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와!!!"
"꺄악!!! 멋지다!!! 한진욱!!!!"
꽤나 팽팽했던 경기는 마지막 세트까지 이어졌다. 조마조마 마음을 졸이던 중에 진욱이 이제야 몸이 풀렸다는 듯이 계속해서 득점에 성공하며 점수차를 내자 연지와 서연은 신나게 소리를 질렀다.
"한 번 더! 한 번 더!"
연지는 종이를 말아 입에 대고 목이 쉴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
"그래!!! 부셔버려!!! 잘 한다 한진욱! 잘생겼다 한진욱!!!"
그 옆에 선 서연은 자신의 곁에 남자친구가 있는 것을 까먹은 것인지 연지의 목소리가 묻힐 정도로 목청이 터져라 진욱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했다.
"그렇게 재밌어?"
한참을 경기에 집중하는데, 갑자기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연지의 몸이 휘청거렸다.
앞쪽으로 기울어지는 연지의 어깨를 감싼 한울이 입꼬리를 올리며 매력적으로 웃어보였다.
"내가 또 놀랄만한 외모긴 하지?"
"여...여긴 어떻게..."
분명 못 온다고 했었는데?
놀란 토끼마냥 잔뜩 커진 눈을 한 연지의 머리칼을 한울이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혹시나 해서 왔는데 역시나였네."
"네?"
알 수 없는 말에 연지가 되물었다.
"그런 거 있잖아. 운동하면서 땀흘리는 남자가 멋있다느니, 자기 일에 집중하는 남자가 멋지다느니 하는 말. 혹시나 해서 또 경기 보다가 열심히 땀흘리는 남자들한테 정신팔릴까봐 걱정되서 왔는데 정말 이렇게 넋 놓고 있을 줄 몰랐네."
얼 빠진 연지의 턱을 검지 손가락으로 가볍게 톡 치며 한울이 말했다.
"내가 얼굴로는 안 지는 것 같은데... 조금 서운하다. 아주 뻑 갔던데?"
"예?"
"한진욱!! 잘생겼다!!! 멋지다!!! 아주 옆에 친구랑 난리도 아니던데?"
자신이 응원하던 모습을 다 본 게 분명한 한울의 말에 연지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도 일할 때 장난 아니게 멋있는데, 이거 보여줄 수도 없고..."
오랜만에 제대로 마주한 웃는 얼굴이 반가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안 올 것 같이 굴다가 장난만 치는 한울이 미워 슬쩍 주먹으로 한울의 가슴팍을 쳤다.
"...올 거면 말을 해주지.."
"내가 오면 안 이러려고 했어? 이거 위험하네. 내가 안 보는 데서 뭘 하고 다니려고?"
한울의 말에 연지가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민 채 한울을 올려다봤다.
여지껏 자기가 맨날 바쁘다고 얼굴도 안 보여줬으면서...
"....안보이면 다른 남자라도 만나려고 했죠."
"뭐어?"
입술을 삐죽대며 받아치는 연지의 말에 한울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우와! 이거이거 안되겠네."
평소같은 장난기 많고 다정한 한울의 얼굴을 보자 여지껏 서러웠던 것이 복받쳐 올라오는 것 같았다.
꾸욱 참으려고해도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이 느껴졌다.
볼은 한울의 손에 잡혀서 늘어난 상태에서 점점 눈을 촉촉히 물들이는 연지를 보자 한울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스쳤다.
"자기가...자기가...막....얼굴...보여주지도 않고... 나한테..만..막...."
마지막까지 꾹꾹 누르려고 했던 마음이 자그마한 자극 하나에 펑 터져버렸다.
여지껏 자기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보이지 않으니 이런저런 생각으로 얼마나 걱정이 되었는지 전하고 싶은 마음은 한 가득이었는데.
이미 터져버린 눈물에 제대로 나오는 말은 하나도 없었다.
"끄윽...내가...내가 얼마나..."
결국 제대로 울지도 못하고 거칠어지는 호흡만 눌러 넘기는 연지를 한울이 가슴팍에 포옥 끌어 안았다.
"미안."
짧은 사과의 말에 연지의 눈에서 다시 퐁퐁 서러운 눈물이 떨어져나왔다.
이유를 제대로 알 수 없었던 악령이 붙은 것은 당연하게도 위험한 일이기는 했지만, 한울은 다른 어떤 때보다도 초조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연지를 지켜야한다면서 연지 곁에서 떨어져있기만 했었다.
게다가 자신의 잘못으로 연지가 그 원한의 타겟이 되었다는 사실에 누군가가 심장을 꽈악 쥐고 놓아주지 않는 것만 같았다.
"앞으로는 꼭 붙어서 지켜봐야겠다. 나를 잘 못보니까 눈만 낮아져서 아무나 보고 반해서 따라가면 안되니까."
연지의 자그마한 몸을 꽈악 껴안으며 한울이 말했다.
"잘 잤어?"
"네. 안녕히주무셨어요?"
조금은 나아진 솜씨로 음식을 데우고 있는 여울의 앞에서 핸드폰을 하던 하울이 부드럽게 웃으면서 연지를 바라봤다.
하지만 눈이 마주친 순간은 잠시 뿐.
짧게 대답한 연지가 안부를 물은 쪽은 여울이었다.
익숙하다는 듯 인사를 받아내며 연지의 앞에 음식을 차리는 여울의 모습을 보며 한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어제 그렇게 오랜만에 다시 얼굴을 보고 바로 다시 꿀이 뚝뚝 떨어지는 살가운 느낌이 풍기는 것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여울보다 못한 취급을 받을 줄은 몰랐었다.
당황해서 굳어진 한울의 얼굴이 안 보이는 건지 평소와는 다른 약간은 딱딱한 느낌의 연지는 먼저 음식을 삼키기 시작했다.
꽤나 살벌한 아침식사가 끝나고 연지가 방으로 올라가자 한울은 설거지를 하려는 여울을 붙잡았다.
"잠깐 얘기 좀 하자."
여울을 1층의 한 방으로 데리고 들어간 한울이 문을 닫자마자 질문을 쏟아냈다.
"어제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어제까지는 기분 괜찮아 보이지 않았어? 나 되게 반가워하면서 우는 것 너도 보지 않았어?"
"다른 얘기 했던 거 있는 거 아니야?"
"그 때 나만 빼고 밥 먹으러 갔을 때 뭐 있는 거 아니야?"
쏘아 붙이듯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오는 한울의 입을 여울이 손을 살짝 들면서 저지시켰다.
"저라고 뭘 어떻게 알겠습니까? 한울님께서 그렇게 지켜주시겠다고 말만하시고 코빼기도 안 보이시니 화가 나셨을 수도 있지요."
"뭐?"
"솔직히 그렇지 않습니까. 게다가 상대는 예민한 여성분이지 않습니까. 그것도 10대."
"......."
"당연히 서운하시기도하셨겠죠. 게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니까 화가 나셨을 수도 있고요. 확실히 알 순 없지만 속상해하셔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여울의 깔끔한 말에 말을 잃은 한울이 뒤늦게 한숨을 터뜨렸다.
"그래...그렇겠지.."
"그럼 저는 이만 나가서 영양제 챙겨드리겠습니다."
한울 홀로 남기고 방 문이 닫혔다.
투명한 유리컵에 물 반잔을 따르고 종합 비타민을 챙긴 여울이 정중하게 노크를 하고 연지의 방에 들어갔다.
멍하니 앉아서 창 밖을 보고 있던 연지가 인기척에 파드득 놀라 여울을 바라봤다.
"비타민 가져왔습니다."
"매번 감사해요."
"아닙니다."
여울에게서 비타민과 물컵을 받아들은 연지가 가만히 쥐고 여울을 바라봤다.
"저..."
"선배님께서는 괜찮으십니다. 그동안 마음고생 많이 하셨는데 이정도는 하셔도 됩니다."
"그래도....혹시나 해서요."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기분이 나쁘시면 그것 역시 표현하셔도 됩니다. 항상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니까요. 서운할 수도 있고,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생기시면 말씀하셔도 됩니다."
어젯 밤.
남자 품에 안겨서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연지를 놀리는 서연과 훈, 당당히 우승을 거머쥔 MVP 진욱 거기에 여울까지 함께한 축하기념 고기파티에서 한울을 제외되었다.
이것 저것 묻고 싶어보이는 게 많아 보이는 서연과 책망이 담긴 눈으로 보는 진욱과 여울때문에 한울이 자진해서 빠진 자리였다.
한울이 또 무슨 술수를 부렸는지 갑자기 나타난 남자친구에 대해서 친구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얼굴을 자주 못 봐서 속상해서 그랬다는 연지의 말에는 모두 열을 올렸다.
"화나거나 마음에 안 드는게 있으면 확실히 표현 해야 한다."
"맞아, 연지야. 그런건 말을 해야지 알지. 항상 맞춰주고 받아주는 게 좋은 게 아니야."
평소에 싫다고, 힘들다고, 불편하다고 잘 이야기하지 못하는 연지를 아는 친구들의 말에 여울도 연신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에 그간 서운했던 감정들이 생각나며 흔들리던 마음에
"계속 속상한데도 웃기만 하고 그래 봐. 내가 그 자랑하는 얼굴에 스파이크를 꽂아줄거니까."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하는 진욱이 쐐기를 꽂아버렸다.
"으~ 괜찮은 거겠죠?"
걱정되는 눈빛으로 여울을 올려다보자 여울을 당연한 얘기를 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셔도 됩니다. 왠만한 일은 신경도 쓰지 않는 분이신데다가, 감정은 잘 표현을 하셔야죠."
그렇게 말하고 연지를 쳐다보자 연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여울이 챙겨다준 알약을 꿀떡 삼켰다.
"게다가 나이차이가 몇 살입니까? 도둑놈도 그런 도둑놈이 없지. 평생 쩔쩔 매며 살아도 쌉니다."
여울의 물음에 물을 더 넘기던 연지가 사레가 걸려 연신 기침을 뱉어냈다.
맞는 말이기는 한데, 왠지 말에 다른 감정이 섞여있는 것 같았다.
"콜록콜록-"
연지의 등을 조심스레 톡톡 쳐주던 여울은, 연지의 기침이 조금 진정이 되자, 살짝 눈인사를 하고는 방 밖으로 나갔다.
"....."
표정만큼이나 깔끔하게 방 밖으로 나가는 여울을 연지가 멍하니 바라봤다.
오빠...도대체 후배한테 무슨 짓을 하셨던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