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생각지 못했던 기억의 한 조각(2)

"뭐...?"

얼빠진 듯한 한울의 모습에 원령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십년 전 그날, 너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여자애가 타고 있던 차 맞은 편에 나도 있었어."

연지를 처음 만난 날을, 그리고 연지를 알고 있는 듯한 원령의 말에 한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날이... 그날이 우리 가족 첫번째 여행이었는데..."







"그렇게 좋아?"

엄마의 물음에 주체하지 못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어려웠던 가정형편과 몸이 조금 불편하신 아빠와는 여행 한 번 같이 가보지 못했었었다.

친구들이 놀이공원에 갈 때에도, 신나게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갈때도, 대학에 와서 신나게 해외여행을 할 때에도 지원은 특별히 놀러 가 본 적이 한 번 없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공부 열심히해서 대학에 가면 장학금을 받고 다니면서 조금 더 여유로워질 줄 알았지만, 사실 아르바이트와 공부를 병행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살다, 우리 엄마 아빠랑 여행 한 번은 꼭 가봐야겠다 싶어 한 학기를 정말 빡빡하게 최선을 다해서 보냈었다.

덕분에 전액 장학금을 받아 생활비를 제외한 아르바이트 비를 오롯히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되었다.

전에 조금씩 모아주었던 얼마 되지 않는 돈 까지 모아 가족들과 통영으로 짧은 여행을 떠나기로 했었다.

삼촌이 기특하다며 빌려주신 차를 탄 다희의 얼굴에는 웃음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렇게 떠날 때까지만해도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치 못했다.

오랜만에 아버지와 동생, 엄마 사이에서는 근심이 어린 얼굴을 찾아볼 수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 화창한 날시와 어우러지는 활짝 핀 가족들의 얼굴에 다희 역시 행복했다.

"어?!! 억!!!"

끼이익!!!!

사고는 한 순간이었다.

갑자기 앞쪽에서 차들이 굉음을 내는 듯 싶더니 결국 발목을 잡아 끌어들였다.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도 모른채 끔찍한 추돌 현장에 포함된 다희의 차는 옆으로 쓰러졌다.

너무나도 순식간의 일이라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꽤나 큰 차들에 부딪힌 다희네 차량은 뒤로 밀려 반쯤 뒤집어져 있었다.

그렇게 튼튼해 보였던 유리가 조각조각이 나는 것이 다희의 살아있을 적 마지막 기억이었다.

"어?"

그렇게 기억이 까무룩해지는데 갑자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천천히 눈을 떠보니 앞에는 피로 물들어 있는 자신과 가족들의 모습이 보였다.

"어...어?"

당황스러운 상황에 눈물이 차올랐다. 옆에는 자신과 비슷하게 놀라 서 있는 아버지도 보였다.

"이...이게..."

".....아무래도 우리가...죽었나 보다."

착잡하게 나오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다희는 소름이 쫘악 끼쳤다.

이렇게... 이렇게 죽다니....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비참한 죽음.

아무 것도 해보지 못한 채 죽은 것에 대한 서러움과 허탈함에 멍-하니 서있던 다희의 눈에 희미하게 숨이 붙어있는 듯한 엄마와 동생의 모습이 보였다.

이 둘만은 어떻게 해서든 살려야 겠다는 마음에 달려나가자 아수라장이 된 모습이 보였다.

처음보는 검은 옷의 사람들과, 그들을 통과해서 지나다니는 119구급대원들의 모습이 영화처럼 현실감 없게 다가왔다.

사고 현장의 맨 뒤고, 앞 쪽에는 대형 버스가 두대나 쓰러져 있었다. 버스들의 뒤쪽에, 그것도 찻길 옆으로 쓰러져 있는 차는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저기요!!! 저기요!!! 여기 사람 살아있어요!!!! 도와주세요!!!!"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었다.

구급대원의 팔을 잡아챘지만 이내 쑤욱, 자신의 몸을 지나쳤다.

살아있어서도, 죽어서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아무도 제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았다.

"같이 가시죠."

그 때 검은 정장을 잘 차려입은 사내가 자신의 팔을 잡았다.

"아니..저기..저기 우리 엄마랑 동생이 아직 살아있어요.... 지금!! 지금 발견하면 살지도 몰라요!!"

"생명부에 따라서 저희가 알아서 처리할 겁니다."

간절한 목소리로 떨며 이야기하는 다희에게 사내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아직 살아있다고요!!!"

".....안타까운 건 압니다만 발견이 되든 못되든 그것은 정해진대로 될 겁니다. 저희가 하는 것은 끝난 목숨을 거두어가는 일이지, 사람을 살리는 일이 아닙니다."

사내가 펑펑 우는 다희를 보며 고운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정 그러시다면 곁에서 시키시다 같이 가셔도 됩니다. 혹시라도 도망가시거나 그러지는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악령이 되시면 가족들은 평생 못 만나셔요."

사내가 다희의 팔을 움켜 쥐었던 손을 풀고는 다시 앞쪽으로 달려나갔다.

구급 대원과 검은 옷의 사내들이 움직이는 앞쪽의 상황과 다르게 지독히도 고요한 자신들의 차가 엎어진 곳을 보며 다희는 누군가 심장을 쥐어짜듯이 마음이 아파왔다.

"엄마!! 희정아!"

결국 포기하고 엄마와 동생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아주 옅고 고통스러운 숨을 쉬고는 있었지만 둘은 아직 살아있었다.

하지만... 분명 숨이 얼마 붙어있지 않은 것이 느껴졌다.

"...그만하자."

엉엉 우는 다희의 머리 위로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만하자 다희야..."

옅은 미소를 짓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다희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결국, 마지막 얼굴을 보는 것은 견디기 힘들 것 같아 조금 떨어진 곳에 멍 하니 서 있는데 딱 봐도 값비싸 보이는 차가 찌그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제대로 서 있는 차 중에는 그 차가 가장 뒷쪽에 있는 듯 싶었다.

자신처럼 죽은 듯 영혼이 빠져나온 한 부부는 척 봐도 부잣집인 듯 깔끔하고 단정한 옷매무새에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검은 정장의 사내가 다가오자 둘은 울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강 아직 이 아니는 때가 아니라는 듯 싶었다.

부부는 고개를 숙이고는 자신들이 저승으로 가는 길을 향해가고 있었다.

가만히 건너편에서 멍하니 차를 바라보던 다희의 눈이 일순간 커졌다.

차에 옅은 빛이 화악 비췄다 사라졌다.

그리고 차에서 사내가 나오자 얼마 안 가 구급대원들이 도착하는 것이 보였다.

무언가 있는 것이 확실했다.

도움을 청하려 소리를 질렀지만 남자는 빤히 그 아이만 보다가 이내 자리를 옮겼다.

"저기!!"

"가자."

달려나가려는 발목을 익숙한 목소리가 잡았다.

뒤를 돌아보니 쓰게 웃고 있는 엄마와 조용히 울고 있는 동생의 모습이 보였다.



다 끝나버렸다...







"가면서 그렇게 울고불고 난리를 쳤는데... 아무도 안들어줬어."

다희가 한울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작은 체구의 다희의 눈에서는 원망이 느껴졌다.

"내가 다시 가족들을 살리진 못해도... 너무 억울해서.. 누군가는 다시 행복해지고, 누군가는 계속해서 비참하게밖에 못사는게 너무 억울해서.."

다희를 빤히 보던 한울이 입을 열었다.

당황해서 움직이던 눈동자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미안... 어찌되었건 간에 그 행동이 너한테 상처를 준 건 사과할게."

"그렇다고..!!!"

"하지만."

무언가 억울한 듯 달려드는 다희의 말을 한울이 깔끔하게 잘랐다.

"그렇다고해서 네가 이렇게 굴어도 된다는 것은 아니야. 저승사자는 원래 사람의 생명에 관여할 수 없어. 네가 힘들게 산 것도, 또 마지막...마저 좋지 못했다는 것도 그래서 더 슬펐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저승사자들이 뭘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없었어. 네 사정을 안다고 해도 다들 널 도와주지는 않을 거야. 너는 억울하게 느낄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원래 죽는 것에만 관여를 하는 거니까."

한울은 살짝 한숨을 쉬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연지를 살린 건 명백하게 내 잘못이었고 나도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저기 저 세상의 가장 높으신 분한테 충분히 댓가를 치루고 이제야 행복해진거야. 연지를 살린 것과 산 거랑 너희 가족이 죽은 거랑은 아무 관련이 없어. 네가 연지랑 나한테 이렇게 굴 이유는 없다는 거야. 다시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나는 연지를 살릴거야. 하지만 이건 너희 가족이랑은 전혀 관련이 없어."

한울의 차가운 말에 다희의 몸이 분노로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럼....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건데!!!"

붉게 핏발 선 눈이 한울을 향했다.

"두고 봐. 이렇게 끝내진 않을 거야. 너희 모두 다 불행하게 만들어줄 테니까!!!"

무섭게 소리를 지른 원령의 눈이 다시 붉게, 검게 변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자신의 몸을 묶었던 것들을 모두 부수고 순식간에 사라져려버렸다.

세찬 바람이 순식간에 불어오는 듯 싶더니 눈을 떠보니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또 놓쳤네."

"아마 곧 다시 돌아올거야."

도비의 말에 한울이 대답했다.



"이번에는 절대 그렇게 허무하게 못 보내..."

다희가 사라진 곳을 보던 한울이 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채 중얼거렸다.

0
이번 화 신고 2016-09-24 17:09 | 조회 : 1,266 목록
작가의 말
브리사

오랜만입니다! 항상 연재가 늦는데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정말 감사드려요. 일교차가 크니까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감사합니다~

후원할캐시
12시간 내 캐시 : 5,135
이미지 첨부

비밀메시지 : 작가님만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익명후원 : 독자와 작가에게 아이디를 노출 하지 않습니다.

※후원수수료는 현재 0%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