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1장 다중인격(多重人格) - (4)

촤르륵!

“고생하셨습니다.”
“너도 수고했어.”

어느덧 세상을 밝히던 태양을 대신하여 화려한 네온사인과 가로등이 거리를 밝히는 시간, 척 보기에도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채희의 한 마디에 은성... 아니, 현은 그녀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모든 하루 일과를 마치고서 지친 기색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채희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준 현은 이내 시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낮에 있었던 일에 아직까지도 토라져 있던 것인지 그녀의 얼굴엔 삐진 기색이 가득했다.

“이제 좀 적당히 하지?”
“흥!”

참다못한 현의 입에서 냉정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지만, 그녀의 반응은 냉담할 뿐이었다. 결국 계속해서 이어지는 그녀의 반응에 현은 최후의 한 수를 꺼내들고야 말았다.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피곤해지는 것은 어차피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어, 어라... 시연아?”
“......설마 은성이야?”
“아... 응. 현이 녀석 뭔가 또 사고 친 거야?”

몸의 제어를 다시금 은성이에게 넘겨버린 채, 의식 세계 너머로 도망쳐버린 현. 그런 현의 모습에 시연은 새어나오는 한숨을 되밀어 넣으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흔들고 말았다.

“으응, 아무것도 아냐. 그보다 일도 끝났는데... 오랜만에 치맥이나 먹을까?”
“치맥? 나야 좋지.”

그녀의 제안이 그리도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마치 꼬리를 흔들며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마냥 환하게 미소 짓는 은성의 모습에 시연의 입가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정말이지 귀여워 죽겠다니까.’
‘시연이랑 치맥이라... 현이 녀석이 도움이 될 때도 있네.’

서로의 진심을 눈치 채지는 못한 채, 그저 같이 술을 마신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두 사람. 제 3자의 입장으로서는 그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없었지만, 이윽고 두 사람은 근처 호프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근처가 대학로인 특성상 맛이 좋으면서 싸고 양 많은 치킨집은 잔뜩 있었으니 말이다.

“어? 여기 어때. 친구들이 여기 괜찮다더라.”
“응응, 들어가자.”

어느 치킨집 앞에 멈춰선 채로 해맑은 미소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시연의 모습에 은성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하는 그녀와 단둘이 즐기는 치맥이니 그로서는 어디든 상관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띠어 보이면서도 시연은 한 걸음씩 치킨집 내부로 들어섰다. 꽤나 장사가 잘되기는 한 것인지 가게 내부엔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가게 안을 가득히 채우는 사람들 사이로 자리를 찾아 헤매던 두 사람. 하지만 그것도 이내 잠시, 가게 안을 두리번거리는 그들에게로 한명의 종업원이 다가갔다.

“어서 오세요. 총 몇 분이신가요?”
“2명이요.”
“네, 그럼 두 분 자리 안내해 드릴게요.”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자신들에게로 다가오는 종업원의 안내를 받으며 은성과 시연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 쪽 창가자리 괜찮으세요?”
“네, 여기로 앉을게요.”
“알겠습니다. 금방 메뉴판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공손하게 말을 건네는 종업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기 시작하는 시연을 따라 은성 역시 그녀의 앞의 자리에 지친 몸을 기댔다. 비록 정신은 반나절은 쉰 상태였지만, 그 몸은 이미 하루를 꼬박 일한 셈이었으니 육체적으로 꽤나 피곤했던 것이다.

“하암.”
“쿡쿡, 많이 피곤해?”

어느새 하품까지 하며 기지개를 켜는 은성의 모습에 시연은 테이블 위로 턱을 괸 채로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가게의 조명을 받아 더욱 더 예뻐 보이는 시연의 모습. 평소에도 충분히 예쁜 그녀였지만, 조명을 바다 더욱 더 빛을 발하는 그녀의 미모에 은성은 양볼을 발그레하게 물들이면서도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아, 아니 그냥 조금이랄까. 그보다 우리 뭐 먹을까.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행여나 자신의 속마음이 들킬까 황급히 화제를 바꾸는 은성. 그런 은성의 의도가 먹혀들은 것인지 시연은 이내 고심에 잠기기 시작했다.

“흠, 일단 치맥이니까 맥주 1700cc에 치킨은 살짝 매콤한 걸로 먹을까?”
“나야 좋지.”

평소 매운 맛을 즐기기도 했지만, 그녀와 함께하는 치맥이기에 그의 표정은 더욱 더 밝았다.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미소로 답하는 그의 모습에 시연의 표정 역시 금세 밝아졌다. 아무렇지 않은 척 제안한 듯 보이지만 그것은 사실 치밀한 그녀의 계획 하에 이뤄진 일이었다. 20년이 넘도록 소꿉친구로 지내왔기에 매운 맛을 좋아한다는 그의 입맛은 빠삭하게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일부러 그가 입맛에 딱 맞는 치킨을 고른 그녀는 한층 밝아진 표정으로 점원을 불렀다.

“여기요.”
“네, 어떤 걸로 드릴까요?”
“여기 이거랑, 맥주 1700cc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공손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이내 곧 시야에서 사라져버리는 점원의 모습에 시연은 다시금 미소를 지어보이며 은성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둘이서 술은 진짜 오랜만이네.”
“요새 네가 매일 바쁘잖아.”
“에휴, 말도 마. 나도 가끔은 쉬고 싶다니까.”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휘휘 내젓는 시연, 은성의 말이 신호탄이 되었던 것인지 그녀는 신이 나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난리도 아니라니까. 괜히 아빠 병원으로 들어온 건가 싶기도 하고.”

꽤나 규모가 큰 대형병원의 병원장을 역임하고 있는 그녀의 아버지이기에 다른 이들보다 편히 병원에 의사로 취직했을 것이 분명했다.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아직까지 혈연, 지연, 학연이 강하게 남아있는 나라이니 말이다. 그나마 졸업한 의대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높은 성적을 갖고 있던 그녀이기에 이렇다 할 반발은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얘가얘가. 아주 복에 겨워서는. 남들은 들어가고 싶어도 못 들어가는 사람이 널리고 널렸다고.”
“다 노력 부족이야. 남들보다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니까?”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꽤나 듣는 이로 하여금 신경을 거슬리는 말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래 너 잘났다.”
“헹, 이제 알았어. 나 잘난 줄?”
“이그, 무슨 말을 못하게 하네.”

머리를 쥐어박는 시늉까지 해가며 웃고 떠드는 두 사람. 이윽고 그런 그들에게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그럼 맛있게 드세요.”

차분하게 물기가 송글송글 맺혀있는 시원한 맥주와 입가에 군침을 돌게 하는 치킨을 내려놓는 점원의 한 마디에 둘의 시선이 단번에 음식으로 집중되었다. 막상 음식이 나오니 치맥의 맛을 잘 알고 있는 그들로서는 절로 입맛이 돌기 시작했던 것이다.

“자, 그럼 일단...”
“먹기 전에 한잔 맞지?”

가볍게 맥주잔을 들어 올리는 그녀의 모습에 그녀에게서 맥주잔을 뺏어들며 은성은 가볍게 고개를 으쓱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시연은 피식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로 그의 머리 위에 가볍게 손을 가져다 대었다.

“아이구, 내 새끼 완전 다 컸네.”
“누, 누가 네 새끼야.”

내심 좋아 죽으면서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않은 모습을 보이며 은성은 그녀의 잔에 맥주를 따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서로의 잔에 가득 채워진 맥주잔. 그리도 누가 먼저랄 것도 할 것 없이 이내 두 사람은 각자의 눈높이에 가득 찬 맥주잔을 들어올렸다.

“자 그럼...”
“건배!”

짠!

그렇게 두 개의 잔이 부딪히며 나는 맑은 유리소리를 시작으로 둘의 잔은 빠르게 비어가기 시작했다. 편안한 대화로 인해 빚어지는 해맑은 웃음소리를 배경음악 삼아서 말이다.

***********************

“그랬다니까 정말.”

금세 또 한 잔의 소맥을 비워내며 말을 이어나가는 시연. 옆에 즐비하게 놓인 빈 병들만 아니라면 술자리를 이제 막 시작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멀쩡한 그녀와는 달리 은성의 상태는 심상치 않았다. 몇 잔...... 아니 몇 병을 마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소주까지 추가시켜 몇 번이나 잔을 비워냈음에도 불구하고 은성은 물론 시연마저도 그저 엷은 홍조만 띄고 있을 뿐인 멀쩡한 모습이었다. 누가 짜 맞추기라도 한 것인지 그들은 이미 대학교 때부터 주당으로 유명했던 것이다. 도저히 두 명이서 마셨다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줄줄이 세워진 술병을 의식한 것인지 시연은 살짝 불안한 기색으로 은성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야, 은성아 괜찮지?”
“응? 뭐가.”

마찬가지로 살짝 발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을 뿐 전혀 아무렇지 않는 그의 모습에 시연은 피식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자신의 주량의 반도 못 쫓아오는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은성만큼은 착실하게 자신과 같이 술을 마셔주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이 맛에 같이 술을 마신다니깐.’

조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내심 좋아 죽으면서도 그녀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그에게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것도 아냐. 더 마실 수 있지?”
“물론이지.”

이미 몇 병이나 비워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더 마실 수 있는 것인지 기운차게 대답하는 그의 모습에 배시시 웃어보이던 시연은 이내 아쉬운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미안, 이 이상은 내가 안 될 거 같아.”
“역시 힘든 거야?”
“아니, 힘들진 않은데 내일은 출근해야 되니까.”
“......그래? 어쩔 수 없지.”

그녀 못지않게, 아니 오히려 그녀보다도 훨씬 아쉬웠던 것인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은성의 얼굴에 짙은 아쉬움이 내려앉았다. 마치 주인이 놀아주지 않아 풀이 죽은 강아지와도 같은 반응을 보이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쿠쿡, 나머지는 다음에 또 마시고 오늘은 이제 슬슬 일어나자.”
“그래.”

말 잘 듣는 애완동물처럼 시연의 말에 금세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은성. 하지만 다가오는 낯선 이들에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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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9-01 22:17 | 조회 : 1,109 목록
작가의 말
류운

죄송합니다 개강 첫날부터 이것저것 일이 많아서 이제야 올리네요 ㅠㅠ 늦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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