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2장 골목길의 인연 - (4)

수많은 차량이 오가는 도로 다리 밑. 사람이라곤 거의 보이지 않고 오직 가로등 불빛만이 존재하는 오래된 야외 오락실에 낯선 인영들이 나타났다.

“자, 여기에요. 저만의 비밀장소!”
“...거 더럽게 머네.”

한참을 걸었던 덕분일까? 상쾌한 소은의 표정과는 달리 강호의 얼굴엔 귀찮음과 짜증이 가득 어려 있었다. 하긴 무리도 아니었다. 여기까지 오느라고 무려 30분이 넘도록 계속 걸어야 했으니 말이다. 살짝 날이 선 그의 말에 소은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살갑게 말을 붙였다.

“헤헤, 그래도 이렇게 도착했잖아요.”
“오지게도 오랫동안 걸어서 말이지.”

마치 맹수가 으르렁거리며 적의를 뿜어내는 것과도 같은 짜증서린 그의 모습에 소은은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황급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저기 봐요! 제가 여기서 제일 좋아하는 거예요.”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 그곳엔 오래된 야구배팅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배팅장을 뒤덮은 녹색 철망, 내부를 환히 밝히는 눈부신 백색의 형광등, 그리고 옆에 놓인 야구 배트와 조금 먼지가 쌓여있는 기계들까지. 조금 낡고 오래되긴 했지만, 꽤 쓸만한 기색을 갖춘 야구배팅장의 모습에 강호의 얼굴이 한층 누그러졌다.

“이런 데가 있었어?”

요즘 같이 컴퓨터와 스마트폰으로 하는 게임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 확실히 야구배팅장은 확실히 흔하게 볼 수 있는 시설은 아니었다. 조금 놀란 듯한 그의 모습에 소은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연스럽게 배팅장 내부로 들어섰다.

“말했잖아요. 저만의 비밀 장소라고요.”
“호오, 꽤 자신 있나봐?”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강호를 뒤로하고 소은은 자신 있는 표정으로 옆에 있던 배트를 들어보였다.

“그럼요. 제 전문 분야인데요.”

싱긋 미소를 머금은 채로 소은은 몇 장의 지폐를 기계 안으로 넣고서 앞을 향해 타자 자세를 취했다.

깡!

맑게 울려 퍼지는 청량한 타격음과 함께 기계를 통해 발사된 야구공이 철망으로 튕겨져 날아갔다. 확실히 자주 오긴 한 것인지, 대충 휘두르는 것이 아닌, 선수를 방불케 하는 깔끔한 타구 폼에 강호의 입에서 감탄성과도 같은 휘파람이 새어나왔다.

“자주 왔다더니 빈말은 아닌데?”
“당연하죠!”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배트를 휘두른 그녀의 타격에 또 다시 야구공이 철망으로 쏘아져 날아갔다. 스트레스가 꽤나 쌓였던 것일까?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면서도 소은은 환하게 미소 지은 채로 연신 배트를 휘둘렀다. 몇 차례 놓치기도 했지만, 그래도 반 이상의 야구공을 쳐낸 소은은 개운한 표정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참으로 훌륭한 실력임에는 분명했다.

“후아, 어때요. 저 꽤 잘하죠?”
“글쎄, 여자치곤 나쁘진 않네.”

땀 흘리는 운동에 그다지 흥미를 두지 않는 여자들의 성격상 상당히 훌륭한 솜씨라고 할 수 있었지만, 강호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어보이며 천천히 철망 안으로 발을 들였다.

“한번 해보시려고요?”
“여기까지 기껏 왔는데. 한번 해봐야지.”

소은으로부터 배트를 건네받으며 강호는 피식 웃음을 지어보였다. 어느새 살짝 걷은 소매 사이로 도드라진 힘줄이 자아내는 묘한 섹시함에 소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그의 모습에 살짝 두근거린 것이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미처 눈치 채지 못한 채, 강호는 기계에 몇 장의 지폐를 집어넣고 차분히 타구 폼을 취해보았다. 약간 건들건들하는 것이 조금 불량스러워 보이긴 했지만, 실제 선수들이 보더라도 군더더기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자세였다.

깡!

소은이 쳤던 것보다도 훨씬 맑고 청명한 타격음이 울려 퍼지며 야구공이 쏘아진 것 이상의 기세로 철망을 향해 날아갔다. 현직 야구선수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위력적인 타격에 소은의 입이 쩍 벌려졌다. 일반인들이 취미로 휘두르는 것과는 그야말로 격이 다른 타구였으니 말이다. 모든 배팅을 끝마치고서 강호는 개운한 표정을 지으며 배트를 내려놓았다.

“후아, 간만에 치니까 속이 다 후련하네.”
“오, 오빠 선수였어요?”

떨리는 음성으로 간신히 입술을 달싹이는 소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강호는 피식 능글맞은 미소를 흘리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선수는 무슨. 그런 건 관심도 없어.”
“그, 그럼 제대로 배운 적은요?”

뭐가 그렇게 충격적인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소은의 모습에 강호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제대로 배운 운동은 격투기 종류 운동뿐이야.”
“......그럼 선수도 아니신데 그렇게 잘 치신다는 거예요?”
“뭐야 문제라도 있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소은의 모습에 도리어 강호는 뚱한 표정으로 반문을 던졌다. 그런 강호의 물음에 소은은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소리치고야 말았다.

“당연히 문제 있죠! 그 정도 실력이신데도 한 번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면, 오빠는 완전 천재나 다름없어요. 제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한참이나 모자란 제가 보기에도 오빤 조금만 가다듬으면 운동선수로 엄청나게 성공할 게 분명하다니까요.”

두 눈을 반짝이며 신이 나서 말을 잇는 소은의 모습에 강호는 단호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귀찮아.”
“......네?”
“프로선수가 되면 내 개인시간 다 뺏길 거 아냐? 운동을 좋아하긴 하지만, 난 내가 하고 싶을 때만 할 거야.”

단호한 강호의 거절에 소은은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물론 강호 개인에게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점이긴 했지만, 설마 그런 이유로 단호하게 거절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끝내 포기할 수는 없던 것이었는지 소은은 조심스럽게 강호를 꼬드기기 시작했다.

“도, 돈도 잔뜩 버는데요?”
“나 돈 많아.”
“엄청나게 유명해 질 텐데요.”
“최악, 훨씬 더 귀찮아지잖아.”

아무리 달콤한 유혹에도 불구하고 전혀 뜻을 굽히지 않는 강호, 일말의 가능성도 내비치지 않은 채,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강호의 모습에 소은의 입에선 결국 한숨이 새어나왔다.

“우우, 완전 재능 낭비에요.”
“알 게 뭐야? 내가 싫다는데.”

왠지 모르게 비참한 기색으로 중얼거리는 소은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강호는 홱하니 고개를 돌린 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갑작스레 발걸음을 옮기는 강호의 모습에 크게 당황하며 소은은 황급히 강호를 향해 입술을 달싹였다.

“에, 어디 가세요?”
“딴 것 좀 더 해볼까 해서.”

그녀의 물음에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강호는 담담히 미소를 머금어 보였다. 강호의 발걸음이 멈춰선 곳, 그곳은 바로 농구 게임대가 자리하고 있는 곳이었다. 앞에 있는 공을 던져 제한 시간 안에 많은 골을 넣는, 그 게임이 말이다. 주머니의 지갑에서 몇 장의 지폐를 꺼내 들은 강호는 이윽고 검지와 중지와 잡고 있던 지폐를 흔들며 진득한 비소를 지어보였다.

“어때, 한 번 해볼래? 자신 없으면 말고.”

빠직!

은근히 무시하는 듯한 강호의 한 마디에 소은의 고운 이마에 굵은 힘줄이 돋아났다. 방금 전 강호의 말이 상당히 거슬렸던 것인지, 그녀는 씩씩거리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누가 자신이 없다는 거예요?”
“호오, 그럼 자신 있다는 거야?”
“당연하죠. 나중에 지고 딴소리하기 없기에요!”

자연스럽게 농구공을 집어 들며 큰소리 뻥뻥치는 소은의 모습에 강호의 얼굴엔 엷은 미소가 번져나갔다. 강호 스스로도 모르게 말이다.

0
이번 화 신고 2015-09-06 10:19 | 조회 : 875 목록
작가의 말
류운

분량이 슬슬 고갈 되네요 조만간에 다시 1일 1편 체제가 될 거 같아요 ㅠㅠ

후원할캐시
12시간 내 캐시 : 5,135
이미지 첨부

비밀메시지 : 작가님만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익명후원 : 독자와 작가에게 아이디를 노출 하지 않습니다.

※후원수수료는 현재 0%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