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이대로

"뭐?"

떨떠름한 것을 씹었을 때처럼 진욱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네가 말했잖아. 연지가 원한 살 짓을 하지는 않았다고. 갑자기 그런생각이 들어서. 딱히 그 저승사자의 문제라기 보다는 아마 어떠한 행동 때문에 혼자 가지고 있던 분노가 폭발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개인적으로 연지나 그 저승사자가 무언가 잘못을 했다기 보다는 관련이 있었던 어떤 사건으로 인해 원한을 품은 것 같아."

"....."

"그리고, 저승사자라는게 어쨌든 좋은 기억을 만들어 주는 쪽은 아니잖아."

의도 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불쑥 화가 치미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머리가 지끈 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만약 개인적인 원한의 것이라면 오히려 나았겠지만, 이렇게 원인도 모르는 상황이니 최선의 방법은 방어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정도 기운이라면 쉬운 녀석이 아닐터.

"....하..."

가만히 다물어져있던 진욱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럼, 우선 둘을 떼어 놓는 게 나을지도..."

가만히 앉아 있던 진욱이 중얼거렸다.

어찌되었건 간에 문제가 되는 상대와 떨어뜨리면 연지는 안전하지 않을까?

"그건 성급한 것 같아. 아직 그 이유가 그 저승사자 때문이라고 확실히 단정지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일단은 그쪽의 보호아래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도 최선을 다해볼게."

도비는 진욱의 눈치를 보며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이번에도 내가 할 수 있는게 있을지 모르겠네."

진욱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때와 그리 다를게 없었다.

지금도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못했고, 무언가를 할 만한 힘도 없었다.

여전히 자신은 길도 보이지 않았고, 힘도 없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 내가 반드시 지킬 거니까."

괴로운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눈의 한 구석이 열기로 빛나고 있었다.

도비는 그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진욱의 두 손은 꽈악 쥐어진 채로 핏줄이 잔뜩 올라와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무거운 침묵이 도비와 진욱의 사이를 감돌았다.







아무래도 무언가 잘못 되었음이 확실히 나는 냄새가 나자 결국 연지도 부엌으로 들어섰다.

말끔하게 생긴 여울의 손에서 들어간 재료들은 그것이 무었이었는지 조차도 모를만큼 만신창이가 되어 나왔다.

"아, 진짜! 도대체 무슨 짓을 해야지 이렇게 되는 거냐?"

한울이 진지한 표정으로 쓰레기를 만들고 있는 여울에게 소리를 질렀다.

같이 지낼거면 손을 보태야 한다고 하자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인 여울이었다. 그에 앞으로 이런저런 일을 시킬 궁리를하며 홀로 작게 웃었던 한울이었지만, 그 기대는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너 일부러 이러는거지? 내가 일 시키는 거 마음에 안들어서 작정하고 이러는 거 아니야?"

"아닙니다. 저는 알려주신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내가 알려주는 대로 했는데 왜 이렇게 결과물이 다른거야? 도대체 뭐야? 단율이랑 그 능글맞은 인간이 나 화병으로 죽이라고 했어?"

"죄송합니다. 다시 한 번 해보겠습니다."

생김새만큼이나 담백한 사과를 했다.

사과를 받기는 했지만, 너무나도 깔끔해서 한울은 머리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그해서 또 다른 고기에 손을 뻗으려고 하자 한울이 재빨리 손을 잡아챘다.

"됐어. 그러다가 밥 못먹는다. 나가 있어."

포기한 듯 한숨을 쉬는 한울을 빤히 쳐다보던 여울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 거실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 죄송합니다."

"아, 아니에요."

연지와 눈이 마주치자 조금 더 허리를 숙였다.

당황한 연지가 괜찮다고 손을 내저었지만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떠났다.

"으~ 왜 그렇게 구박했어요."

"내가 지금 안 그러게 생겼어? 너 먹이려고 제일 좋은 고기로 사왔는데 이것 좀 봐봐. 간단하게 살짝 굽기만 하면 되는 건데, 잠깐만 눈을 떼면 못 먹게 되어 있어. 손에 뭐 귀신 씌인 것 같다니까?"

연지의 말에 한울이 싱크대에 버려져있는 검게 탄 고기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느 정도면 괜찮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었지만 정말 인간이 먹지 못할 정도의 고기에 편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그래도요. 민망해하실거에요."

연지가 처참한 고기들에게서 눈을 돌리며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지금 계속 저 녀석 편만 드는 거야?"

살짝 뾰로통하게 나온 입술에 연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그게 아니잖아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나저나 남자친구는 놔두고 오늘 처음보는 거 너무 편들어 주는 거 아니야?"

애 마냥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고는 투덜거리는 한울의 모습에 연지가 웃음을 터뜨렸다.

한울은 장난을 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능글거리는 놀림이었고 문제가 생기면 듬직함을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요즈음은 저렇게 아이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더 가까워 진 것 같아서 그저 웃음이 났다.

"아니에요."

"뭐가 아니야."

한울은 아프지 않게 연지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그렇게 분홍빛이 올라오며 베시시 웃어보이는 얼굴에, 같이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게 말로만 아니라고 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럼 어떻게 해요."

연지가 귀엽게 삐죽거리며 이야기하자 한울이 고개를 숙여 입을 맞댔다.

자기의 양 볼 처럼 예쁜 분홍빛 입술을 살짝 맛 본 한울이 눈을 맞추고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이렇게 해야지."

"뭐, 뭐에요! 갑자기!"

"갑자기 안하면, 물어보고 해? 그러면 더 부끄러워 할 거면서."

씨익 웃은 한울이 연지를 꼬옥 껴안았다.

자신에게 맞춘 듯 딱 제 품에 들어오는 연지의 이마에 다시 한 번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여울이 녀석이 도와주러 온 건 맞지만, 그렇다고 불편해하거나 미안해하 필요는 절대 없으니까 눈치보지 마. 그럴수록 저 녀석 더 괴롭힐 거니까."

은근슬쩍 편을 들게 되는 이유가, 괜히 자신때문에 이곳에 오게 한 것 같은 미안함이라는 것은 귀신처럼 알아낸 한울이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자신이 왜 그런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리고 세심하게 배려를 해 주는 것이 정말 사랑을 받는 것 같아 한울의 허리를 조금 더 힘을 줘서 끌어당겼다.

"또... 지금같은 일 겪게해서 미안해. 놀고싶고 그래도 조금만 참아. 끝나면 같이 바다 놀러갈까?"

첫 말이 끝나고 약간 뜸을 들이던 한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자신이 이 아이를 그렇게 살리지 않았다면 겪지 않아도 될 일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지만, 또 다시 그 상황으로 가면 똑같이 이 아이를 살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괜한 자신의 이기심에 불편하게 지내는 게 못내 미안했다.

"네! 그리고... 어차피 활동적인 성격도 아니고 딱히 불편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미안하면 이따가 아이스크림 사다주세요."

장난스레 이야기를 하고는 부끄러운지 총총 뒤돌아 사라졌다.

따뜻한 마음들이 만든 기분좋은 분위기가 가득 채운 거실에 선 한울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어떤 고난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계속 이대로 행복하길.

0
이번 화 신고 2016-07-03 17:33 | 조회 : 1,264 목록
작가의 말
브리사

안녕하세요, 브리사입니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ㅠㅠ 이번 학기는 공강도 없이 빡빡한 수업을 듣고, 과제와 시험에 치이다가 이렇게 늦게 오게 되었습니다. 오랜시간 기다려주신분들께 정말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후원할캐시
12시간 내 캐시 : 5,135
이미지 첨부

비밀메시지 : 작가님만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익명후원 : 독자와 작가에게 아이디를 노출 하지 않습니다.

※후원수수료는 현재 0%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