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2장 골목길의 인연 - (2)

“그래서 여기까지 찾아온 거예요?”
“네!”

왠지 모르게 기운이 넘치는 여인의 말에 은성은 난처한 표정으로 억지미소를 그려보였다. 저번의 일에 보답하겠다는 마음은 고맙지만, 저런 기대감 어린 눈빛은 그저 부담이 될 뿐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엄밀히 말하자면 그때의 일은 자기가 직접 행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하기 짝이 없는 상황, 다행스럽게도 어느 샌가 다가와 커피를 내어주는 채희에 의해 그들 사이에 자리하던 침묵은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차 한 잔 드시면서 얘기하세요. 어떤 것을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일단 사장님 드시는 카페모카로 가져왔는데 드실 만 할 거예요.”
“아, 감사합니다.”

조심스럽게 커피를 건네는 채희 손길에 여인은 조심스럽게 찻잔을 받아들었다. 카페모카의 포근한 온기와 달콤한 향기가 여인의 마음이 절로 풀어졌다. 천천히 커피를 홀짝이는 여인에게 들키지 않게 은성은 채희를 향해 구원의 눈빛을 쏘아 보냈다.

‘나 좀 살려줘.’

간절한 눈빛을 반짝이며 입모양으로 간신히 살려달라는 뜻을 전하는 은성의 모습에 결국 채희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그런데 두 분, 통성명은 제대로 하셨어요?”
“아......”

채희의 물음에 나지막한 탄성을 흘리는 여인,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는 여지를 남겨준 채희의 배려에 은성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물론 여인의 시각에서는 보이지 않게끔 말이다.

“반응을 보아하니 아직 통성명도 제대로 나누시지 않은 듯한데 천천히 통성명부터 나누시는 게 어때요? 그럼 사장님 수고하세요.”
“야, 채희야!”

자기 할 말만을 하고서 냉정히 카운터로 되돌아가버린 채희의 모습에 은성의 입에서 당혹성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녀의 발길은 그의 당혹성 따위 가볍게 무시할 뿐이었다.

“......”

다시금 잦아들은 어색한 분위기와 고요한 침묵에 은성의 표정이 난처하게 변했다.

‘이렇게 가버리면 나보고 어떡하라는 거야...... 에라, 나도 모르겠다.’

끝내 머릿속으로 내뱉은 한 마디를 끝으로 그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그런 그의 모습에 의문이 든 여인이었지만, 이내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은성의 고개가 다시금 들어 올려졌다. 그것도 귀찮음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이다.

“본체 녀석 귀찮게 스리......”
“네?”

갑작스레 뒤바뀐 말투와 분위기에 여인의 입에서 의문성이 새어나왔다. 마치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렸던 것이다. 그녀의 짐작은 정확했다. 지금의 여인의 눈앞에 자리한 사내는 은성이 아닌, 그녀와 직접 인연이 있는 당사자인 천강호(天强虎)였으니 말이다. 결국 어색한 분위기를 참지 못한 은성이 선수교체를 선언했던 것이다(은성은 자신이 몸의 지배권을 가지고 있을 때, 다른 인격을 불러올 수 있었다). 하긴 은성으로서는 말도 제대로 나눠보진 못한 입장이라 무리도 아니었다. 완전히 뒤바뀐 공기의 흐름에 당황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강호는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이름 천강호, 28살, 보시다시피 여기 카페 사장. 그쪽은?”

사무적인 모습으로 정말 간단하게 자신을 설명한 강호의 한 마디에 여인은 화들짝 놀라면서도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아, 제 이름은 정소은이고 22살이에요. 여기 앞에 쥬신대학교 수학교육과 재학중이예요.”
“호오?”

차분하게 자신을 소개하는 여인, 소은의 한 마디에 강호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탄의 표정이 어렸다. 쥬신대학교라면 여느 대학교 중에서도 명문 중에 명문대학교로 수 십 년 동안 수많은 수재들을 배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수험생들의 꿈이자 목표라고 할 수 있는 명문대였다. 게다가 교육쪽으로는 최고로 손꼽히는 쥬신대학교이니 만큼 수학교육과에 재학 중이라면 쥬신대학교에서도 최고의 인재라 할 수 있었다.

“공부 좀 하나봐?”
“아, 아뇨. 억지로 하는 거예요.”

솔직하게 감탄의 말을 내뱉는 강호의 말에도 불구하고 소은의 얼굴은 금세 구겨졌다. 그렇게 공부를 잘하면서도 공부가 어지간히도 싫은가 보다. 이율배반적인 그녀의 모습에 강호의 입가에 웃음기가 어렸다. 공부에 딱히 관심이 없는 자신이기 망정이지 다른 공부 못한 이들이 들었다면 대번에 쌍욕을 퍼부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내겐 무슨 볼일이지?”

냉정하다면 냉정하다고 할 수 있는 무심한 한 마디. 그의 무심한 말에도 불구하고 소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에는 제대로 된 감사를 전하지 못한 것 같아서 찾아왔어요. 그땐 정말 감사했습......”

쾅!

허리까지 숙여 보이며 감사의 뜻을 전하는 그녀였지만, 조금 과했던 것인지 그녀의 이마가 테이블 위로 적중했다. 생각보다 큰 소리와 함께 머리 전체로 퍼져나가는 고통에 소은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부딪힌 부위를 양손으로 문질렀다. 의도치 않은 그녀의 몸 개그에 강호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두 번 감사하다간 몸이 남아나지 않겠는데?”
“웃지 마요! 아야...”

자기 스스로도 꽤나 창피했긴 했는지 애써 큰소리치지만 그녀의 얼굴은 이미 불게 달아올라 있었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던 강호는 이윽고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서 네가 저녁을 사겠다는 거야?”

아무리 연장자라 하더라도 초면에 계속 반말이라니 무례하다고 느낄 법도 했지만, 소은은 오히려 한 치의 불쾌감도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혹시 드시고 싶은 거라도 있으세요?”

두 눈을 반짝이며 강호의 대답을 기다리는 소은. 마치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강아지와도 같은 그녀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강호는 무심한 표정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딱히 없는데.”
“네?”
“딱히 뭐 먹고 싶은 건 없다고.”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는 강호의 한 마디에 소은의 얼굴엔 멍한 표정이 지어졌다. 대놓고 뭐가 먹고 싶다는 등의 말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딱 잘라서 먹고 싶은 것이 없다고 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설마하니 이런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기에 소은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성실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 부담 느끼셔서 그러는 거라면 전 괜찮으니 부담 없이 말씀해주세요.”
“부담이라... 미안하지만,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난 딱히 그런 걸 생각할 정도로 생각이 깊은 편이 아니야.”

지극히 개인적인 그의 한 마디에 소은은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본래 성격이 원래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것처럼 그렇게 상냥한 성격은 아닌 것에 당황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포기할 그녀가 아니었다.

“그, 그럼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있으세요?”
“글쎄, 정 그러면 네가 데려가 주는 건 어때?”
“......네?”

귀찮은 듯이 머리를 긁적이는 강호의 말에 소은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당혹감에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와는 달리 자신의 말이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강호는 피식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다시금 입술을 달싹였다.

“그게 좋겠네. 네가 아는 맛집으로 날 데려가 주는 거야.”
“그, 그런......”
“뭐야, 식사 대접 해준다면서 자신 없는 거야?”

금세 김이 빠져버린 듯한 나지막한 한 마디. 약간에 실망감이 담겨있는 씁쓸한 그의 말에 자존심이 상한 것인지 소은은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 치고야 말았다.

“아, 아니거든요! 걱정 마세요. 제가 아는 최고의 맛집으로 데려가 드릴 테니까요.”
“호오, 그거 꽤 기대 되는데? 그럼 바로 출발할까?”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강호. 그런 그의 모습에 소은의 입에서 당혹성이 새어나왔다.

“버, 벌써요?”

그래도 조금 있어야 출발할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는 강호의 모습에 당황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모습도 잠시 소은은 결의에 가득 찬 표정으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건 분명 기회야.’

조금 당황스럽긴 하지만 이건 분명 기회였다. 본래 식사를 대접하는 것이 목적에서 조금 변질되긴 했지만, 좋아하는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아닌, 맛집으로 데려가는 식이라면 식사가 끝난 이후로도 디저트를 핑계 삼아 그와 더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면 일단 식당부터......”
“자, 가자.”
“우왁!”

금세 옷까지 갈아입고 온 것인지, 모든 채비를 끝마친 강호의 한 마디에 소은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잠깐 안보이다 싶더니 금세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오니 그렇게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가 놀란 것은 그러한 이유만은 아니었다. 네이비 색 셔츠를 바탕으로, 차분한 느낌을 주는 검은색의 니트, 길쭉한 다리를 덮고 있는 청바지까지. 평범한 캐주얼 스타일임에도 자신감 넘치는 그의 모습은 주변 여자들의 시선을 빼앗기 충분했으니 말이다. 마치 어딘가의 모델과도 같은 그의 모습에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소은은 이윽고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계속 그렇게 멍하니 있을 거야?”
“아, 아뇨! 그, 그럼 가요.”

조금 떨리는 음성임에도 불구하고 자신 있게 발걸음을 옮기는 소은을 따라 강호 역시 천천히 발걸음을 떼었다. 어느새 그의 발걸음엔 엷은 귀찮음이 배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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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9-05 11:30 | 조회 : 1,078 목록
작가의 말
류운

죄송합니다 어제 그제 갑작스레 본가에 다녀오고 급하게 일을 좀 처리하느라 늦고 말있네요 기다리신 독자분들께 다시한번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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