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1장 다중인격(多重人格) - (3)

“매니저? 아, 네가 사장이야.”
“예, 제가 바로 사장입니다. 그러니 제 직원은 그만 건드리시고, 불만이 있으시다면 제게 말씀하시지요.”

평소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아닌, 서릿발 같은 은성의 한 마디에 주눅이 들 법도 했지만,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것인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옆에서 다 들었으니까 잘 알겠지? 난 이 따위 음식들에 돈 못 내겠으니까 당장 내 돈 환불해 달라고.”
“저희 매니저가 이미 말씀 드렸을 텐데요. 다른 음식점이나 카페에서라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음식의 맛이 입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는 환불이 불가능합니다. 애초에 카푸치노는 하얀 우유와 부드러운 우유거품에 에스프레소를 섞어 만든 커피로 별다른 시럽을 넣지 않는 한 커피 특유의 씁쓸한 맛이 배어나오는 음료입니다. 초콜릿 시폰 케이크 역시 마찬가지로 초콜릿이 함유되어 있으니 달수밖에 없고요. 그런데 음식 고유의 맛이 강하게 난다고 해서 환불이 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차분하게 설명을 반복하는 듯하면서도, 날카롭고 냉철한 분위기로 조목조목 입술을 달싹이는 은성의 반문에 그 광경을 지켜보던 다른 손님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히 이상한 맛이 나는 것도 아니고 본래의 음식 특유의 맛이 난다는 이유만으로 환불이 가능하다면 이 세상 누가 돈을 주고 음식을 먹을 것이며, 누가 식당을 운영하겠는가?

“커피가 쓰고 케이크가 단 건 당연한 거잖아.”
“그러니까, 설마 몰랐다고 하진 않겠지. 그것도 모르면 왜 카페에서 음식을 사먹는 거야?”
“무식한 티 팍팍 내내.”

금세 은성의 말에 동조하며 수군거리는 주변 손님들의 모습에 중년 여인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자기 스스로 무식함을 드러낸 꼴이나 다름없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한 수치심은 오히려 그녀의 화를 돋울 뿐이었다.

“소, 손님이 환불해달라면 환불해 줄 것이 무슨 잔말이 이리 많아!”
“손님도 손님다워야 손님인 것입니다. 세상은 당신 같은 분을 손님이라 하지 않습니다. 당신 같은 분은 ‘블랙컨슈머’라고 하죠. 고로...... 당장 제 가게에서 ‘꺼져’ 주시겠습니까?”

한 음절, 한 음절씩 끊으며 섬뜩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 은성. 서릿발 같은 살벌한 살기를 풀풀 풍기며 자신을 노려보는 은성의 시선. 마치 당장에라도 살해당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서늘한 시선이었건만, 자존심이라는 것이 대체 뭔지, 중년 여인은 마지막까지 남은 한낱 자존심으로 두려움을 억누르며 은성을 향해 소리쳤다.

“너,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당장 내 아들이 로펌 소속 변호사야. 지금 이거 명예훼손죄로 고소할 거야.”
“네, 하십시오.”

서슬 퍼런 여인의 일갈에도 불가하고 태연히 고개를 끄덕이는 은성. 소름끼치는 비소를 머금은 채로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은성은 의외의 대답에 얼이 빠진 중년 여인을 향해 조용히 핸드폰을 들어올렸다.

틱!

‘#$%#$##%#%$#%@!’

손가락 하나로 핸드폰 화면을 터치하자마자 핸드폰에선 여인의 목소리가 담긴 온갖 욕설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중간 중간에 채희의 목소리 역시 섞여있는 것으로 보아 조금 전 여인이 채희를 향해 욕설을 했던 상황이 틀림없었다. 핸드폰에 재생버튼을 누른 채, 연신 키득거리던 은성의 모습에 여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설마 어느 틈에 자신이 했던 욕설을 녹음까지 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왜요, 갑자기 고소하기 싫어졌습니까? 흠, 조금 아쉽군요. 고소장이 발부되자마자, 명예훼손죄, 영업방해죄, 폭행죄 등등으로 역고소 하려 했었는데요. 물론 증거, 증인 모두 충분합니다. 이 많은 분들이 보셨을 뿐더러 여기 음성녹음파일도 있고 CCTV역시 장식은 아니니 말이죠. 아, 아드님께서 로펌 변호사라 하셨습니까? 아마 나이대로 추정해보면 어소시에트 변호사이시겠군요. 참고로 저희 아버지께서 로펌 파트너 변호사를 역임하고 계십니다. 업계 내부에선 최고의 승소율을 자랑하시죠. 어소시에트 변호사와 파트터 변호사의 법정 공판이라... 저희 아버지께서 패소하실 거라고 생각되진 않습니다만...... 어떻게 더 하시겠습니까?”

조목조목 천천히 입술을 달싹이는 은성의 한 마디에 중년 여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다 못해 꺼멓게 죽어가기 시작했다. 법률지식이 부족한 자신과는 달리 너무나도 태연하게 증거와 증인들을 들이대며 논리적으로 추궁하는 은성의 말에 당황하고 만 것이다. 게다가 로펌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법무법인인 로펌에서 최고의 승소율을 자랑하는 사람이라면 가진 힘이 장난이 아닐 것임이 분명했다. 만약 자신 때문에 그런 사람과 아들을 법정에서 맞붙게 한다면 아들에게 어마어마한 불이익이 될 것이 분명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여인은 황급히 발걸음을 돌렸다.

“두, 두고 봐!”

도망치는 악당들이나 하는 말을 내뱉으며 쏜살같이 사라지는 여인의 모습에 은성은 싸늘한 비소를 머금어 보였다. 말했던 것처럼 굳이 고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실제로 그녀를 고소하기엔 시간도 많이 걸릴뿐더러 피해 보상금도 그다지 많이 뜯어내긴 힘들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대로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은 채, 넘어갈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채희야 CCTV 영상 편집해서 그대로 SNS에 올려버려.”

21세기 정보화시대를 살아가는 이상 SNS에 올린다면 한동안은 고개도 못 들고 다닐 것이 분명했다. 사람들이 바보도 아니고 추잡한 만행을 저지르고 도망친 그녀를 옹호해 줄 리는 없으니 아마 온갖 욕이란 욕은 다 먹으리라.

“네, 넷 사장님!”

평소의 소심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블랙컨슈머를 물리친 은성의 한 마디에 채희는 눈물까지 찔끔 흘리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대신 그녀를 막아준 은성이 너무나도 고마운 것이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씩하니 웃으며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준 은성은 가슴에 쿠키를 한 아름 챙겨든 채, 손님들에게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비록 자신들의 잘못으로 빚어진 소란은 아니었지만, 피해를 입은 손님들에겐 보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런 사소한 것만으로도 카페의 이미지가 훨씬 좋아지니 그로서는 충분히 이득이었다.

“쿠키도 다 나누어줬고...... 이제 좀 쉬어볼까?”

카페 내부에 있던 모든 손님들에게 쿠키를 나누어 주고서야 의자에 몸을 기댄 은성의 입에서 피로가 담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사건이 해결되고도 몇 분이나 지나서야 휴식을 갖는 그의 모습이 안쓰러웠던 것일까? 휴식을 취하고 있는 그에게로 미소를 머금은 시연이 다가갔다.

“수고 많았어. 현아.”

무슨 말일까? 분명 그의 이름은 ‘천은성’이었건만, 태연하게 ‘현’이라는 이를 부르는 시연. 그런 시연의 말에 은성, 아니 현은 조용히 입 꼬리를 끌어올릴 뿐이었다.

“용케 알아챘네.”
“그야 당연하지. 은성이 성격상 그렇게 태연하게 말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게다가 난 은성이의 주치의라고.”

자랑스럽다는 듯이 대답하면서도 시연은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 (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 쉽게 말해서 다중인격(多重人格) 장애, 은성이 앓고 있는 지병의 정체였다. 몸은 하나이지만, 각기 다른 4개의 인격을 가진 이가 바로 은성이었다. 물론 은성 역시 태어날 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분명 어릴 적 그녀의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던 은성은 평범한 사내아이였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 그의 인격은 무려 전혀 다른 성격의 4개의 인격으로 나누어지고 말았다.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인격 탓에 은성은 다른 이들과 쉽게 친해지지 못했다. 그마저도 이를 아는 시연이 버팀목이 되어주지 않았더라면 은성은 아마 자살을 택했을 지도 모른다.

‘그때였지 아마. 정신과 의사가 되겠다고 한 게.’

정신과 의사로서의 꿈을 정한 것이 바로 그 즈음이었다. 차마 가장 친한 친구이자 20년 지기인 은성의 고통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좋아하잖아? 천은성.”

태연하게 중얼거리는 현의 한 마디에 시연의 얼굴이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 사실 은성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녀 역시도 은성을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은성과는 달리 아주 오래 전부터 말이다. 대학교 시절 그가 다른 여자와 사귀었을 때, 얼마나 많은 술을 마셨던가. 다행히 오래 지나지 않아 그 여자와는 헤어졌지만, 덕분에 한동안 술을 달고 살았으니 말이다.

“그, 그런 건 좀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란 말이야.”
“뭐 어때? 어차피 기억 공유는 큰 틀만 가능하잖아. 이런 세부적인 내용까지는 공유되지 않아.”
“아무튼!”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이는 현의 말에 시연의 얼굴이 새빨갛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다른 인격이고, 다른 인격이 나타나 있을 때, 세부적인 일까지 기억을 하지 못한다고 하나, 좋아하는 이(?)에게 속마음을 들켰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그것도 은성이 가진 4개의 인격 중 유일한 두뇌파로, 엄청난 지적 능력과 냉철함과 치밀함, 그리고 사악함(?)까지 고루 갖춘 천현(天賢)에게 걸렸으니 그녀로서는 미칠 지경이었다.

“왜 하필 너한테 걸려가지고......”
“네 잘못이지. 그렇게 티가 나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지. 하긴 나 말고 다른 놈들은 전혀 눈치 못 채고 있는 것 같지만.”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젓는 현의 모습에 시연은 다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토록 티가 났다고 함에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는 말은 조금 실망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용건이 뭐야?”
“...뭐가?”
“계속 모르는 척 해라?”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는 현의 한 마디에 시연의 이마에 한 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으로 두 눈을 부라리는 현의 차가운 시선에 끝내 시연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후우, 하여간 눈치 하난 빠르다니까.”
“어쭙잖은 핑계나 대고 하루 동안 대놓고 감시하겠다는데 당연하지.”

확실히 은성처럼 헤벌레하는 것이 아닌, 무심하면서도 냉정한 눈빛으로 어깨를 으쓱이는 현의 대답에 시연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은성이한테도 말은 했지만, 거짓말은 아냐. 하루 동안 너희 몸에 일어나는 변화를 관찰하러 온 거니까 말이야.”
“하루 내의 우리 반응을 보겠다?”
“맞아.”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시연.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조그마한 미소를 띤 그녀의 모습에 현은 낮게 혀를 차고야 말았다.

“쳇, 기분은 더럽지만 어쩔 수야 없지.”
“환자는 의사 말을 잘 들어야지?”
“시끄러.”

그 말을 끝으로 현은 능글맞은 미소를 짓고 있는 시연에게서 등을 돌린 채, 다시금 바리스타 존으로 향했다. 그녀와 계속 잡담을 나누는 것보다는 일을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저, 저기......”

아니나 다를까, 그런 그에게로 낯선 여인이 다가갔다. 한껏 부끄러운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도 꽤나 예쁘장한 미모를 갖춘 낯선 여인의 등장에 당황할 법도 하건만, 현은 손바닥을 뒤집듯 너무나도 쉽게 표정을 뒤엎고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어보였다.

“네, 무슨 일이시죠?”

조금 전 시연과 말상대를 나눌 때와는 달리 너무나도 부드러운 미소였다. 여자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기에 부족함이 없는 상냥하고 따뜻한 미소에 여인은 더더욱 양 볼을 빨갛게 물들였다.

“그, 그, 그게......”
“무슨 말을 하시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차분하게 말씀하세요.”

다정다감한 그의 말에 용기를 얻은 것일까? 여인은 이내 결의에 가득 찬 표정으로 현을 향해 조그맣게 소리치려던 찰나......

“자기야, 나 모카 한 잔만 더.”

어느 틈에 그의 곁으로 다가간 것인지 눈썹은 분노로 파르르 떨고 있으면서도 입은 친근한 미소를 지은 채로 현의 팔을 끌어안은 시연. 겉으로 보기엔 마치 다정한 연인 사이와도 같은 그들의 모습에 여인은 끝내 금방이라도 펑하고 터질 듯이 빨갛게 물들인 채로 황급히 그들에게서 도망쳤다.

“죄, 죄송합니다!”
“아......”

라는 한 마디만을 남긴 채로 말이다. 이윽고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그녀의 모습에 현은 나직한 탄성이 새어나왔다. 자신에게 호감이 있던 여인이 도망쳐버렸다는 사실 때문인지 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짜증으로 일그러진 표정으로 시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하는 짓이야!”
“몰라서 물어?”
“하......”

눈을 가늘게 뜨고서 자신을 노려보는 시연의 물음에 현의 입에서는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시연이 말하는 그 ‘이유’야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긴 했지만, 하마터면 고백을 받을 수도 있었던 황금과도 같은 기회를 이렇게 잃었다는 것이 너무나도 아까웠던 것이다.

“좋아하는 은성이 녀석의 몸으로 다른 여자한테 작업 걸지 마라 이거야?”
“......”

묵묵히 대답 대신 눈빛을 흘기는 시연이었지만, 그것으로 대답은 이미 충분했다. 결국 그녀가 붙어 있는 동안에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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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9-01 10:20 | 조회 : 968 목록
작가의 말
류운

아 개강이네요...... 일어나니 9시 반이라 첫수업을 날렸습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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