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3장 드라마틱(Dramatic) - (1)

“컷! 오케이, 다들 고생들 하셨습니다.”

흡족한 표정으로 오더를 내리는 감독의 한 마디에 모든 스태프들과 배우들은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보였다.

“수고하셨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인사들이 오고가며 촬영의 뒷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차분하게 짐을 정리하는 스태프들과 마찬가지로 배우들 역시 간단히 인사를 나누며, 뒷마무리를 하기 시작했다.

“선배님, 수고하셨습니다.”
“으응, 수고했어.”

깍듯이 허리를 숙여 보이는 배우들의 인사를 받으며 선배로 불린 여배우는 싱긋 눈웃음으로 답했다. 20대의 배우들이 깍듯이 대하는 것으로 보아 여배우의 나이는 최소 30대 일 것이 분명했지만, 그녀의 모습은 전혀 그렇지 보이지 않았다. 밝은 갈색의 긴 웨이브진 머리칼, 커다란 흑갈색의 눈망울, 오뚝한 콧날과 갸름한 턱선, 불그스름한 체리빛 입술에 밀가루를 찍어 바른 듯한 하얀 피부와 육감적인 굴곡진 몸매까지. 40대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보이는 건 30대 초반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동안의 미인이었다. 척 보기에도 어엿한 여배우의 느낌이 물씬 풍긴 달까? 중년 배우의 여유와 아름다움이 배어있는 배우의 모습에 스태프들은 물론, 후배 배우들까지 마른 침을 삼켰다. 남녀를 불문하고 고혹적인 매력을 자아내던 여배우는 이윽고 근처 의자에 몸을 기대며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스마트폰엔 한 쌍의 남녀 사진이 떠올라 있었다.

“누나 또 자제 분들 보고 계시는 거예요?”
“그럼 얼마나 예쁜데.”

매니저일까? 그녀가 의자에 몸을 기대자마자 곁에 있던 한 남자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달싹이자, 여배우는 환한 미소로 답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발단이 된 것인지 여배우는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자식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봐봐, 당장 연예인 시켜도 될 정도라니까. 잘 생겼지, 예쁘지, 착하지, 똑똑하지, 운동 신경 뛰어나지......”
“네네,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젠 다 외울 정도예요.”

한두 번 하는 것이 아닌, 늘 입에 배어 있는 말들이었는지, 그녀의 뒤에서 그녀의 머리를 정리해주던 그녀의 스타일리스트의 입에서 한숨 섞인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정말 질린 듯한 반응을 보이며 고개를 젓는 그녀의 모습에 여배우는 슬쩍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너희가 직접 봐봐야 돼.”
“그러게요. 그러니까 그 아드님하고 따님 좀 소개시켜주시라니까요.”
“안 돼! 우리 애들이 어떤 애들인데.”
“치, 그렇게 꽁꽁 숨기고 안 보여주실 거면서 어떻게 직접 봐요.”

소개시켜주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빽 하니 소리를 지르는 여배우, 그런 여배우의 모습에 그녀의 스타일리스트는 입술을 삐죽 내민 채로 조그맣게 툴툴거렸다.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그녀의 말에 조금 삐친 것이다. 그 모습에 조금 미안해 진 것인지 여배우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그건 그렇긴 한데......”
“됐어, 누나가 그러시는 것도 한두 번이냐? 포기해. 포기하면 편해.”

한쪽 뺨을 긁적이며 말 꼬리를 흐리는 그녀의 모습에 남자는 살펴보던 일정표를 내려 덮고 고개를 저어보였다.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매니저는 이미 포기한 상태였다. 그의 의견에 동조하는 것인지 스타일리스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게 더 낫겠네요.”
“이것들이...... 나중에 딴 소리 하기만 해봐. 칫!”

결국 그런 두 남녀의 반응에 여배우는 토라진 듯이 홱하니 고개를 돌렸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반응이었지만, 얼굴이 되니 그마저도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세트장의 분위기는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기들끼리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대화를 나누고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으니 말이다. 고된 촬영의 끝나고 잠시 생긴 여유이니 무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세트장 가득히 울려 퍼지는 감독에 의해 그러한 분위기는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뭐라고? 장소 협찬이 불가능해졌다고.”

비명에 가까운 감독의 일갈. 갑작스레 터져 나오는 그의 일갈에 세트장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다음 촬영일은 당장 내일. 미리 예정된 촬영일이기에 장비와 스태프, 배우들의 스케줄 등등 그 모든 것이 예정된 촬영에 맞춰져 있었건만, 장소 협찬이 불가능해진다면 이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어떻게 안 돼? 당장 내일이 다음 촬영일인데 이제 와서 안 된다고 그러면 어쩌잔 말이야.”

장소 협찬이 무산 되었을 때의 여파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감독이기에 그는 간절한 모습으로 말을 이어나갔지만, 되돌아오는 건 부정의 말일 뿐이었다.

“스태프 분들 전원 잠시 이쪽으로 모여 주십시오.”

딱딱하게 표정을 굳힌 채, 힘없이 소리치는 감독. 그런 감독의 한 마디에 스태프들은 감독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회의를 시작할 뿐이었다.

“이거 상황이 심상치 않은 데요?”
“언니 이러다 촬영 완전히 취소되는 거 아니에요?”

심상치 않은 무거운 분위기에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는 여배우를 향해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였다. 촬영이 완전히 취소될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인지 둘의 목소리는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중압감마저 감도는 분위기 속에 여배우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다만 다른 이들과는 달리 그녀의 눈동자에 감돌고 있는 것은 불안감이 아닌 기회를 노리고 있던 한 마리 매와도 같은 눈빛이었다.

“다음 촬영지, 원래대로라면 카페 맞지?”
“네? 네, 그랬죠.”

갑작스런 여배우의 물음에 매니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성실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대답과 동시에 여배우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너희 내일 우리 애들 눈독들이기만 해봐.”
“......네?”

난데없이 영문을 모를 말을 늘어놓는 여배우의 한 마디에 두 남녀의 얼굴에 의문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한 의문을 해소할 틈도 없이 여배우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스태프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역시 대번에 뾰족한 수가 나오기는 힘들었는지 감독을 비롯한 스태프들의 표정은 쉽사리 펴질 줄을 몰랐다.

“감독님.”
“네? 무슨 일이시죠.”

여배우의 말에 감독의 얼굴이 잠시나마 펴졌다. 하지만 그것은 배우들에게 불안감을 주지 않기 위한 일시적인 가면에 불과할 뿐이었는지, 감독의 얼굴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역시 아무리 모든 스태프들을 동원해도 당장 내일 촬영을 위한 장소 협찬을 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수심이 가득한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여배우는 회심의 미소와 함께 입술을 달싹였다.

“다음 촬영 장소 협찬, 제가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 그게 정말입니까?”

세트장을 가로지르는 그녀의 한 마디, 조심스럽지만, 명쾌한 그녀의 한 마디에 모든 스태프들은 물론 모든 관계자들의 그녀에게로 집중되었다. 자연스레 자신에게로 모여드는 시선에 약간의 부담감을 느끼면서도 여배우는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네, 실은 우리 아들이 대학로에 카페를 운영하고 있어서요. 분위기도 괜찮고 크기도 원래 계획된 곳이랑 비슷해서, 아마 조건만 맞으면 충분히 협찬 받을 수 있을 거예요.”

그녀의 말에 감독의 눈에 띄게 밝아졌다. 미리 촬영이 계획되었던 곳과 크게 다른 점도 없고 위치한 곳도 대학가라면 간접적으로 미리 영화 홍보까지 되니 그에게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조건은 저희 쪽에서 얼마든지 맞춰 드리겠습니다. 혹시 아드님께 부탁 좀 드릴 수 있겠습니까?”

간절한 표정으로 고개까지 숙여 보이는 감독의 모습에 여배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부모 된 입장으로서 최대한 조건을 맞춰주겠다는 감독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알겠습니다. 제가 아들한테 잘 말해 볼게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말이 그렇게 고마웠던 것일까? 감독은 그녀를 향해 연신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과하게 감사를 표하는 그를 적당히 말리고서 여배우는 환하게 웃음을 머금은 채로 자리로 돌아섰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한명의 여인이었다. 오른쪽으로 쓸어 넘긴 붉은빛이 감도는 갈색의 단발 머리칼, 무심한 듯, 시크하게 빛나는 검은 눈동자, 은은한 윤기가 흐르는 뽀얀 피부, 매끈한 콧날과 갸름한 턱선, 선홍빛이 감도는 작고 도톰한 연분홍색 입술, 늘씬한 몸매까지. 뭇 남자들의 마음을 훔치기에 부족함이 없는 도도한 매력의 아름다운 여인으로 제작 중인 이 영화의 또 다른 여주인공이었다.

“지혜 씨, 무슨 일 있으세요?”
“예? 아, 아뇨. 잠시 딴 생각 좀 하고 있어서요.”

상대 남자 배우의 물음에 도도한 매력을 물씬 풍기던 여배우, 지혜는 금세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환한 그녀의 표정과는 달리 그녀의 머릿속은 냉혹하기 그지없었다.

‘하, 이놈이고 저놈이고 남자들이란 진짜......’

겉으로는 미소를 지으면서도 속으로는 남자들을 싸잡아 헐뜯으며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저 외모만을 바라보고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남자들의 작태에 그만 질려버리고 만 것이다. 덕분에 그녀는 남자라면 정말 치를 떨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남자들의 고백이라면 셀 수도 없이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서른에 가까운 나이에 연애 한 번도 하지 못했으니 이만하면 말 다했다. 같은 배우임에도 지긋지긋하게 접근하는 상대 배우의 모습에 지혜는 다시금 낮게 혀를 찼다.

**********************

“......그래서, 당장 내일 카페를 빌려 달라고요?”

감독에게 장소를 협찬 받을 수 있다고 큰소리 뻥뻥 친 철없는(?) 모친, 서현의 말에 은성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로 그녀의 간절한 대답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응, 그러니까 아들 한번만 부탁해. 이미 스태프들한테 빌리겠다고 다 말했단 말이야.”
“그러니까 그걸 왜 제 허락도 없이 그러세요!”

한 글자 한 글자씩 툭툭 끊어 말하며 은성은 낮게 으르렁거렸다. 아무리 간접 광고가 되고 협찬에 대한 대여비도 생긴다지만, 그걸 미리 상의조차 하지 않은 채 독단으로 정해버리고 일방적으로 통보해버리니 그의 입장에서도 화가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 역시도 그런 점을 잘 알고 있는 것인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미안, 엄마가 잘못 했으니까 한번만 해주라. 다음엔 꼭 미리 말하고 할 테니까. 응?”
“후, 알았어요. 낼 몇 시 부터 촬영인데요.”

결국 언제나 지는 것은 아들인 은성이었다. 그래도 남도 아닌 엄마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한층 누그러든 그의 말투에 서현은 잽싸게 입술을 달싹였다.

“10시부터야. 오후까지 계속할 것 같은데 괜찮아?”
“후, 어쩔 수 없잖아요. 그럼 일찍 가서 준비해 놓을 테니까. 그때 봬요.”
“응, 아들 사랑해! 내일 보자.”

반쯤 포기한 어투로 중얼거리는 은성의 말에 쏜살같이 대답하고서 서현은 전화를 끊었다. 행여나 아들의 마음이 바뀔까 금세 도망치듯 전화를 끊는 그녀의 모습에 은성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내일 오빠네 카페에서 촬영하는 거야?”
“아마 그럴 것 같은데.”

샤워를 마친 채, 잠자코 듣고 있던 예린의 물음에 은성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별 신경 안 쓴다는 듯한 무심한 대답이었지만, 그녀는 조용히 눈빛을 빛낼 뿐이었다.

“나도 내일 오빠네 카페 갈래!”
“안 돼! 너 학교는 어떡하고.”

당연하게도 그녀의 한 마디에 곧바로 그의 입에서 반박의 말들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그러한 이유는 조금도 소용이 없었다.

“내일 토요일이라 학교 쉬거든!”
“아......”

빽하니 소리를 지르는 그녀의 모습에 은성은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설마하니 내일이 토요일일 줄이야. 거의 매일을 카페에서 일하다 보니 날짜 감각이 무뎌진 것이다. 결국 별다른 이유를 생각해내지 못한 은성은 끝내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후, 알았어.”
“아싸!”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은성의 모습에 예린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오래간만에 한국으로 귀국해서 연예인을 볼 수 있다는 행운에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피식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은성은 곧이어 스마트폰 위로 떠오른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어? 오빠 뭐해.”
“뭐하긴, 일이 이렇게 됐으니 애들한테 내일은 그냥 쉬라고 해야지.”

뚱한 표정으로 태연히 입술을 달싹이는 그의 모습에 예린은 슬며시 고개를 저었다.

“내버려둬, 내일은 오지 말라고 해도 올걸? 그리고 오빠 혼자하면 손이 부족하기도 하고.”
“응?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런 게 있어.”

능글맞은 미소를 지은 채, 대답을 아끼는 예린. 그런 그녀의 모습에 은성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예린은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지으며 슬그머니 그의 시선을 피했다.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다. 그치 오빠?”
“별로.”

기대되는 눈빛으로 어깨를 으쓱이는 예린의 모습에 은성은 무심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정작 내일 어떤 일이 닥칠 지 조금도 예상치 못한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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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9-08 17:51 | 조회 : 919 목록
작가의 말
류운

일교차가 너무 심하네요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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