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1장 다중인격(多重人格) - (6)

“누나!”
“역시 율이 너였구나......”

순식간에 뒤바뀌어 버린 호칭은 물론이거니와 강호는 전혀 보이지 않던 해맑은 눈웃음까지 지어보이며 은성의 몸에 자리 잡은 4번째 인격인 ‘율’의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의 예상이 들어맞은 것에 시연은 씁쓸한 한숨을 토해냈다. 반가우면서도 그다지 반갑지 않은 인격이 튀어나온 것에 말이다. 하지만 율은 그녀의 의중은 이미 안중에도 없는 것인지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미소만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정말 오랜만이야 누나. 그동안 잘 지냈어?”
“으, 으응.”
“다행이다. 어디 아프거나 하진 않건 아니지? 나 정말 누나보고 싶었어. 누나도 그래?”
“나도 보고 싶었어.”

정말 순진한 어린아이처럼 환한 미소와 함께 쉴 틈 없이 쫑알거리는 율의 모습에 시연 역시 한껏 피곤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율은 다른 인격들 중에서도 가장 나중에 태어난 인격으로, 굳이 따지자면 시연보다 더 어렸다. 그것이 문제였다. 좋아하는 소꿉친구가 한순간에 동생이 되어버리는 흔치 않은 상황 때문에 항상 세심하게 챙겨주었던 것이 그가 자신에게 호감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어버리고만 것이다. 덕분에 의도치 않게 형성되어버린 삼각관계(?)이니 만큼 그녀로서는 불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은성의 몸에 자리 잡은 4개의 인격들 중에서도 율은 가장 ‘위험한’ 인격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무지는 곧 죄라고 했던가? 그러한 사실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채, 단지 또 한 번 무시를 당했다는 이유로 사내들은 뿌득뿌득 이를 갈기 시작했다.

“사람을 무시하는 것도 정도껏이지!”
“말 좀 쳐 들으란 말이야!”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것인지 결국, 사내들은 각자의 무기를 꼬나 쥔 채, 율과 시연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성의 끊을 놓아버린 채, 분노에 몸을 맡기고서 달려드는 사내들. 마치 성난 들소처럼 달려드는 사내들의 모습에 율의 눈동자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아나, 진짜.”

퍽!

허공을 가르며 탄환처럼 쏘아진 율의 각목이 사내의 얼굴을 강타했다. 보통의 사람들은 사람을 때리는 데에 망설임이 있어 조금 주저할 법도 하건만, 그런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언제 휘두른 것인지 제대로 인지하기도 힘들 정도로 빠르게 휘두른 율의 일격에 사내의 신형이 바닥으로 처박혔다. 너무나도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상황, 그것도 자기 동료가 바닥에 처박혀서 파르르 떨고 있는 모습에 사내들은 자신들이 훨씬 더 유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무심코 뒤로 물러나고야 말았다.

콰직!

이윽고 바닥에 쓰러진 채, 파르르 떨고 있는 사내의 위로 율의 발바닥이 떨어져 내렸다. 일말의 자비조차 느껴지지 않는 단호한 발길질. 잔혹하기 그지없는 그의 행동에 사내들은 물론 시연 역시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버러지 같은 것들이 짜증나게 시리. 다 죽여 버린다?”

골목 사이로 퍼져 나가는 섬뜩한 낮은 목소리, 단지 짜증이 치민다는 이유만으로 각목으로 후려치고 강하게 짓밟아버린 율의 행동에 시연은 식은땀을 흘리며 자기도 모르게 무심코 마른 침을 삼키고 말았다. 결국 우려하던 사태가 일어나고 만 것이다.

“......사이코패스(Psychopath)”

사내들은 들리지 않을 만큼, 기어들어가는 듯한 조용한 목소리가 그녀 주위로 울려 퍼졌다. 공감능력과 죄책감이 결여된 이들 사이코패스, 율은 바로 그들 중 한 명이었다. 그나마 천만 다행히도 평소에는 시연 덕분에 폭력성이 자제되고 있었건만, 그를 미처 알지 못한 사내들이 율의 억눌린 폭력성을 건드리고만 것이다. 강호로 인해 다져진 탄탄한 체력과 현의 지략을 모조리 흡수한 희대의 사이코패스인 율을 말이다.

“다, 당황하지 마! 놈은 혼자야. 전원이 달려들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 자식!”

동료의 말에 힘을 얻은 것일까? 사내들은 금세 두려움을 억누르고 율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허나 그것을 곧이곧대로 맞아줄 율이 아니었다. 조용히 두 눈으로 사내들의 공격을 쫓으며 하나 둘씩 묘기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피해내는 율. 그리고 이어서 율의 각목이 사내들을 향해 휘둘러졌다.

퍽, 퍽

여지없이 사내들을 강타하는 율의 각목, 그와 동시에 사내들의 입에선 단말마의 신음소리가 골목을 가득 메워 나갔다.

“컥!”

강호로 인해 단련된 신체능력들을 활용하여 순식간에 틈을 파고 들어간 다음, 망설임 없이 휘둘러지는 각목. ‘과연’이라 해야 할까? 폭격과도 같은 율의 각목에 끝내 모든 사내들은 바닥을 나뒹굴고 말았다. 그다지 오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아서 말이다.

“꿀꺽!”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시연의 목으로 마른 침이 삼켜졌다. 설마하니 단신으로 무기를 들고 있는 사내들을 모조리 제압할 줄은...... 조금 예상했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꽤나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아, 더럽게 진짜.”

눈살을 찌푸린 채, 사내들에게서 튄 턱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내며 율은 한 걸음 한 걸음 그 중 리더로 보였던 이에게로 다가갔다.

툭, 툭

“그러게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 건들고 그래. 응?”
“으으윽......”

발로 툭툭 건드리며 입술을 달싹이는 율의 모욕적인 한 마디에도 불과하고 고통이 꽤 큰 것인지 사내는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무런 방어적인 행동조차 취하지 못하는 그였지만, 율은 그저 담담히 다시금 각목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

“그럼 이만 죽어.”

사형선고와도 같은 싸늘한 한 마디. 그리고 그와 동시에 율의 각목이 쓰러진 사내에게로 향하려는 그 순간!

“율아 안 돼!”

뚝.

황급히 소리치는 시연의 외침과 동시에 피로 얼룩진 각목이 정확히 사내의 머리칼 바로 앞에 멈춰졌다. 정말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아마 사내는 영영 내일의 아침 햇살을 보지 못했으리라. 다행히도 눈앞에서 살해 현장만큼은 보지 않았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시연의 입에서 안도감이 섞인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하지만 그에 비해 뭐가 불만인지 율의 표정은 불만스럽기 그지없었다.

“왜?”
“왜라니......”
“가만히 있는 우리한테 먼저 덤벼든 건 이 놈들이잖아. 게다가 이런 것까지 들고서. 그런데 왜 죽이면 안 돼?”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율의 물음에 시연은 차마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 못하며 공감능력이 결여된 그로서는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질문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시연으로서는 먼저 공격했다고 해서, 사람을 죽인다는 사실이 전혀 당연할 리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은성의 몸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구경만할 수도 없는 노릇. 끝내 시연은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로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그렇다고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이면 안 돼. 자, 각목은 버리고 누나랑 같이 집에 가자. 응?”

조금 불안한 기색으로 입술을 달싹이는 시연이었지만, 다행히도 그녀가 상상하던 불길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응, 누나.”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율은 피로 얼룩진 각목을 던져버리고 냉큼 그녀의 손을 붙잡았던 것이다.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헤실거리며 그녀의 손을 잡은 율은 금세 그녀를 잡아 이끌기 시작했다. 행복한 표정을 지은 채, 막무가내로 잡아끄는 율. 그런 그의 손길에 시연은 한숨을 내쉬며 그가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떼었다. 많은 사내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쓰러져 있는 쓸쓸한 골목을 내버려 둔 채로.

***********************

빼곡하게 자리하여 검은 하늘을 비추는 은은한 별빛과 새하얀 월광을 흩뿌리는 서울의 달 아래, 주홍빛으로 거리를 밝히는 가로등 사이로 율과 시연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게다가 두 손을 꼭 마주잡고 걷는 것이 언뜻 보기에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연인들의 모습이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녀와 손을 마주잡은 것으로 율은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긴 했지만, 그에 비해 시연은 그저 울먹이는 어리광부리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손을 잡아주고, 집으로 바래다주는 듯한 느낌 밖에 들지 않았으니 말이다. 상반된 감정으로 손을 마주 잡은 그들의 정적은 이내 율에 의해서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누나.”
“응?”

난데없는 그의 부름에 시연은 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그렇게도 좋은 것일까? 율은 한층 신이 난 표정을 지어보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누나 저기 들렀다 가자.”

율이 가리킨 곳, 그곳엔 아파트 단지 내에서 위치한 조그마한 놀이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눈빛을 반짝이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율의 모습에 그녀는 피식 미소를 지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잠깐 들렀다 가자.”
“응!”

그녀의 허락이 그리도 좋은 것일까? 율은 해맑은 미소와 함께 재빨리 놀이터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율이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바로 그네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었다. 눈 깜짝할 새에 그네 앞으로 도착한 율은 이윽고 그네에 앉은 채, 옆에 있는 그녀를 가리키며 그녀를 부르기 시작했다.

“누나, 누나도 빨리 와.”
“그래그래, 잠깐만 기다려.”

그야말로 철부지 어린아이와도 같은 반응. 그런 그의 반응에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시연은 그가 가리킨 그네로 몸을 기댔다. 아직 봄이기도 하고 새벽 공기로 인해 온도가 내려간 것인지 차가운 그네의 감촉이 그녀의 피부로 파고들었다.

“오랜만에 누나랑 그네 타니까 좋다.”

가감 없는 순수한 한 마디, 아직 어린(정신이) 탓일까? 해맑게 미소 짓는 그의 한 마디에 시연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아무리 다른 인격이라고는 하지만, 은성의 몸으로 서슴없이 고백과도 같은 말을 내뱉으니 새삼 부끄러워진 것이다. 그런 그의 말에 용기를 얻은 것일까? 시연은 율을 향해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율아.”
“응?”
“......아까 무섭지 않았어?”
“누나 아까 무서웠어? 역시 아까 그냥 다 죽여 버릴 걸 그랬나?”

그녀의 말 한 마디에 금세 눈살을 찌푸리며 진지하게 고심에 잠긴 율. 당장이라도 아까의 사내들을 죽이기 위해 뛰쳐나갈 듯한 그의 모습에 시연은 황급히 입술을 달싹였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아까 죽을 수도 있었는데 무섭지 않았냐는 말이야.”

그런 그녀의 말이 더 난감했던 것일까? 율은 한층 더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매만지며 고심에 빠졌다. 하지만 그것도 이내 잠시, 율은 어떻게 할 지 모르는 복잡한 표정으로 시연을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나, 무섭다는 게 어떤 거야?”

짤막하면서도 커다란 울림을 가져다주는 율의 한 마디, 그런 그의 한 마디에 시연은 망치에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은 채,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모습이 상당히 당혹스러웠던 것인지, 율은 한껏 미안한 표정으로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미안 누나. 나도 대답하고 싶은데, 무섭다는 게 어떤 건지 정말 모르겠어.”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율. 그런 그의 모습에 시연은 황급히 고개를 가로 저으며 차분히 입술을 달싹였다.

“아니야, 누나가 미안해. 네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걸 깜빡했어.”
“나 이상한 거야?”

조금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율의 모습에 시연은 이내 마음을 차분히 진정시키고 천천히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니, 네가 이상한 게 아니야. 사람이 태어나면서 모든 것을 다 알고 태어나는 게 아니라 저마다 모르는 것이 있잖아. 그런 것처럼 율이 너는 ‘무섭다’라는 느낌을 모르는 것뿐이야.”
“그런 거야?”
“응, 하나 둘씩 천천히 배우면 되는 거야. 알았지?”
“응!”

슬픔이 어려 있으면서도 상냥한 미소를 띠어 보이는 시연. 그런 시연의 대답에 율은 당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 말씀 잘 듣는 어린 아이처럼, 해맑게 웃음 지어 보였다. 이윽고 갑자기 뚝 떨어지는 율의 고개. 그와 동시에 그의 입에서 미약한 신음 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으으......”
“율아?”

갑작스레 뒤바뀐 분위기, 조금 전의 천진난만한 구석은 어디 간 것인지, 순식간에 뒤바뀌어버린 공기의 흐름에 시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그녀의 궁금증을 해소하기라도 하듯이 그는 천천히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아직도 율이로 보여?”

너무나도 익숙한 말투와 귓가를 아른거리는 편안한 목소리. 조금 장난기가 어려 있긴 하지만 그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은성아!”
“미안, 애들이 많이 귀찮게 했지?”

반가움에 화들짝 놀라는 그녀의 모습에 내심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은성은 사과를 건넸다. 비록 자신이 직접 행한 일들은 아니었지만, 다른 인격들이 자신의 몸을 움직이는 것을 보며 줄곧, 폐를 끼쳤다는 생각에 계속 미안했던 것이다(인격이 바뀌는 동안에는 모든 상황을 직접 겪은 것처럼 자세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소리를 작게 틀어 놓은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대강의 상황은 알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사과의 뜻을 전하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피식 조그만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뭐가 그렇게 미안해 정말. 난 괜찮다니까. 괜히 네 담당 의사가 아니라고. 알겠어요 환자분?”

그렇게 입술을 달싹이며 그녀는 복잡하게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잡념들을 훌훌 털어버렸다. 바로 이런 점 때문이었다. 자신보다도 항상 남을 생각해주는 상냥함, 이것이 바로 그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린 이유였다. 하지만 그런 말에도 약간이나마 미안함이 남아있는 것인지, 조금 망설이는 듯한 그의 모습에 그녀는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리곤 그네를 박차고 일어섰다.

“나 졸려, 이제 그만 들어가자 응?”
“버, 벌써?”

갑작스레 그네를 박차고 일어서는 그녀의 모습에 은성의 입에서 당혹성이 튀어나왔다. 무리도 아니었다. 좋아하는 그녀와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은데 그만 돌아가자고 하는 말에 안타까운 것이다. 그녀 역시도 그를 향해 몰래 연심을 품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뭔가 꿍꿍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녀는 내심 기분 좋으면서도 겉으로는 전혀 티내지 않은 채, 오히려 귀찮다는 듯이 입술을 달싹였다.

“오늘 하루 종일 돌아다녔잖아. 나 피곤해.”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한 마디였지만, 솔직히 은성은 너무 억울했다. 그녀와 함께 하루 종일 돌아다닌 건 사실이지만, 그것은 자신의 몸 안에 있는 다른 인격들이었지, 자신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순식간에 풀이 죽은 강아지와도 같은 모습을 보이는 그의 모습에 시연은 그는 보이지 않을 만큼 조그만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나 집까지 데려다 줘. 설마 나 혼자 집에 보낼 건 아니지? 이 야밤에.”
“무, 물론이지!”

그녀의 물음에 냉큼 고개를 끄덕이고는 좋은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은성. 그 모습을 훔쳐보며 시연은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이거 완전히 어장 안의 물고기 신세나 다름없었다. 그녀의 밀당에 이렇게나 흔들리는 꼴이라니 말이다. 연애에 해박한 남자들이 봤다면, 안타까움에 혀를 찼을 것이 분명했다. 손쉽게 그의 승낙을 받아낸 시연은 이윽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빨리 안 오면 먼저 가버린다?”
“우왓! 천천히 가.”

아스라이 아른거리는 희미한 달빛 아래로 서로에게 연심을 품은 두 청춘남녀는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로에게 들키지 않게끔 아주 천천히 말이다.

************************

촉촉하게 젖은 머리칼이 찰랑거리며 사방으로 남은 물기를 흩뿌렸다, 방금 막 샤워를 끝낸 것인지 시연은 손에 쥐고 있던 수건으로 젖은 머리칼을 털어냈다. 집에서 편하게 입는 흰색 반팔 티와 파란색의 짧은 반바지 차림이었지만, 촉촉하게 젖은 피부 위에 눈부신 외모를 기반으로 뿜어지는 섹시미는 남자들로 하여금 이성을 잃게 하기 충분했다. 이윽고 머리를 말리던 그녀의 시선이 어느 한곳으로 향했다. 그녀의 시선이 다다른 곳, 그곳엔 온갖 서류들로 어지럽게 뒤덮인 책상과 기묘한 차트들이 즐비하게 떠오른 컴퓨터 화면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제 머지않았어...... 조금만 기다려줘 은성아.”

왠지 모르게 가슴 한편이 아려오는 나직한 목소리. 그 말끝에 서려 있는 그의 이름만이 어스름한 달빛이 뒤덮은 밤하늘 아래 조용히 흘러나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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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9-02 18:06 | 조회 : 856 목록
작가의 말
류운

역시 2편씩 올리니 금방 끝나네요 1장은 이걸로 마무리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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