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2장 골목길의 인연 - (1)

온종일 세상을 밝게 비추던 태양이 모습을 감추고 어스름한 달이 세상을 비추는 밤. 여느 대학생들에게 있어서 그다지 늦은 시각은 아니었지만, 여인은 침대에 누운 채로 멍하니 핸드폰을 쥐고 있었다. 핸드폰 화면엔 아직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은 누군가와의 대화창만이 떠있었다. 대체 누구와의 대화창이기에 한 마디 말도 오가지 않았을까? 메신저 화면을 켜고서도 여인은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인지 여인은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메신저 대화방 안에 있는 그의 모습을 말이다.

뻐억, 우드득!

그녀의 망상 속에서 한 명의 사내가 아무런 무기도 없이 4명의 양아치들을 쓰러뜨렸다. 어딘가의 실전 격투술이라도 갈고 닦은 것인지 사내는 신기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자신을 성추행하려던 양아치들을 쓰러뜨린 사내. 모든 양아치들을 바닥 위로 몸져눕게 만든 장본인인 사내는 기지개를 켜는 여유까지 보이며 여인을 향해 입술을 달싹였다.

‘하여간 별것도 아닌 것들이 까불기는. 어이 거기, 괜찮아?’

벌써 수십 번도 더 되돌아보며 질리도록 들은 말이었건만, 내성이 생기지 않는 것인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얼굴에 엷은 홍조가 피어올랐다.

“꺄악! 어쩜 좋아.”

핸드폰을 들어 올린 채로 침대를 굴러다니는 것이 어지간히도 좋은가 보다. 그렇게 몇 바퀴쯤 굴러다녔을 때 즈음 무심코 누른 그의 사진으로 그녀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어라? 여기는...... 왁!”

물론 한참을 굴러다닌 대가로 침대에서 떨어지는 고통을 맛봐야했지만 말이다.

“아야야......”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묵직한 고통에 우는 시늉을 하면서도 여인은 화면 너머로 보이는 사진 속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여기는 ‘클라리스’잖아.”

사진 속 사내가 자리하고 있는 곳, 그곳은 놀랍게도 여인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곳이었던 것이다. 비록 커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탓에 자주 가는 곳은 아니었지만, 근처에 학교를 다니는 여대생이라면 꼭 알아야하는 핫 플레이스였으니 말이다. 생각지도 못하게 그에 대한 단서를 구하게 된 여인은 고심에 잠겼다. 막상 다시 그를 만날 수도 있는 단서는 구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쉽사리 정리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생각에 잠겼을까? 한참의 고심 끝에 여인은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일단 한번 찾아가볼까?”

결의에 가득 찬 표정을 지으며 여인은 자신이 내린 결론에 흡족해하며 기대감이 어린 표정을 지어보였다. 과연 그녀 계획대로 일이 잘 풀릴지는 조금 더 지켜볼 일이었다.

***********************

다음 날.

“후아, 나른한 오후로구나. 매일 오늘만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제 일자리를 위해서라도 그러지 않기를 바라야겠네요.”

좀처럼 맛보기 힘든 오후의 휴식을 즐기며 나른한 미소를 짓는 은성에게로 장난기 어린 채희의 독설이 파고들었다. 꽤나 현실적인 한 마디였지만, 그녀도 오후의 휴식이 내심 싫지만은 않은 것인지 그녀의 얼굴엔 카페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여유가 자리하고 있었다. 비수와도 같은 그녀의 말에 은성은 조금 찔렸던 것인지 애써 변명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뭐, 뭐 어때? 매일 이러는 것도 아니고 얼마나 오랜만에 낮에 쉬는 거잖아.”
“젊었을 때 돈 많이 모아야죠. 그러다 노후 힘들어져요.”
“내 나이에 무슨 노후야......”

마치 동네 어르신들이나 할법한 말투로 조언을 건네는 채희의 모습에 은성은 난감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은성의 나이 올해로 28세. 그렇게 적은 나이도 아니지만, 벌써부터 노후를 걱정할 만큼 늙은 나이도 아니었다.

“게다가 아직 결혼도 안했는데 말이야.”
“그러니까 빨리 연애부터 하시죠. 사지 멀쩡하신 분이 왜 연애를 안 하세요?”

한숨어린 은성의 푸념에 채희의 말이 비수가 되어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연애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고 있는 솔로에게 그만큼 심한 말이 없었다. 하지만 채희의 독설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계속 그렇게 솔로로만 지내면 영영 솔로로 사는 수가 있어요. 아, 혹시 그쪽 취향......”
“아니야!”

미심쩍은 표정으로 훑어보는 듯한 채희의 시선에 결국 은성의 입에서 단호한 일갈이 터져 나왔다. 하긴 무리도 아니었다. 일반적인 성적 취향을 가진, 즉 여자를 대상으로 연애감정을 느끼는 남자가 게이로서의 의심을 받았으니 말이다. 아마 친한 동성친구가 저런 말을 했다면 주먹을 날렸으리라.

“아니면 빨리 연애 좀 하세요. 얼굴도 괜찮고, 능력도 차고 넘치시는 분이 왜 연애를 안 해요.”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라니까......”

채희의 칭찬 아닌 칭찬에 섞인 냉정한 한 마디에 결국 가장 하고 싶지 않았던 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푹 숙인 은성이었다.

“저, 저기......”

조심스럽게 그들 사이로 퍼져나가는 여인의 목소리. 낯선 여인의 목소리에 은성과 채희는 황급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아무래도 귀에 익지 않은 목소리이다 보니 커피를 마시기 위해 말을 건 손님이라 생각한 것이다.

“네, 무슨 일...... 어라?”
“이, 이따가 같이 저녁 먹으러 가실래요?”

의외로 낯이 익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은성과 다짜고짜 허리를 숙이며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여인을 바라보며 채희는 생각했다. 잘만하면 사장님이 조만간에 솔로부대를 탈영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

10분전......

“분명 이 근처였는데.”

20대 초반의 청춘 남녀들을 바탕으로 한 온갖 사람들로 북적이는 대학로. 그 한복판에서 여인은 사진 속의 사내가 자리하고 있는 카페, ‘클라리스’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카페 외형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다지 즐겨 찾지 않는 탓에 그곳으로 향하는 길이 헷갈린 것이다. 살짝 눈살을 찌푸린 채, 머리를 긁적이던 여인, 이윽고 여인은 최후의 수단이라 할 수 있는 마지막 패를 꺼내보였다. 금세기 최고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 스마트폰을 꺼내들은 것이다.

“어디보자 그러니까... 이쪽인가?”

지도 앱으로 거리의 모습을 확인하며 여인은 목표했던 ‘클라리스’로 향하기 시작했다. 한 5분 정도 걸었을까? 문명의 힘이 빛을 발한 것인지 여인은 고풍스러우면서도 편안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카페, ‘클라리스’의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여, 여기에 그 사람이......”

그저 프로필 사진의 배경이 카페였다는 이유만으로 대책 없이 찾아온 것이지만, 여인은 기억 속의 사내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자신의 옷매무새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진청색의 루즈핏니트와 흰색의 짧은 반바지, 검은색의 크로스백과 부츠까지 캐주얼하면서도 귀여운 매력이 물씬 풍기는 패션이었다. 그렇다고 외모 역시 빠지지 않았다. 갈색의 살짝 웨이브진 포니테일에 청명한 다갈색의 눈동자, 갸름한 턱선, 애교 넘치는 볼살에 은은한 분홍빛을 띠는 입술까지. 또래 여대생들과 비교해 봐도 전혀 꿀리지 않는, 오히려 전체적으로 앳되면서도 귀여운 모습이 여느 여대생들보다도 상당히 예쁜 미모의 소유자였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그녀의 주위에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는 사내들의 반응으로 봐서 괜찮은 정도는 이미 옛날에 넘어섰지만, 전혀 자각하지 못한 것인지 여인은 유리로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나서야 카페 안으로 발을 들일 수 있었다.

따랑!

은반 위를 굴러가는 구슬 소리처럼 현관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진다.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현관종소리를 배경삼아 발을 들인 카페 안은 예상 외로 한산했다. 점심시간은 이미 훌쩍 지나버렸기 때문일까? 오전과 오후에 수업이 끝나자마자 간단히 채비를 하고 온 것이 호기로 작용했는지, 드문드문 자리를 채운 사람들을 제외하고 조용한 카페의 모습에 여인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차, 찾았다!”

역시 예상대로랄까? 여인은 손쉽게 목표로 했던 사내를 발견하고 자신만 들릴 만큼의 작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메신저 프로필 사진을 보고 대충 예상은 했지만, 사내는 아무래도 카페의 바리스타 같았다. 입고 있는 복장은 물론이거니와 그가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곳 역시 커피를 만드는 기계들로 즐비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사내는 다른 여자 바리스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주제가 그다지 좋지 못한 것인지 기운 빠진 모습으로 한숨을 내쉬는 그의 모습에 여인은 그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무슨 이야기인지 호기심이 동한 것이다.

“게다가 아직 결혼도 안했는데 말이야.”
“그러니까 빨리 연애부터 하시죠. 사지 멀쩡하신 분이 왜 연애를 안 하세요?”

때마침 연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 사내의 여자 친구 유무를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인 대화주제에 여인은 귀를 쫑긋 세우며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어찌나 긴장을 한 것인지 그녀도 모르게 그녀의 목으로 마른 침이 삼켜진다.

“계속 그렇게 솔로로만 지내면 영영 솔로로 사는 수가 있어요. 아, 혹시 그쪽 취향......”
“아니야!”
“우왁!”

단호한 목소리로 여자 바리스타의 말꼬리를 끊으며 소리치는 사내의 모습에 여인의 입에서 당혹성이 새어나왔다. 몰래 듣고 그녀로서는 갑작스런 사내의 외침이 그렇게 당황스러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그런 그녀의 당혹성은 듣지 못한 것인지 그들은 다시금 대화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아니면 빨리 연애 좀 하세요. 얼굴도 괜찮고, 능력도 차고 넘치시는 분이 왜 연애를 안 해요.”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라니까......”

힘없이 중얼거리는 사내, 희미하게 말꼬리를 흐리는 사내의 마지막 한 마디에 여인의 머릿속에 한 줄기 섬광이 내리쳤다.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한다는 말은 주변에 마음에 드는 여자가 없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다면 아직 나한테도 가능성이 있어!’

그렇게 결론을 내린 여인은 결국 들뜬 마음에 고개를 푹 숙인 사내를 향해 조심스럽게 운을 떼고 말았다.

“저, 저기......”
“네, 무슨 일...... 어라?”
“이, 이따가 같이 저녁 먹으러 가실래요?”

패는 다 돌려졌다. 그럼 이제 남은 것은 패를 확인하는 것뿐. 여인은 기대에 가득 찬 표정으로 사내의 말을 기다렸다. 마치 기대감에 쉽사리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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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9-03 11:28 | 조회 : 935 목록
작가의 말
류운

간만에 술한잔 해서 늦잠 좀 자려했더니 햇빛이 절 놔두질 않네요 얼굴 익어버리는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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