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2장 골목길의 인연 - (6)

“자, 여기.”

과연 바리스타의 집이라 할까? 늦은 시간임을 고려한 것인지 은성은 집 안에 있던 핸드 드립기를 이용해 디카페인 커피를 준비해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달달한 것을 좋아하는 고교생의 입맛을 고려한 것인지 커피도 캐러멜 마키아토였다. 그런 은성의 배려에 예린은 환한 함박웃음을 지은 채로 식탁 위에 놓인 찻잔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와아, 잘 먹을게 오빠.”
“뜨거우니까 천천히 마셔.”

확실히 오빠는 맞는 것인지, 예린을 챙기는 그 모습이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녀를 잔뜩 걱정하면서도 꽤나 피곤했던 것인지 은성은 자신의 몫의 찻잔을 홀짝였다. 쌉싸래하면서도 달콤한 캐러멜 향이 입안을 가득히 채운 뒤, 식도를 타고 넘어간다. 천천히 커피의 향과 맛을 즐기고 나서야 은성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향해 운을 떼었다.

“이제 말해 봐.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흐응? 뭘 말이야.”

조심스런 그의 물음에 예린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은 채로 아무 것도 모르는 척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은성은 한숨을 내쉬며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너 말이야. 네가 여기 왜 있는 거냐고.”
“헤헤, 별 거 아닌데.”
“별 거 아니긴. 너 미국 유학 중이었잖아. 그런데 갑자기 왜 우리 집에 있는 거냐고.”

자꾸 딴 소리 하는 예린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은성은 조금 눈살을 찌푸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예린은 능글맞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 의자 뒤로 몸을 기댔다.

“당분간은 한국에서 학교 다니기로 했어.”
“하?”

당돌한 그녀의 고백에 은성은 자기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말았다. 하긴 무리도 아니었다. 잘 하고 있던 유학 생활을 왜 갑자기 그만둔단 말인가! 일반적인 범인(凡人)인 자신과는 달리 그녀는 꽤나 상위권의 성적을 보유하고 있었다. 합당한 이유가 아니라면, 그 성적이 너무나도 아까울 정도로 말이다.

“갑자기 왜?”
“그게 엄마랑 아빠, 오빠도 못 보고. 매일 시리얼에 빵이나 먹으니 질린단 말이야.”

양 볼을 가득 부풀린 채로 고개를 돌려 웅얼거리는 예린의 모습에 은성의 어깨에 힘이 쭉 빠졌다.

“......겨우 그런 이유로?”
“겨우 그런 이유라니!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김빠진 은성의 말에 이번엔 예린이 발끈했다. 하긴 자기 고통은 자기가 제일 잘 아는 법이었다. 남이 이래라 저래라 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은성은 끝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엄마랑 아빠는 허락하신 거야?”
“잠깐만... 자!”

이미 반쯤 포기한 듯한 은성의 물음에 예린은 스마트폰의 화면을 몇 번 두드리고 그대로 은성에게로 건넸다. 스크린 화면에 떠오른 것은 ‘어마마마♥’라고 적혀 있는 통화 연결 화면이었다. 스마트폰 너머로 들려오는 경쾌한 컬러링에 은성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스마트폰을 받아들었다. 이윽고 몇 번의 연결음이 오가고 익숙한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응, 딸래미. 전화 했어?”
“엄마!”

곧바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은성의 입에서 분기 어린 일갈이 터져 나왔다. 갑작스런 일갈에 놀란 것인지 수화기 너머의 여인, 그와 예린의 모친 ‘김서현’에게서 당혹성이 흘러나왔다.

“아 깜짝이야. 아들 갑자기 그렇게 소리치면 어떡해?”
“딴 소리 말고! 예린이 어떻게 된 거에요. 왜 미국 유학 같던 얘가 왜 우리 집에 있는데.”

자신의 안식처가 방해 받았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은성의 목소리엔 날이 잔뜩 서있었다. 그런 은성의 목소리 톤을 눈치 챈 것인지, 서현은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난 또 뭐라고, 그것 땜에 이렇게 소리 지른 거야?”
“제대로 설명해요. 이번엔 그냥 안 넘어 갈 테니까.”

냉정하게 파고드는 비수와도 같은 한 마디. 수화기 너머 임에도 불구하고 서늘한 한기를 풀풀 풍기는 그의 한 마디에 서현은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한동안 동생 잘 봐야 돼. 알았지 아들?”
“엄마!”
“그럼 힘들다는데 어떡하니? 계속 있는 것도 아니고 길어야 1년 정도만 있을 거야. 게다가 너희 아빠도 이미 허락했고.”

아빠가 허락했다는 말 때문일까? 당장에라도 따지려 하던 은성의 기세가 사그라들었다. 서현의 말이라면 조금 못 미덥긴 했지만,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인 아빠 ‘천수혁’이 허락했다면 그로서도 그렇게 많은 불만은 없었다. 자식들에게 한없이 관대한 아버지이긴 했지만, 공과 사는 철저히 구분하며 항상 신중하고 철두철미한 성격인 그의 결정을 믿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모든 것을 인정할 수는 없는 것인지 은성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다시금 말을 이어나갔다.

“후우, 그럼 왜 하필 우리 집인데요.”
“엄마랑 아빠는 일 때문에 바빠서 집에 자주 못 들어가잖니. 그래도 너는 매 끼니도 잘 챙겨먹고, 퇴근 시간이랑 맞추면 예린이랑 같이 집에 갈 수 있으니까 엄마도 안심이 돼.”
“그, 그렇지만......”

확실히 그럴 듯한 그녀의 설명에 은성의 말 꼬리가 점점 희미해졌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주장에 쐐기를 박듯이 서현은 은성을 향해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그리고 넌 오빠잖아?”
“윽......”

차마 부정할 수도 없는 현실에 결국 은성은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수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그 말을 그로서는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지 않는 목소리에 서현은 연이어 말을 이어나갔다.

“짐은 미리 다 보내놨어. 전학 수속이랑도 다 무사히 마쳤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조금만 부탁해 알았지 아들?”
“에휴, 알았어요.”

이미 거의 모든 것을 체념한 상태로 은성은 고개를 푹 숙였다.

“응응, 아들 엄마가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알았어요. 예린이 바꿔 줄게요.”

자유로운 독신 생활이 끝이 나고 동생이 같이 살게 되었다는 것에 골치가 아파진 것일까? 은성은 앞으로의 어두운(?) 미래에 참담한 기색을 억누르며 예린에게로 스마트폰을 건넸다. 대충의 상황을 파악한 예린은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받아들었다.

“응 엄마. 응응 알았어! 걱정 마. 그럼 내가 누구 딸인데. 응 나도 사랑해.”

모녀간에 무슨 말을 나누는 것인지, 예린은 은성으로부터 스마트폰을 받고서도 한참 동안 통화를 한 후에야 전화를 끊었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전화를 끊는 그녀의 모습에 은성은 간신히 고개를 들고 질문을 건넸다.

“엄마가 뭐래?”
“오빠 말 잘 듣고 지내라 하시던데?”
“하아, 결국.”

금세 철부지 어린아이처럼 방실거리는 예린의 모습에 결국 또 다시 은성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그런 그의 머리 위로 손을 올리며 예린은 태연히 입술을 달싹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당분간 잘 부탁해 오빠.”

**********************

한편......

“후아, 개운하다.”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어느새 편안한 차림으로 갈아입은 소은은 수건으로 머리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며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촉촉하게 젖은 머리칼과 아직 미약하게나마 몸 곳곳에 드문드문 물기가 남아있는 그 모습이 그렇게 섹시할 수가 없었다. 마치 여느 섹시 화보와도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이는 그저 일상일 뿐이었다.

“오빠는 잘 들어갔으려나?”

무심코 그에 대한 생각에 중얼거리던 소은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다지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낸 건 아니었지만, 소은에게 있어서 그와 보낸 시간들은 근래에 있던 일들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고기면 다 잘 먹어.’
‘됐으니까 집어넣어. 학생이 돈이 어디 있어?’
‘한번만 더 보답 어쩌고 하면 그냥 돌아갈 거야.’
‘프로선수가 되면 내 개인시간 다 뺏길 거 아냐? 운동을 좋아하긴 하지만, 난 내가 하고 싶을 때만 할 거야.’

“쿠쿠쿡!”

머릿속을 헤집으며 연신 떠오르는 그의 말들에 소은의 입에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몇 번이나 느끼는 점이었지만, 강호는 여느 남자들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어떻게든 자신의 앞에서 잘 보이려고만 하고 과도한 스킨십을 하려 하거나 하는 남자들과는 달리 강호의 분위기는 너무 편했다. 마치 한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로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은근히 챙겨주는 그 모습은 그녀의 어린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기 충분했다.

“마지막엔 조금 귀여웠지?”

환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드는 자신의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고(?) 등을 돌린 채로 손만을 흔드는 그의 모습은 정말......

“꺄아아아!”

그게 그렇게도 좋은 것일까? 소은은 앳된 비명과 함께 베개를 품에 껴안은 채로 침대 위를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한 행동의 결말은 정해져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영 좋지 않은 쪽으로 말이다.

“우왁!”

쾅!

결국 예정된 수순대로 한참을 굴러다니던 소은의 몸이 침대 밑으로 떨어졌다. 이윽고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둔탁한 고통에 소은의 눈가에 희미한 물기가 고이기 시작했다.

“아우, 아파라......”

왼쪽 팔 부분으로 떨어진 것인지 소은은 정신없이 왼팔을 문질렀다. 그리고 그러던 와중에 그녀의 시선이 바닥으로 고정되었다. 정확히는 같이 바닥으로 떨어진 스마트폰의 화면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고정된 스마트폰의 화면, 그곳엔 강호와의 메신저 대화 내용이 떠올라 있었다.

“역시, 되게 무심하네.”

집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단 한 건도 오가지 않은 대화방. 한참을 그렇게 대화방을 응시하던 소은은 이내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였다.

“먼저... 연락 해볼까?”

스스로 말하고서도 조금 부끄러웠던 것일까? 그녀의 얼굴에 엷은 홍조가 피어났다. 이윽고 결심을 내린 것인지, 소은은 천천히 바닥에 떨어진 스마트폰을 주워들었다. ‘남자는 단순한 동물이라 먼저 연락하는 여자에게 더 호감을 느낀다.’라는 말을 떠올리고 용기를 낸 것이다.

“그런데 뭐라고 보내지?”

실제로 하고 싶은 말은 잔뜩 있었지만, 소은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혹여나 강호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까 두려웠던 것이다.

“무난하게 잘 들어갔냐고 물어볼까?”

가장 평범하면서도 무난한 질문.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으면서도 부담이 되지 않는 질문이기에 소은은 한참의 고심 끝에 스마트폰의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띠링!

마치 시한폭탄을 해제하는 것과도 같은 느낌을 받으며 소은은 간신히 화면 위로 떠오른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하우... 어떻게 답이 올까?”

혹시나 무시당하면 어쩌나, 늦은 시간에 연락한다고 화내지 않을까 불안불안 해 하면서도 소은은 내심 기대심을 저버리지 못한 채, 계속 멍하니 스마트폰의 화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띠링!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녀의 스마트폰 위로 강호가 보낸 메시지가 떠올랐다. 생각보다 금방 도착한 답장에 소은의 입에서 환호성이 튀어나왔다.

“와, 왔다아!”

아직 어떤 내용의 답장인지 확인조차 하지 않았으면서도 그렇게 좋은 것일까? 소은은 한참동안 방안을 돌아다니고 나서야 강호가 보낸 답장을 클릭했다.

‘당연하지. 내가 얘도 아니고 말이야.’
“풉! 이게 뭐야.”

당연하다는 듯이 날아온 강호의 답장에 소은의 입에서 무심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성격상 무심한 답장이 오리라곤 예상하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이런 반응이라니. 게다가 대화를 이어가기 위한 질문식의 말이 아닌, 자신의 생각만을 늘어놓은 그의 답장에 소은은 입가에서 웃음기를 지우지 못한 채, 또 다시 스마트폰의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어스름한 달빛이 세상을 뒤덮은 고요한 밤, 그들이 잠에 든 것은 꽤나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였다. 하지만 늦은 시간, 잠에 빠진 소은의 얼굴에 남아있는 건, 피로함이 아닌 보는 이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 하는 편안하면서도 행복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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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9-07 23:30 | 조회 : 983 목록
작가의 말
류운

늦어서 죄송합니다. 비축분이 거의 다 바닥나서 한참을 고심 끝에 오늘부터 1일 1편 체제를 유지할 계획입니다. 아무런 말없이 잇달아 늦게 된 독자님들께 다시 한번 사과 드리며 이번 2장을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그럼 내일 3장으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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