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2장 골목길의 인연 - (5)

“우우, 이건 사기에요 사기.”
“왜, 더 해볼까 그럼?”

발걸음을 옮기며 힘없이 중얼거리는 소은의 한 마디에 강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하긴 소은이 이런 말을 꺼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홧김에 그녀가 강호와 겨룬 모든 종목에서 패배라는 쓴 맛을 맛봐야 했으니 말이다. 다 일반인이되, 일반인이 아닌 그의 발군의 신체 능력 덕분이었다. 그러한 이유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소은은 토라진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싫어요. 애초에 전제조건부터 불공평하잖아요.”
“뭐가 불공평해?”
“아니, 그럼 그 재능이 공평한 거예요?”

억울하다는 듯이 눈빛을 부라리는 소은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강호는 능글맞은 표정으로 입 꼬리를 끌어올릴 뿐이었다.

“억울하면, 너도 이렇게 태어나든지.”
“그게 말이 되요!”

결국 빽하니 소리를 지르고서 소은은 발걸음을 빨리 하기 시작했다. 완전 어린 아이나 다름없는 그녀의 삐진 듯한 반응에 강호는 피식 웃음을 흘리면서도 그녀의 속도에 맞춰 걷기 시작했다.

“그거 가지고 삐치기는.”
“안 삐졌어요!”
“그런 걸 보고 ‘삐졌다’ 하는 거야.”
“이씽!”

말로도 이길 수 없다는 걸 직감한 것일까? 소은은 한참을 씩씩거리더니 이내 호흡을 가다듬고 어느 한 곳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양 볼을 가득히 부풀린 채, 말없이 묵묵히 손가락을 가리키는 그녀의 모습에 강호의 시선이 손가락의 끝이 가리키는 곳으로 옮겨졌다.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그곳, 그곳엔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외로이 불이 들어온 조그만 편의점이 자리하고 있었다.

“뭐?”

막연하게 손가락만을 가리키고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강호는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물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그의 말이 튀어나오기가 무섭게 그녀는 강호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당당히 입술을 달싹였다.

“아이스크림 사줘요.”
“하?”
“.......돈도 많다면서요. 계속 이겼으면서 아이스크림도 못 사줘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못내 미안했던 것이지,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운을 떼는 그녀의 모습에 강호는 피식 미소를 짓고서 그녀를 앞질러 걸어 나갔다.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는 그의 모습을, 불안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소은은 이내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같았던 편한 분위기에 이끌려 실수로 그에게 버릇없이 굴었다고 자책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강호는 뒤따라오지 않는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다시금 입술을 달싹였다.

“뭐해, 안 따라오고. 그새 먹기 싫어진 거야?”
“가, 가요! 헤헤.”

아이스크림 하나에 그새 기분이 풀어진 것일까? 강호의 부름에 그녀는 금세 입가에 미소 만연한 채로 오도도 달려가기 시작했다.

띠링!

문에 걸려있는 종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지며 강호와 소은은 편의점 안으로 들어섰다. 빠르다면 빠르고 늦다면, 늦다고 할 수 있는 시간인 밤 10시. 피곤했던 것일까? 편의점 안의 아르바이트생은 선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사장이 보고 있었다면 꽤나 성질을 내기 충분한 그 모습에 피식거리며 소은과 강호는 아이스크림이 있는 냉동고 쪽으로 향했다.

“먹고 싶은 걸로 골라.”
“헤, 그럼 전 이걸로 할게요.”

언제 삐쳐 있었냐는 듯이 금세 해맑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 초콜릿 바를 집어든 소은의 모습에 강호는 엷은 미소를 베어 물고 그녀와 똑같은 아이스크림을 집어 들었다.

“저기요?”
“네, 넷?”
“이거 계산 좀 해주십쇼.”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르바이트생을 깨우고 간단히 계산을 끝낸 강호와 소은은 다시금 거리로 돌아와 발걸음을 옮겼다. 입에 아이스크림을 문 채로 말이다.

“헤헤, 잘 먹을게요!”

그게 그렇게도 좋은 것일까? 소은은 입가에 피어난 미소를 좀처럼 지우지 못한 채, 마냥 행복한 표정을 짓고서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었다. 아이스크림의 달콤한 풍미가 입안 가득히 퍼져나가며 그녀의 얼굴이 행복으로 젖어 들었다. 마치 뜨끈한 탕에 들어간 아저씨와도 같은 그녀의 반응에 강호의 얼굴에 또 다시 웃음이 피어올랐다.

“쿠쿡, 그렇게 맛있냐?”
“네! 아이스크림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거예요.”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아이처럼 순진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이는 소은의 모습에 강호의 얼굴에도 뿌듯한 미소가 지어졌다. 저렇게 잘 먹는 모습을 보니 사준 사람 입장에서도 ‘사주기를 잘했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게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차분히 길을 걷던 도중 그들의 앞으로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나타났다. 소위 꽤 사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는지 아파트 단지는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였다.

“휘유, 되게 비싸 보이네.”

솔직한 그의 품평에 왠지 모르게 소은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지금껏 재잘재잘 떠들며 시시덕거리던 것과는 달리 조금 난처한 기색을 내비치는 그녀의 모습에 강호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갑자기 왜 그래? 그렇게 당황하고.”
“그, 그게 실은......”
“실은?”
“......집에 다 도착해서요.”

간신히 힘겹게 말을 잇고서 소은은 조그맣게 입술을 깨물었다. 무언가 비장한 각오까지 한 듯한 그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무겁게 각오를 다지는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강호는 담담히 입술을 달싹일 뿐이었다.

“그래? 그럼 조심히 들어가.”
“......네?”

별다른 감정 없이 무미건조하게 말을 건네는 강호의 모습에 조금 당황한 것일까? 소은은 멍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금 그에게로 반문을 던졌다.

“저... 안 놀라시네요.”
“뭐야, 놀래야 되는 거였어?”
“아,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너무나도 태연한 그의 물음에 소은은 희미하게 말꼬리를 흐렸다. 지금까지 자신이 봐온 남자들과는 영 다른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보통 집에 도착하면, 대부분의 남자들은 입가에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애써 탐욕의 감정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강호는 전혀 그런 눈빛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그저 ‘아, 좋은데 사나 보네.’라고 인식한 것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이런 반응을 보인 남자는 소은에게 있어서 그가 2번째였다.

“싱겁기는. 얼른 들어가.”
“네!”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집으로 발걸음을 돌린 소은. 하지만 무언가 할 말이 남았던 것일까? 소은은 몇 걸음 옮기지 못한 채, 이윽고 다시금 등을 돌리며 그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다음에 또 놀아요 오빠.”

환한 표정으로 몇 번 손을 흔드는 그녀의 모습에 강호는 그녀의 반대편으로 등을 돌리고서 못 이기는 척 손을 흔들어주었다. 조금 매정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 모습이었지만, 소은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집으로 달려가며 애써 터져 나오는 웃음을 손으로 가렸다.

‘오빠도 되게 부끄러워하네.’

사실은 또 다시 귀찮음이 도진 덕분이었지만, 그러한 진실은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한 채, 그녀는 해맑은 표정으로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과연 옛 성현들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다. 때로는 모르는 것이란 약이었다.

************************

“아우, 피곤해......”

소은과 헤어진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은성은 피곤에 찌든 기색으로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어찌나 피곤해 보였는지, 그 모습이 가히 강행군이 끝날 무렵의 병사들을 보는 듯 했다.

“하여튼, 강호 녀석이 나올 때는 너무 피곤하다니까.”

하나의 몸에 4개의 인격이 자리 잡은 은성. 그 반동 때문일까? 다른 인격에게 모을 오랫동안 빌려줄수록 몸의 피로는 극심했다. 특히 강호의 경우는 심한 편이었는데, 말은 귀찮다고 하면서도 항상 몸을 무리하게 움직이는 탓에 그 여파는 고스란히 은성에게로 전달되었던 것이다. 덕분에 은성의 얼굴엔 피로가 가득했다.

‘저러다 죽는 거 아니야?’
‘헤에, 멋대로 죽어버리면 곤란한데.’
‘하여튼 간에 너무 비실비실한 녀석이라니까.’

그의 심상 공간의 심층부, 은성을 제외한 나머지 인격들, 그러니까 차례대로 ‘현’. ‘율’, ‘강호’ 순으로 저마다 입술을 달싹였다. 몸의 제어권을 갖는 인격을 제외한 나머지 인격들이 모이는 곳으로 유일하게 그들이 교류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이 심상 공간이었다. 이를테면 그들만의 회담장이랄까? 그의 심상 공간 속에 각각 자신들의 세계를 이룬 그들이었지만, 그들은 곧잘 이렇게 은성의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물론 은성이 그러하듯이 세밀한 부분까지 알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네가 너무 막 굴려서 그래 이 멍청아.’
‘키킥, 멍청이래요.’

싸늘한 현의 한 마디에 율은 연신 키득거리며 강호를 향해 손가락질 했다.

‘시끄러 허구한 날 방구석에 처박혀 있으니까 저러는 거 아니야. 앞으로 더 단련 좀 해야겠어.’
‘누가 너 독차지하게 내버려 둔다든?’
‘맞아! 독차지하면 확 죽여 버린다.’

강호의 독백에 마치 승냥이 떼들이 달려들듯이 현과 율에게서 온갖 질타가 쏟아졌다. 분위기만 다를 뿐, 똑같은 얼굴을 하고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그 모습은 신기함을 넘어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모습은 그저 일상일 뿐이었다.

‘뭣하면 니들도 그러던지?’
‘그러다 본체가 과로사하면 네가 책임지기라도 할 거냐?’
‘그래! 죽으면 누나도 못 본단 말이야.’

태연한 강호의 말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도 지지 않은 채, 현은 냉정히 입술을 달싹이고 율이 그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나마 율의 말은 뭔가 핀트가 좀 어긋나긴 했지만, 논리적인 현의 말에 강호는 쉽사리 반박하지 못했다. 무조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뿐더러, 4개의 인격 중 가장 뛰어난 화술과 지능을 갖춘 현을 그가 말로서 이길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거 되게 떽떽거리네.’
‘하,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멍청이, 멍청이래요!’

결국 그들의 계속되는 질책에 강호의 이마에 굵은 힘줄이 솟아났다. 짜증이 극에 달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현과 율은 그저 담담히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네 놈이 뭘 하든 그건 전혀 내 알 바가 아니지만, 적어도 생각이 있다면 민폐는 작작 끼치시지?’
‘불만 있으면 덤비시던지.’
‘왜, 못할 것 같아?’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채로 살기를 풀풀 풍겨대는 강호의 모습에 현 역시 싸늘한 살기를 퍼뜨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확실히 육체능력이라면 강호가 한 수 위였지만, 현 역시 만만치 않았다. 시합용 태권도가 아닌, 실전용 태권도(ITF 태권도)를 기반으로 한 일말의 자비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거침없는 손속은 강호라고 하더라도 마음을 놓고 있을 수는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공기가 따갑게 느껴질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 그 속에서 율은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와아, 싸워라 싸워. 이기는 편 우리 편.’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들의 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이 그렇게 살벌한 대화를 주고받던 사이 은성에게로 뜻밖의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당장에라도 치고 박고 싸울 법한 분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셋의 시선은 은성의 몸이 있는 곳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다. 하나 같이 짤막한 한 마디만을 흘린 채로 말이다.

‘‘‘헐.’’’
“헐.”

심상 공간의 그들이 그러하듯, 은성 역시 짤막한 한 마디만을 남긴 채,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평소의 깔끔하게 정돈된 방이 아닌, 낯선 짐들이 널브러져 있는 방, 분명 끄고 나갔음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켜져 있는 TV, 소파 앞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과자 뭉치들까지. 그도 그럴 것이 유일한 안식처인 자신의 집에 너무나도 의외의 인물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

그와 눈이 마주친 그 모습 그대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는 바로 한 명의 소녀였다. 얼추 고등학생 정도일까? 흰색 티와 짧은 파란색의 반바지, 그리고 여느 학생들이 즐겨 입는 파란색의 트레이닝 져지를 입고 있는 소녀였는데, 그 미색이 상당히 고운 편이었다. 청초하게 흘러내리는 긴 머리칼, 짙은 검은색의 눈썹과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검은 눈동자, 오뚝한 콧날, 쿡 찌르면 그대로 밀려 나올 것 같은 뺨에 조그마한 분홍빛의 입술까지. 마치 고등학교 교복 모델과도 같은 미모였건만, 은성이 놀란 것은 그녀의 미모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놀란 것은 그의 기억 상, 그녀는 도저히 이곳에 있을 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크게 당황한 채로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는 그의 모습과는 달리 소녀는 금세 환한 눈웃음을 그리며 금세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은성 오빠!”

와락!

순식간에 그의 품안으로 달려들며 그에게로 안겨드는 소녀. 갑작스레 품안에 안긴 채,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는 소녀의 행동에 은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입술을 달싹였다.

“천예린! 네가 여기 왜 있는 거야.”

소녀의 이름은 천예린, 그녀는 다름 아닌 은성의 친동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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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9-06 22:47 | 조회 : 1,029 목록
작가의 말
류운

이제 2장도 1편밖에 안 남았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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