 키다란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힘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강한 힘으로 이불을 꾸욱 움켜잡았다.

보드럽고 얇은 이불이 강한 힘에 이리저리 구겨져버렸다.

아이마냥 둥그렇게 몸을 만 한울의 눈동자에는 혼란스러움이 고스란히 비추어지고 있었다.

위잉-

위잉-

주머니에 들어있는 핸드폰이 계속해서 울렸지만 한울은 그마저도 알아챌 수 없었다.







"전화는... 안받으십니다."

"....."

푹신한 의자에서도 자세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꼿꼿이 앉아있는 단율의 인상이 종이 접듯이 반듯하게 구겨졌다.

"저도 이유까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기는 한 것 같습니다. 서원님이 한울님을 만나러 가셨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

여울에게 한울에 대해서 물어본 단율은, 여울의 이야기를 듣고 한참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러다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멍청한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군. 변함없이 답답하고 멍청하지."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는 단율이었다.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기는했지만 처음보는 모습에 여울은 상당히 당황한 상태였다.

항상 이성적이고 냉철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단율이었는데, 저번에 물약에 관련해서 옥황상제의 명령을 어긴 것도 그렇고 지금의 잔뜩 난 화를 억지로 누르고 있는 표정도 그랬고, 한울과 관련되어서 무너지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한 번도 시킨 적이 없는 정찰을 자신에게 시킨 것도 의아했다.

자신의 밑 사람에게 시킨 일이어도 항상 신뢰를 주는 단율이었고, 딱히 나서서 어떻게 일이 되고 있는지 알아보라고 시키는 일은 없었던 터였다.

그러던 사람이 갑자기 한울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라고 시킨 것도, 상황을 듣고서 전화를 해 보라는 것도 이해는 가지 않았다.

항상 나쁜 일이나 어긋나는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니, 한울에게 피해가 될 것은 아닌 것 같아서 솔직하게 보고를 하고는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의 궁금증은 계속해서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잠시 만나러 가야겠다."

"예?"

뜬금없는 단율의 말에 당황한 여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이 그러면 안되는 거 알지? 우리 약속을 벌써 잊었어?"

그 때 아무런 예고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리더니 옥황상제가 들어왔다.

여전히 기분나쁠 정도로 생글거리는 얼굴을 한 옥황상제는 단율의 앞으로 저벅저벅 다가와섰다.

"기억나지? 우리가 약속한 거. 이 상황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끼어드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잖아."

웃는 낯으로 이야기를 하고는 있었지만, 위압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예외는 없어. 우리는 규칙을 정한거고 어떤 상황에서도 따라야지. 나는 공평하게 기회를 나눴고, 너도 그와 관련된 것에 동의 했잖아?"

여울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계속해서 오갔다.

"........네."

"그래. 그러면 규칙을 따라야지. 괜히 움직였다가 더욱 꼬이는 수가 있어. 또한, 네가 그렇게 강력한 믿음을 줬던 아이인데, 조금쯤 더 믿어봐도 괜찮잖아?"

옥황상제가 자신보다 한뼘은 더 큰 단율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말했다.

"그래. 좋은 생각이야. 아, 그러면 이만 가지."

아까와 마찬가지로 뭐가 그리 좋은지 웃는 얼굴을 한 옥황상제가 나가자 단율이 살짝 한숨을 내쉬더니 자리에 앉았다.

"괜한 일을 시켜서 미안하게되었군. 이만 가보지. 아, 비밀은 꼭 지키고."

언제 흥분했냐는 듯 다시금 초승달처럼 냉철한 얼굴을 한 단율이 말했다.

"네."

꾸벅- 바른자세로 깔끔하게 허리를 굽힌 여울이 방을 빠져나갔다.

뭔지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얽힌 것 같은 이들의 관계에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주인 잃은 강아지마냥 침대에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거리던 한울이 흘끔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봤다.
분침이 이제 막 새벽 3시 이십분을 지나가고 있었다.

"아.. 진짜 어떻게 해야되나..."

한울이 팔사이에 얼굴을 파묻으면서 중얼거렸다.

이렇게 가만히 있자니, 지금 연지와 진욱이 걱정도 되고 자신이랑 영영 멀어질 것 같은 기분에 잠도 제대로 안 왔다.

그러고 가자니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데 무슨 면목으로 가는 건가... 하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머릿 속에 서원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러면 기다려주던가. 그런데 괜히 질질 끌다가 좋은 일 생기는 건 본 적이 없다. 말할 수 있는 계기를 주던가, 네 태도를 확실히 하는 수 밖에 없지.'

"아!! 진짜!!!"

대하기가 그리 좋은 여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똑똑하고 믿을 만한 녀석이었다.

한울은 소리를 지르며 침대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나서 다시 저승사자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이리되든 저리되든 답도 안 나오는 문제를 가지고서 혼자 끙끙 앓아봤자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뻔뻔해보이더라도, 연지가 자신의 얼굴을 보기 싫더라고 어쩔 수 없었다.

본능이 지금은 기다려야 할 타이밍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진욱의 창문 옆에 딱 붙어서 떠 있는 한울은 심호흡을 하고 조심스레 창문 안을 살폈다.

진욱이 자신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조심해야했다.

슬쩍 봤을때 아무런 인기척이 없어보이자, 한울은 좀 더 대담하게 창문에 몸을 붙여서 안을 살폈다.

진욱은 연지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침대 옆 바닥에서 역시 쿨쿨 잠을 자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서 방 안으로 들어온 한울은 조심스레 진욱의 눈 앞에서 손을 몇 번 흔들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이 확실히 잠에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쉰 한울이 조심스레 연지를 덮고 있는 이불을 걷어내었다.

"으음...."

갑자기 없어진 이불에 불편한듯 인상을 찌푸리는 연지에 진욱이 놀란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조심조심 연지의 목 뒤와 다리 아래에 팔을 끼워넣었다.

몸을 띄운 뒤 아까 열어 두었던 창문으로 나가려는데 갑자기 연지의 눈이 스르르 떠졌다.

".....!!"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이 한울이라는 것을 알아챈 연지의 눈이 갑자기 화들짝 커졌다.

순간 놀란 마음에 연지가 소리를 지르려고 하자, 연지를 안는 바람에 쓸 수 없는 손도 없어 당황한 한울이 가볍에 연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댔다.

"...!!!"

"...!!!"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한울과 연지의 눈이 모두 커졌다.

0
이번 화 신고 2015-11-29 22:15 | 조회 : 1,378 목록
작가의 말
브리사

벌써 내일이 11월의 마지막 날이네요. 다들 피곤하시겠지만 힘내셔서 11월을 잘 마무리하셨으면 좋겠어요.

후원할캐시
12시간 내 캐시 : 5,135
이미지 첨부

비밀메시지 : 작가님만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익명후원 : 독자와 작가에게 아이디를 노출 하지 않습니다.

※후원수수료는 현재 0%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