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혼란스러움

여름치고는 꽤나 선선한 바람이 창문을 타고 들어왔다.

커다란 침대 위에서 서로를 마주본채로 색색 숨을 내 뱉는 두 남녀의 머리카락을 살포시 쓰다듬도 다시 밖으로 나갔다.

동화 속 시간이 멈춘 세상의 주인공들처럼 마냥 행복한채, 평온한 채 남아있을 것 같은 그 순간을 먼저 깬 것은 지현이었다.

"으음...."

잘 잔 몸을 기분 좋게 뻗으려하는데 자신의 손이 무언가에 잡혀있다는 것을 깨달은 연지가 화들짝 놀랐다.

번쩍 떠진 눈에 들어온 것은 처음 보는 한울의 잠든 모습이었다.

왜 이 사람... 아니, 이 저승사자가 자신의 침대 위에 있는 것인지 머리속을 꽉 채운 의아함은 곧 궁금증에 밀려 나갔다.

인간처럼 보이게 되면 인간이랑 비슷해지는 건지 한 번도 자지 않던 한울이 규칙적인 숨을 내쉬며 잠에 푹 빠져있었다.

잡혀있는 자신의 손보다 몇 배는 예쁜 희고 고운 손으로 자신의 손을 폭 감싸안고 웅크린 채 몸을 웅크린채 자는 모습에 왠지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도 같았다.

저번에 잠에서 깨어서 진욱을 처음 봤을 때 마음이 욱신거리는 그것과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

'왜 이러지...'

잡히지 않은 다른 쪽 손으로 자신의 옷깃을 꾹 잡은 연지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이 둘과 예전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건가....

한울의 평온한 표정과 상반되는 파동이 일었다.

몇 번 심호흡을 하고는 괜찮다는 의미로 자신의 가슴을 조용히 몇 번 토닥인 연지가 다시 한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뽀얀 피부에 살포시 내려 앉은 검은 속눈썹은 숱도 많고 자신의 것보다도 길었다.

머리카락도 마찬가지였다.

씻지를 않으니 딱히 관리하지도 않는데 윤기있고 찰랑거렸다.

얇은 머리카락이 얼굴이 흐트러진 채 누워있지만 확실히 이목구비도 뚜렷한 잘생긴 얼굴을 가릴 수는 없었다.

맨날 자신이 잘생겼다느니 소리에 이상한 소리 말라고 화를 냈지만 정말 잘생기긴했다.







한편, 다시 인간의 모습을 가지게 된 후 처음으로 꿈을 꾸게 된 한울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몇 백년만에 꾸는 꿈이라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운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냥... 왠지 아련한 장면들이었다.

넓고 푸르른, 지평선이 보이는 곳에서 현재의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사내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웃고있었다.

뭐가 그렇게 급한지 같이 가자고 소리치며 뒤따르는 몸종과 한참이나 떨어져 뛰어다니 듯 걷고 있었다.

초록빛이 가득한 무성한 갈대숲을 잔뜩 들뜬 얼굴로 헤치며 지나며 걸음에 속도를 더 빨리했다.

바람과 함게 스쳐 지나가는 갈대풀들의 촉감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쿵쿵.

두근거리는, 들뜬 그 기분이 자신에게도 오롯이 닿아왔다.

조금 더, 조금 더 신나게 걷자 어느새 공터와 같은 곳이 나왔다.

노란 저고리에 벚꽃잎 같이 여리고 사랑스러운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고동색의 결 좋은 머리를 붉은 댕기로 예쁘게 땋아내린 머리를하고 있었는데, 그 틈에 살짝 보이는 분홍빛의 귀도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아가씨!! 도련님 오셨습니다!"

자신과 먼저 눈이 마주친 예쁘장한 얼굴의 몸종이 밝게 웃으며 제 주인인 듯 한 그 소녀에게 말했다.

그 소리에 살랑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소녀가 빛에 가리워진 고개를 돌렸다.

가슴속에서 커다란 북이 울려퍼지는 것 같았다.

신기한 황홀경에 젖어 소녀의 얼굴을 보려는 순간 장면이 바뀌어 버렸다.

아까의 구름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 순식간에 땅바다에 곤두박질쳤다.

어둡고 축축한 곳에서 가슴이 찢길 듯한 슬픔이 느껴졌다.

"으....으...."

펑펑 소리내어 울지도 못하는 듯 했다.

끅끅 거리는 소리만 내며 제대로 울음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저 자신의 품안에 있는 사람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한울은 직감적으로 품 안에서 있는 사람이 소녀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 넘치게 느껴지는 따뜻한 것이 소녀의 피라는 것도 알았다.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절망감에 숨을 쉬는 것도 힘들었다.







"으....으...."

행복한 듯이 잘도 웃으며 자고 있던 한울의 표정이 어두워 지는 듯 하더니 이내 눈물이 새어나오며 끙끙거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괴로워하는 탓에 당황한 연지는 몸을 일으키고는 한울을 흔들기 시작했다.

"왜 그래요?! 일어나요! 아, 저... 한.. 한울 오빠?"

자신의 손을 쥔 손에 꽈악- 힘이 들어갔다.

핏줄까지 올라올 정도로 잡고있는 탓에 연지의 손도 분명 아플 때지만 지근 연지는 조금의 아픔도 느낄 수 없었다.

"일어나봐요!!"

아까 보다 좀 더 세게 흔들었지만 여전히 끙끙거리며 식은땀을 흘릴 뿐 눈을 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서원아... 서원아..."

주륵주륵 눈물을 흘리는 한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어떤 여자의 이름이었다.

".....괜찮아.. 괜찮아요. 일어나요."

영문 모르게 아릿하게 저려오는 가슴에 잠시 멈칫 했지만 힘들어보이는 모습에 조금 더 급박하게 이름을 부르며 한울의 손을 조심스레 쓰다듬자 괴롭다는 듯 꾹 감겨있던 두 눈이 천천히 떠졌다.

"하아...."

눈물때문에 흐렸던 눈에 잠시 뒤 연지가 담기자 한울은 안도감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요? 무슨 나쁜 꿈이라도 꾼 거..."

한울은 자신이 잡고 있던 손을 잡아당겨 연지를 품에 안았다.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당황한 연지는 눈만 꿈뻑꿈뻑 거렸다.

".......!!!"

그러다 자신이 한울에 품에 안겨있다는 것이 인지가되자 얼굴이 머리 끝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고 눈을 뜬 것도 모자라 아침부터 포옹이라니!!!

"아..저기...이건 좀..."

막 악몽에서 일어난 사람에게는 미안했지만 너무 민망해서 조심스레 한울의 몸을 밀어내자 자신을 안고 있던 한울의 손이 힘없이 스르르 풀리더니 이내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나갔다.

"아, 미안. 혼란스러워서...."

평소와는 다르게 말꼬리를 늘이며 힘 없이 입꼬리를 올려 웃는 모양이었다.

마음대로 휘둘렸으니 당연히 사과를 받아야하는 일이었다.

"........"

그런데 왠지...

"미안해."

그 말이, 연지에게는 지금 그 일이 자신과는 관계 없는 일이라고 선을 긋는 느낌이들어 연지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연지의 마음을 모르는 한울은 평소와 다르게 우울하게 앉아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연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고3이라 스트레스를 받아 그런가하고 생각도 들었지만 아무래도 저 얼굴이 걸렸다.

게다가 아침부터 추태를 부린 것 같아 미안해서 일부러 좋아하는 닭볶음탕까지 서둘러 만들었는데 손도 대지 않은채였다.

"내가 침대에 말도 안 하고 올라가서 자서 그래?"

"....아뇨."

밥을 먹지 않고 쿡쿡 찌르면서 연지가 작게 대답했다.

"아니면 내가 잘때 코 너무 많이 골거나 그랬어? 이 갈았다던가?"

"아뇨."

"아님 혹시.... 내가 잠꼬대로 너 욕했어?"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물어오는 한울에 연지가 탁! 소리나게 젓가락을 식탁에 올려놓았다.

"무의식적으로 저 욕할 정도로 평소에 절 안 좋아하셨나봐요. 잘먹었습니다. 공부해야하니까 방해하지마세요."

우다다다 자신이 할 말을 내뱉고 살짝 고개를 숙인 연지는 방에 들어와 문을 꼭 잠갔다.

그리고 터덜터덜 의자에 앉아 침대를 노려봤다.

"그냥 처음에 깨울걸...."

자신이 그 저승사자와 무슨 관계도 아닌데...

아까 욱신거렸던 통증이 기억이 나자 연지가 가슴께의 옷을 꾹 잡았다.



"맛있는 거나 먹어야지."

괜한 걸로 뚱해있는 것이 자신도 이해가 안되고 한울에게도 폐가 되는 것 같아 훨훨 털어버리자는 생각으로 연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어딘가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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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9-25 13:29 | 조회 : 1,530 목록
작가의 말
브리사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도 정말 감사드려요~//지현이라는 이름은 수정했어요. ㅠㅠ 혼란스럽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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