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1장 다중인격(多重人格) - (2)

“준비는 이쯤이면 됐고.”

능숙하게 간단히 주변정리를 끝내고 은성은 머신이 자리하고 있는 바리스타 존으로 들어섰다. 하반신을 가리는 검은색의 앞치마까지 두른 채, 완연한 바리스타의 모습을 보이는 은성의 모습에 시연은 연신 히죽거리며 그가 자리하고 있던 머신의 건너편으로 다가섰다.

“한잔 부탁해도 되지?”

기대감이 잔뜩 어린 눈빛으로 싱글거리는 시연. 그런 시연의 모습에 은성 역시 피식 실소를 터뜨리고야 말았다. 하긴 커피라면 사족을 못 쓰는 그녀이니 저렇게 들뜬 모습으로 기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이렇게 얻어먹는 것이 처음도 아니고 말이다. 입가에 조그만 미소를 그리며 은성은 그녀와 눈을 맞추고 천천히 운을 떼었다.

“오늘은 어떤 걸로 드릴까요, 손님?”
“음, 오늘의 추천 메뉴는 뭐죠?”
“오늘의 추천 메뉴는 부드러운 카푸치노와 달콤한 초콜릿 시폰 케이크입니다, 손님.”

입가에 미소 만연한 채로 능글맞게 웃음 지으며 장난을 치는 은성의 말에 시연 역시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담담히 그의 받으며 환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럼 그렇게 부탁해도 될까요?”
“네에,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상냥한 눈웃음을 짓는 시연의 말에 은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곧바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리스타 2급 자격증까지 가지고 있는 은성이기에 그의 손놀림은 능수능란하기 그지없었다. 순식간에 완성된 향긋한 시나몬 향기가 물씬 풍기는 카푸치노와 촉촉하게 반짝이는 초콜릿 시폰 케이크, 보기만 해도 미각을 자극하는 달콤한 비주얼에 시연의 입 꼬리가 절로 치켜 올라가기 시작했다.

“자, 주문하신 카푸치노와 초콜릿 시폰 케이크 나왔습니다, 손님.”
“역시 좋다니까. 정말 고마워.”

아이처럼 해맑은 미소와 함께 조심스럽게 카푸치노와 케이크가 놓여있는 쟁반을 받아드는 시연의 모습에 은성은 피식 미소를 머금어 보였다. 저런 사소한 것에도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이 귀여운 것이다.

“후우, 역시 네가 만든 게 제일 맛있다니까.”
“별 거 아니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행복에 젖은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이는 시연의 말에 은성의 양 볼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힘겹게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고 카페를 차린 것에 가장 큰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 바로 그녀로부터 이런 말들을 들을 때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달달한 분위기도 그다지 오래 가지 못했다.

짤랑!

'Closed'라고 되어 있던 카페 문이 열리며 낯익은 이가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역시...... 아직도 오픈 안하시고 뭐하고 계시는 거예요, 사장님.”

160cm를 간신히 넘는 듯한 아담하면서도 볼륨 있는 체구, 머리 끝부분이 웨이브진 밝은 갈색의 단발머리에 반달모양으로 휘어진 커다란 눈, 통통한 젖살과 선홍빛으로 반짝이는 부드러운 입술과 움푹 패여 있는 보조개까지. 전체적으로 귀여운 인상의 미인이었다. 하지만 짐짓 조금 화난 표정으로 운을 떼는 여인의 모습에 은성은 못내 아쉬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곧 열려고 했어 채희야.”

바로 은성이 사장으로 있는 카페 ‘클라리스’의 첫 직원이자, 유일한 매니저인 ‘한채희’였다.

“하여간, 사장님도 배가 불렀다니까요. 오픈 시간 늦어지면, 매출도 줄어요.”
“이 정도는 괜찮다니까......”

일반적인 직원과 사장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에 채희는 오늘도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누가 사장인지, 이젠 다 헷갈릴 지경이다. 하긴 은성의 반응이 여느 사장들에 비해 비정상적이긴 했으니 말이다. 투덜거리며 입술을 삐쭉 앞으로 내민 은성의 모습에 또 다시 채희의 입에서 잔소리가 속사포처럼 터져 나오려던 찰나, 다행히도 은성에게로 구조선이 띄워졌다.

“채희 씨 안녕하세요?”
“어머, 시연 언니! 좋은 아침이에요.”

손을 번쩍 들어 흔드는 시연의 모습에 채희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며 그녀에게로 시선이 옮겨진 것이다. 은성의 상태를 확인할 겸, 커피를 마시러 자주 오는 시연은 매니저인 채희와 친해질 대로 친한 사이였다. 자신에게 인사를 건넬 때와는 달리 한껏 들뜬 모습으로 친근하게 조잘거리는 채희의 모습에 은성은 복잡 미묘한 한숨을 내쉬었다. 잔소리를 듣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뭔가 찝찝한 기분이 뒤섞였던 것이다.

“참, 저 일단 옷부터 갈아입고 올게요. 사장님도 저 갈아입을 동안 오픈하고 있으세요.”
“......그래그래.”

결국 단호한 그녀의 말에 카페의 문을 여는 은성이었다. 오늘도 카페 클라리스의 오픈은 너무나도 평화로웠다.

******************

“후아, 오늘도 역시 빡세네.”

물밀듯이 사람들이 밀려드는 점심시간. 하루 중 가장 힘든 시간대인 점심시간의 밀려들던 손님들이 점차 줄어들고 카운터의 대기라인이 완전히 사라지자 은성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매일 같이 있는 일이긴 했지만,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머신의 앞에서 잠시 쪼그려 앉아 쉬고 있는 은성과는 달리 채희는 쌩쌩한 모습으로 커피 한 잔을 홀짝이고 있을 뿐이었다.

“고생하셨어요. 뭐라도 해드릴까요?”
“아아, 카페모카로 좀 부탁해.”
“네이네이.”

은성의 부탁에 찻잔을 홀짝이던 채희의 입에서 귀찮은 듯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녀의 무심한 듯한 말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손은 엄청난 속도로 움직일 뿐이었다. 과연 한 카페의 매니저는 달라도 좀 달랐다.

“자요, 여기 카페모카.”
“아, 땡큐.”

순식간에 카페모카 한 잔을 만들어 자신에게로 내미는 커피를 받으며 은성은 살포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식도를 타고 몸속으로 흘러들어가는 따뜻한 카페모카 한 모금, 이윽고 온몸 구석구석 퍼져나가는 기분 좋은 포근한 온기에 은성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하, 좋다.”
“당연하죠, 누가 만든 건데요.”

은성의 칭찬에 어깨를 으쓱이는 채희.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채희의 모습에 은성은 자기도 모르게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그렇게 막간의 휴식을 즐기고 있는 두 사람이었지만, 이윽고 카운터 쪽으로 다가오는 낯선 여인에 의해 둘의 휴식시간은 금세 끝나고 말았다.

“야, 여기 뭐가 맛있냐?”
“네?”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큰 목소리로 반말을 내뱉는 40대 중반의 여인. 주름살 가득한 뚱뚱한 체형의 여인의 반말에 채희는 자신도 모르게 반문을 던지고 말았다. 황당함에 반문을 던진 그녀의 모습에 중년 여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금 입을 달싹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여기 뭐가 제일 맛있냐고. 말 못 알아먹어?”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막말이었지만, 능숙한 카페 매니저답게 채희는 속으로 분을 삭이며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였다.

“오늘의 추천 메뉴는 부드러운 카푸치노와 달콤한 초콜릿 시폰 케이크입니다.”
“그래? 그럼 그걸로 줘봐.”
“네, 카푸치노 3,500원 초콜릿 시폰 케이크 4,000원 총 7,500원입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가격을 말하는 채희, 하지만 그런 그녀의 대답에 중년 여성은 눈살을 찌푸리며 핸드백에서 지갑을 꺼내들었다.

“아우, 더럽게 비싸네. 자.”

투투둑

카운터 위로 떨어지는 몇 장의 지폐와 동전. 힘없이 나뒹구는 돈을 주우며 채희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참을 인을 외쳐대었다.

‘참자, 참자, 참자......’

“드, 드시고 가실 건가요?”
“당연한 걸 왜 물어보는 거야? 빨리 내놓기나 해.”
“네, 네에. 준비 다 되면 진동벨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정말 애써 침착하게 진동벨을 건네는 채희에게서 뺏다시피 하며 중년 여인은 이내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우, 대체 뭐 저런 사람이......”

애써 태연한 척 했지만. 중년 여성을 상대하는 것이 상당히 고역이었는지 채희의 인상이 무참히 구겨지며, 눈물이 찔끔 새어나왔다. 모든 손님이 점원에게 친절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으면서도 저런 무례한 사람에게까지 차를 대접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서러운 것이다.

“커피만 마시고 금방 나가겠지. 조금만 힘내자 채희야......”

사장으로서 보고 있는 것도 짜증이 치미는 중년 여인의 만행에 은성 역시 애써 짜증을 억누르며 입술을 달싹였다. 사장인 그로서는 힘들게 진상 손님인 그녀를 상대하던 채희가 다 안쓰러울 수밖에 없던 것이다. 억지로 화를 참고 있다는 것이 다 느껴질 정도로 파르르 떨리며 운을 떼는 은성의 모습에 채희 역시 기운 빠진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장님......”

짜증이 치솟긴 하지만, 손님이기에 화낼 수도 없는 입장에 탄식하면서도 채희는 한숨과 함께 한층 기운 빠진 모습으로 머신의 앞으로 다가갔다.

위이잉!

그녀의 기분과는 달리 커피 머신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담담히 샷을 따라낼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은성이 시연에게 해줬던 것처럼 향긋한 카푸치노와 달콤한 초콜릿 시폰 케이크가 쟁반 위로 올려졌다.

“후우...”

조금 긴장되었던 것일까? 내심 불안한 기색을 보이며 채희는 어렵사리 진동벨의 호출버튼을 눌렀다. 손님만 아니라면 당장에라도 쫓아내고 싶은 그녀를 말이다.

“다 됐어?”

진동벨을 던지다시피 하며 뒤뚱뒤뚱 카운터로 다가오는 중년 여인, 그런 그녀의 행동을 간신히 웃음으로 답하며 채희는 천천히 운을 떼었다.

“주문하신 음료와 케이크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공손히 쟁반을 앞으로 내미는 채희, 그런 그녀를 한번 힐끔거리고 중년 여인은 쟁반을 든 채로 어딘가로 사라졌다. 이윽고 시야에서 사라진 그녀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은성과 채희였지만, 그들의 안도감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불과 5분 채 지나지 않아, 씩씩거리는 모습으로 그녀가 다시 카운터로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이미 반쯤 먹고 마신 음식들을 가지고서 말이다.

“이거 당장 환불해줘!”
“무, 무슨 일이세요?”

아무리 진상 덩어리인 민폐 손님이었다고는 하나 설마 다짜고짜 역정까지 낼 줄은 몰랐기에 채희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긴 이미 반쯤, 아니 반 이상 먹어 놓은 음식을 환불해 달라는 것부터 일반 상식을 벗어난 일이었다.

“커피는 너무 쓰고 케이크는 너무 달잖아!”

그마저도 제대로 된 이유가 아닌 맛을 물고 늘어지니 채희의 입장에선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소, 손님 죄송하지만, 음식의 맛이 입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는 환불이 안 되세요.”

어처구니없는 그녀의 말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럽게 불가의 뜻을 전하는 채희였지만, 그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여인이 아니었다.

“야, 너 미쳤어?”
“......네?”

예상치 못한 거침없는 여인의 폭언에 채희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떠졌다. 아무리 진상에 민폐 덩어리 손님이라고는 하나 대놓고 욕을 들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손님이 환불해달라면 당장 환불해줄 것이지. 안되고 말고가 어디 있어?”
“이, 입에 맞지 않으신다면 시럽을 더 넣어드리거나 할 수는 있지만 환불은 불가능하세요.”
“아 됐고, 빨리 환불해주라고!”

큰소리로 고함까지 치며 역정을 내는 여인의 만행에 카페 내부에 있던 손님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집중되었다. 막무가내로 환불을 요구하며 거침없이 욕설을 내뱉는 여인의 만행에 끝내 애써 냉정을 유지하던 채희 역시 인내심이 바닥나고 말았다. 한 카페의 매니저이기 이전에 그녀 역시도 감정을 느끼는 한명의 사람이었다.

“말씀이 조금 지나치시네요.”

하지만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낸 그 한 마디의 여파까지, 그녀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뭐야? 나이도 어린년이 진짜!”

분노로 완전히 일그러진 중년 여인의 손이 머리 위로 치켜 올라가고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던 자신을 향해 휘둘러지는 것이다. 이윽고 닥칠 충격에 채희는 그만 고개를 돌리고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꽉!

그런데 무슨 일일까? 아무리 기다려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 고통에 채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엔, 평소의 소심하고 조용한 모습과는 달리 중년 여인의 손목을 낚아챈 채,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는 차가운 분위기의 은성의 모습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지금 저희 매니저에게 뭐하는 짓입니까?”

0
이번 화 신고 2015-08-31 17:27 | 조회 : 1,003 목록
작가의 말
류운

본문 속 진상 손님은 제 경험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인물입니다. 제발 카페에서 이런 진상은 좀 참아주세요 ㅠㅠ

후원할캐시
12시간 내 캐시 : 5,135
이미지 첨부

비밀메시지 : 작가님만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익명후원 : 독자와 작가에게 아이디를 노출 하지 않습니다.

※후원수수료는 현재 0%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