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2장 골목길의 인연 - (3)

“아직 멀었어?”
“조금만 더 가면 되요.”

얼마나 걸었던 것일까? 정말 귀찮았던 것인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리는 강호의 모습에 소은은 상투적인 모습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마치 칭얼대는 꼬마 아이를 달래는 듯한 느낌에 소은은 자신도 모르게 조그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너무나도 아이 같은 그 반응에 그만 조금 질려버리고 만 것이다.

“도대체 어딘데 그래?”
“여기서 조금만 더 들어가면 되요.”

골목 한 편을 가리키며 입술을 달싹이는 소은의 모습에 강호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갈수록 인적이 드문 곳이기도 했거니와, 그녀가 가리키는 곳은 꽤나 멀었던 것이다.

“너무 멀어!”
“맛집을 데려가 달라고 했지 거리 이야기는 안했잖아요.”
“......”

결국 담담한 소은의 한 마디에 강호는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확실히 거리 이야기를 하지 않은 자신의 실수였으니 무어라 변명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맛없기만 해봐.”
“걱정 마세요. 제가 아는 최고의 맛집이니까요.”

투정 아닌 투정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로 소은은 자신 있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먹는 것을 좋아하기에 여느 여대생처럼 대학로 근처에 있는 온갖 식당들을 돌아봤지만, 그녀의 입맛에 이보다 최고의 맛집은 없었던 것이다. 자신만만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강호는 결국 미약한 한숨을 내쉬면서도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얼마나 맛집이길래 저런 자신감일 내비치는 것인지 스스로도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약 5분 정도를 더 걷고 나서야 강호는 발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여기야?”
“네, 여기가 바로 제가 아는 최고의 맛집이에요.”

그들이 도착한 곳, 그곳은 바로 한 눈에 보기에도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조그만 식당이었다. 메뉴도 몇 개 되지 않는 조촐한 식당. 사람도 그다지 많지 않고 조용한 식당의 모습에 강호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런 그와는 달리 소은은 입맛까지 다시며 재빨리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뭐해요 빨리 들어와요.”
“하아...”

깔끔하고 아기자기한 인테리어의 식당들을 찾는 또래 여대생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 나이 든 어르신들이 자주 찾을 법한 시장 안의 식당과도 같은 비주얼에 한숨을 내쉬며 강호는 그녀를 따라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조그만 식당 안의 테이블에 몸을 기대며 강호는 눈으로 재빠르게 메뉴판을 쫓았다.

“......김치찌개, 순두부찌개, 된장찌개, 육개장이 전부야?”
“네, 이 중에서도 여긴 순두부찌개가 최고에요!”

꽤나 실망한 듯한 그와는 달리 한껏 들뜬 모습으로 입술을 달싹이는 소은.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면서도 강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 그걸로.”
“네에, 할머니 여기 순두부찌개 2인분이요!”
“그려. 조금만 기다려.”

친근한 목소리와 함께 손을 들어 보이는 소은의 말에 주방에 있던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로 요리에 들어가시는 것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한껏 기대되는 표정을 지어보이던 소은의 모습에 강호는 천천히 운을 떼었다.

“자주 왔나봐?”
“그럼요. 제가 아는 최고의 맛집이라니까요. 정말로 기대하셔도 되요.”

자부심까지 느끼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강호는 턱을 괸 채로 나지막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특이하네. 또래 여자애들이라면 파스타 같은 음식 먹으러 다니지 않아?”
“보통 그렇긴 하죠...”

주변 친구들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일까? 조금 머뭇거리면서도 소은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지만, 성격 때문인지 전 그런 게 더 힘들더라고요. 격식 있는 것보단 편안한 게 우선이랄까? 입맛도 전형적인 한국인의 입맛이라 면이나 빵보다는 밥이랑 찌개를 더 좋아하고요.”
“요즘 찾기 힘든 성격이긴 하네.”

왠지 모르게 조금 기운이 빠진 듯한 그녀 모습에 강호는 조용한 목소리로 낮게 읊조렸다. 그런 그의 한 마디에 소은의 어깨가 더욱 움츠러들었다. 그저 별다른 생각 없이 중얼거린 강호의 말을 ‘여자답지 못하다’는 뜻으로 곡해하고 만 것이다. 결국 잠시간 흐르고 마는 정적. 금세 어색해진 분위기에 소은은 머리를 가로저으며 애써 다시금 그에게로 말을 이어나갔다.

“오, 오빠.”
“오빠?”
“저보다 나이 많으셔서 그렇게 불렀는데...... 안 되나요?”

조심스럽게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소은의 모습에 강호는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들로 하여금 가슴에 불을 지르는 마법의 단어인 ‘오빠’, 그것도 소은처럼 상당한 미인에게 ‘오빠’라는 말을 듣는다면 행복감을 느끼기에 충분했지만, 여느 남자들과 달리 강호는 그저 별다른 감흥 없이 담담히 받아들일 뿐이었다.

“딱히 안 될 것까지야.”
“헤헤, 그럼 오빠 취향은 어때요?”

승낙이 떨어지자마자 소은은 금세 웃음을 배어 물은 채로 강호에게 질문을 건넸다. 털털하면서도 귀엽기 그지없는 미소였건만, 강호는 그저 뚱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고기.”
“네?”
“고기면 다 잘 먹어.”
“풉! 그게 뭐에요.”

예상외의 한 마디에 소은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아이 같은 그의 입맛에 무심코 웃음이 터지고 만 것이다. 한층 나아진 분위기 덕분일까? 그녀는 연신 강호에게로 그간 참았던 수다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눈부신 미소를 머금은 그녀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강호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적당히 응수할 뿐이었다.

“다 떠들었어? 그만 떠들고 어여 밥 먹어.”

얼마 지나지 않아 주방에 있던 할머니는 그들 테이블 위로 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금세 테이블을 가득 채우는 여러 가지 밑반찬과 순두부찌개. 소박하면서도 군침을 절로 돌게 만드는 음식들의 향연에 소은은 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잘 먹겠습니다. 오빠도 얼른 드셔보세요. 후회하지 않을 거라니까요.”
“아아.”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입맛을 자극하는 음식들.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것이 절로 식욕을 들끓게 하는 비주얼에 강호는 천천히 숟가락을 들어 순두부찌개로 가져갔다.

“후후.”

몇 번의 바람에 의해 뜨거운 국물이 먹기 좋게 식으며 이윽고 입안으로 들어갔다. 매콤하면서도 입안을 가득 채우는 깊은 풍미, 속을 안정시키는 따뜻하고 시원한 국물 맛에 강호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그런 그의 모습에 소은은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때요 맛있죠?”
“뭐, 나쁘진 않네.”

애써 맛있어 하는 표정을 감추며 시선을 회피하는 강호, 그 모습을 바라보던 소은은 피식 미소를 지으며 자신 역시 눈앞의 음식들을 맛보기 시작했다. 강호와 마찬가지로 입 안 가득히 퍼져나가는 기분 좋은 행복감에 소은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후아, 이 맛에 여기를 자주 온다니까요.”
“되게 좋아하네.”
“물론이죠. 제가 아는 최고의 맛집이에요 여긴. 전에 왔을 때는...... 아, 맞다!”

해맑은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야기보따리를 풀려는 소은의 표정에 당혹감이 튀어 올랐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중요한 일을 이제야 떠올린 건 분명했다. 그렇게 중요했던 일일까? 소은은 순식간에 창백해진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분명 이 근처에... 찾았다!”

눈에 띄게 밝아진 표정으로 그녀가 들어 올린 것은 다름 아닌 TV의 리모컨이었다.

“......하?”

대체 밥 먹다 말고 뭐하는 짓인지. 강호의 표정엔 당혹감을 뛰어넘어 안쓰러움마저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은은 그러한 그의 시선 따위 안중에도 두지 않은 채, 리모컨의 버튼을 연신 두드릴 뿐이었다. 정말이지 주변에 다른 손님들이 TV를 보지 않고 있었다는 게 다행일 따름이다.

“아, 벌써 시작했네.”

원하던 채널을 찾은 것일까? 조금 실망한 기색으로 그녀가 멈춘 채널은 다름 아닌, 유럽 프리미어 축구 중계가 한창인 스포츠 채널이었다. 보통 여대생들이라면 눈길조차 안 주는 채널임이 분명했건만, 소은의 눈빛은 가히 인기 최절정의 드라마를 보는 눈빛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 아스날하고 첼시 경기인가?”

상당히 익숙한 TV 스크린의 모습에 강호의 시선 역시 자연스레 TV로 향했다. 운동마니아인 그가 유일하게 관심을 갖는 프로그램이 바로 스포츠 중계였으니 말이다. 흥미로운 눈빛으로 TV를 바라보는 강호의 한 마디에 소은 역시 신이 나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네, 아스날이 1대 0으로 이기고 있네요. 크으, 골 넣는 걸 봤어야 하는데.”
“어차피 하이라이트 장면으로 띄워주겠지.”
“하지만, 그런 건 직접 봐야한다고요.”
“그야 그렇긴 하지만.”

어느새 음식은 뒷전이 된 것인지, 두 남녀는 어색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축구에 대한 이야기를 꽃피우기 시작했다. 물론 눈은 TV를 향하면서도 밥을 먹긴 했지만, 그 속도는 원래 속도보다 훨씬 더딜 수밖에 없었다.

“헤에, 결국 아스날이 2대 1로 이겼네요.”
“마지막에 1대 1찬스 놓쳤으면 아마 첼시가 이겼을 걸?”

결국 밥을 다 먹고도 경기가 끝나는 걸 보고서야 두 남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할머니 여기 계산해주세요.”
“허이구, 오래도 먹었네, 만원만 줘.”
“네, 잠시만요.”

차갑게 말하면서도 인자한 할머니의 모습에 소은은 살포시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가방을 뒤적거리며 지갑을 찾았다. 하지만 그것은 무의미한 일일 뿐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그녀가 지갑을 차마 헤맬 틈을 타, 강호가 할머니에게로 돈을 건넸던 것이다. 묵묵히 돈을 건네는 그의 모습에 소은은 화들짝 놀라며 그를 제지했다.

“아녜요. 제가 계산할게요. 원래 그러기로 했잖아요.”
“됐으니까 집어넣어. 학생이 돈이 어디 있어?”

강호의 말에 무언가 반박하려던 소은이었지만, 끝내 그녀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확실히 그의 말처럼 소은은 그다지 여유로운 편이 아니었다. 학생이 취직하기 전까지 무슨 돈을 벌겠는가? 기껏해야 알바로 용돈 정도만 겨우 벌 뿐, 나머지는 부모님의 원조로 생활하는 것이 대부분의 대학생인데 말이다. 같은 대학생이라면 피차일반이라고 반박이라도 했겠지만, 카페의 사장인 그의 앞에서 돈이 많다고 하는 것도 어불성설이었다. 결국 강호가 지불하는 모습을 구경만한 채, 소은은 그와 함께 가게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뭔가 마음속이 복잡한 것인지 그녀의 표정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뭐라도 해야만 해. 이대로 헤어질 수는 없어.’

보답하기로 했으면서 오히려 밥만 얻어먹은 것이 못내 미안했던 것일까? 이내 소은은 강호를 향해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였다.

“오빠.”
“왜?”

소은의 부름에 강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녀에게로 향했다. 왠지 모르게 사뭇 진지하기까지 한 모습. 그런 그녀의 모습에 강호의 얼굴엔 호기심 어리기 시작했다.

“뭐야, 왜 그렇게 심각해?”
“그, 그러니까... 밥도 먹었는데 소화도 시킬 겸 운동이라도 하러 갈래요?”
“운동?”

한참을 머뭇거리며 간신히 운을 뗀 소은의 한 마디에 강호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평소 운동을 좋아하는 그로서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지만, 다소 뜬금없었던 것이다.

“갑자기 왜?”
“그게... 결국 밥도 오빠가 사셨고, 다른 음식점을 간다고 해도 오빠가 또 계산해버리실 것 같아서 보답이라 하긴 뭐하지만, 저만의 비밀 장소를 가르쳐 드리려고요.”
“호오?”

가감 없이 솔직 담백하게 자신의 의도를 털어놓는 소은의 말에 강호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그려졌다. 요즘 애들과는 다른 기특한 그녀의 말에 조금 놀란 것이다.

“좋아.”
“정말이죠?”
“그 대신.”

담담한 그의 승낙에 눈에 띠게 기뻐하던 소은의 얼굴에 다시금 긴장이 자리했다. 하긴 유독 ‘대신’이라는 말을 강조하는 그 말이 그녀로서는 충분히 당황스러울 법도 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마른 침까지 삼켜가며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역력히 드러내는 그녀를 바라보며 강호는 천천히 운을 떼었다.

“한번만 더 보답 어쩌고 하면 그냥 돌아갈 거야.”
“그, 그건......”

그것이 그렇게도 마음에 걸렸던 것일까? 강호의 엄포에 소은은 고심에 잠긴 채로 말끝을 흐렸다. 그다지 심각한 일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고민하는 그녀 모습에 강호는 그녀에게서 홱 하니 등을 돌렸다.

“싫음 말고.”
“아,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같이 가는 거예요.”

결국 등을 돌리고 돌아가는 척까지 하고서야 소은은 당황한 얼굴로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강호의 노림수였지만 말이다. 미끼를 덥석 물다 못해, 바늘까지 집어삼킨 물고기와도 같은 소은의 반응에 강호는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담담히 입술을 달싹였다.

“조금 귀찮긴 하지만, 정 원한다면야.”
“치, 귀찮으면 그냥 가시던가요.”
“어? 뭐 그렇다면야.”

정말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발걸음을 돌려버리는 강호의 모습에 소은은 황급히 그의 팔을 붙잡았다.

“아, 농담도 못해요?”
“됐으니까 빨리 가. 계속 그러면 진짜 가버린다.”
“진짜 장난도 못하겠네요.”

결국 입가에 능글맞은 비소를 머금은 그의 말에 소은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만의 비밀장소로 그를 이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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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9-05 20:19 | 조회 : 922 목록
작가의 말
류운

축구 씬이 적다고 느껴지시는 분들은 착각ㅇ...... 아닙니다. 실은 제가 축구를 안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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