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1장 다중인격(多重人格) - (1)

빠바 빠빠빠 빠빠라바빠빠~

아침을 일깨우는 군대의 기상나팔소리, 남자라면 절로 이가 갈리는 최악의 기상 소리에 사내 역시 눈살을 찌푸리며 침대 위에서 고통스럽게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온 방안 가득히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기상나팔소리를 이겨낼 수는 없었다.

“......아우, 좀!”

신경질적으로 팔을 내뻗어 사내는 핸드폰 화면 위로 떠오른 알람을 중지시켰다. 덕분에 방안은 한층 조용해졌지만, 잠은 진즉에 달아나버린 뒤였다. 결국 사내는 오늘도 기상나팔소리 따위에 패해 깊은 한숨을 내쉬고야 말았다.

“하아, 알람을 바꾸던가 해야지.”

매 아침마다 드는 결심이지만, 알람은 바뀌지 않았다. 들을 때마다 짜증이 치솟긴 하지만, 저것보다 효과가 좋은 알람은 찾기 어려웠던 것이다.

“하암, 피곤해.”

전날의 사건 덕분인지 피곤한 표정으로 크게 하품을 하면서도 사내는 욕실로 향했다. 더 지체했다간 지각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슬슬 채비해야겠네.”

피곤한 기색으로 몸을 일으키며 사내는 서랍에서 수건 한 장을 꺼내들고는 터덜터덜 욕실로 들어갔다.

솨아아!

이윽고 닫혀있는 욕실 문 너머로 바닥을 때리는 물소리가 방안 가득히 울려 퍼졌다. 물소리만이 조용히 퍼져 나가는 방안,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방안은 다시금 정적에 젖어들었다.

끼익

조심스럽게 열리는 문틈으로 반라 차림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인지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 아래로 드문드문 아직 물방울 흘러내리는 잔근육이 가득한 우윳빛의 상반신을 드러낸 채로 추레한 반바지만을 걸치고 있는 상태였다. 여자들이라면 입가에 침을 질질 흘리며 환호성을 터뜨리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훌륭한 몸이었건만, 정작 본인은 그다지 감흥이 없는 것인지 수건으로 머리에 묻은 물기를 털어낼 뿐이었다.

띵동!

때마침 나직하게 방안으로 퍼지는 초인종소리. 이른 아침부터 울리는 뜬금없는 초인종 소리에 사내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현관을 향해 다가갔다.

“이 시간에 누구지?”

띵동!

“네네.”

또 다시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사내는 수건을 목에 걸고 현관 도어락의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띠리링!

짤막한 기계음과 함께 잠금장치가 해제되며 굳건히 닫혀있던 현관문이 슬그머니 열리기 시작했다.

“누구......”

조심스럽게 운을 떼던 사내의 동공에 현관문 너머에 있던 인영의 모습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내가 말을 다 이을 틈도 없이 묵묵히 그를 기다리고 있던 인영은 싱긋 웃음 지으며 입술을 달싹이며 그의 말꼬리를 끊었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모양이네. 잘 잤어?”

현관문 너머에 있던 이는 바로 한 명의 여인이었다. 그것도 상당한 미인. 검은 폭포수와도 같은 살짝 웨이브진 긴 머리칼, 인형과도 같은 커다란 눈망울에, 오똑한 콧날, 갸름한 턱선, 눈처럼 뽀얀 피부와 풍만한 몸매까지. 연예인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미모의 여성의 등장에 사내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아... 일부러 깨우러 와준 거야? 정말 고마워.”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하더라도 기상나팔소리에 짜증을 부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내는 여인을 향해 환한 미소로 답했다. 그녀의 이름은 민시연. 대형종합병원의 잘나가는 정신과 의사이자, 서로 친한 부모님들 덕분에 자연스레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동갑내기 소꿉친구였다. 소꿉친구라면 충분히 질릴 법도 한데 왜 그렇게 그녀를 반기느냐? 그야 답은 뻔했다. 바로 사내는 그녀를 짝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지? 내가 얘를 좋아하게 된 게.’

환하게 웃는 얼굴로 자신을 맞아주는 시연을 바라보며 사내는 오래전의 추억들을 떠올렸다. 정확히 20년 전, 그러니까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8살 무렵에 그들은 서로의 부모님들을 통해 만나 고등학교까지 쭈욱 베프로서 지내왔었다. 그리고 대학교 시절 무렵 첫 연애와 첫 이별 후에 술을 마실 때 같이 마셔주며 위로해주던 그녀에게 반하고 그 짝사랑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이 본다면 ‘에라 병신아 그냥 고백해라.’라고 소리칠 것이 분명했지만, 사내에겐 쉽게 고백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의 체질 때문이었다. 사내는 남들에겐 없는, 장애라고도 볼 수 있는 특이한 체질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원체 성격이 좋기도 하고, 어렸을 때부터 같이 지내왔기에 사내의 체질을 가족처럼 잘 이해해주는 그녀였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내는 오히려 더더욱 고백할 수가 없었다. 행여나 그녀에게 상처를 입힐까, 그녀와 영영 이별하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상냥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이상하게 모든 남자들의 고백을 차버리고 단 한 번도 남자친구를 사귀지 않은 난공불락의 요새와도 같은 그녀에게 말이다.

“저기...... 은성아?”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것일까? 조심스럽게 눈을 마주치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시연의 모습에 사내, 천은성(天隱星)은 머릿속을 지배하던 상념들을 털어내고 입가에 미소 만연한 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왜 그래.”
“옷...... 좀 입어.”

양 볼을 발그레하게 물들인 채, 간신히 입술을 달싹이는 시연. 그런 시연의 말에 은성은 그제야 떠올릴 수 있었다. 자신이 반라의 차림으로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 우왁!”

쾅!

기괴한 비명소리와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마지막으로 반쯤 열려있던 현관문이 쾅하고 닫히고야 말았다. 시트콤의 한 장면과도 같은 그 모습에 시연의 입가엔 어느새 여느 때와 같은 화사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

“그런 건 좀 빨리 말해주란 말이야.”
“왜 몸도 좋으면서. 덕분에 눈요기도 했고 말이야.”

아이돌을 보고 흡족해 하는 여느 아줌마들처럼 능글맞은 미소를 지은 채로 싱글거리는 시연의 말에 은성의 입에선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정식으로 사귀는 것도 아닌 '내꺼 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사이, 속된 말로 몇 년 동안 썸 타는 상태에서 반라의 모습을 보였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그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인지 은성의 모습은 아까와는 전혀 다른 말끔한 차림이었다. 깔끔한 흰색 셔츠에 검은색 넥타이와 약간 스키니한 일자 블랙진과 검은색의 구두, 그리고 소매 부분을 살짝 접어주고 시계와 팔찌까지 하고나니 여자들이 좋아하는 훈훈한 매력이 물씬 풍겨나고 있었다.
시연도 만만치 않았다. 허벅지를 살짝 덮는 베이지색 롱 가디건에 회색 스트라이프 티와 허벅지를 살짝 덮는 숏팬츠, 스포티한 흰색 운동화까지. 편안하면서도 캐주얼한 매력을 뿜어내는 그녀의 모습에 지나가던 몇몇 남자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녀에게로 옮겨졌다. 그녀를 훔쳐보는 그러한 시선들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인지 은성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너무 예뻐도 문제라니까.’

자연스레 모여드는 시선들에 은성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의 시선을 빼앗았다.

“그런데 지금 가면 늦은 거 아니야?”
“나? 휴가 냈어. 그래봤자 오늘 하루뿐이지만 말이야 흑.”

우는 시늉까지 해가며 투덜거리는 시연의 모습에 자연스레 은성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에? 그럼 왜 출근하는 거야. 휴가라며.”
“하루 동안 놀러가기도 그래서 하루 동안 우리 ‘환자’님 상태 좀 보려고요 힛.”

아이 같은 순수한 미소로 싱긋 웃음 짓는 시연의 모습에 은성의 입 꼬리가 자연스레 치켜 올라갔다. 귀엽게 눈웃음 짓는 모습이 너무 예쁘기도 했지만, 그녀의 말에 더 없이 기뻤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지칭하는 ‘환자’님이란 바로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오오, 그거 진짜지? 좋아 그럼 나도 오늘 하루는 쉬어볼......”
“안 돼.”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젓는 시연, 그런 시연의 모습에 은성의 얼굴엔 금세 수심이 가득해졌다.

“왜? 간만에 둘이 놀러......”
“말했잖아 네 상태 좀 보러 온 거라고. 만약에 일 빼려고 하면 나 그냥 휴가 반납해버릴 거야.”

말 꼬리를 자르며 못을 박아버리는 시연의 말에 끝내 은성은 다시금 한숨을 내쉬고야 말았다. 한다면 한다는 그녀의 성격상 만약 일을 쉬려고 하면 정말로 병원으로 갈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그럼 하루 종일 가게에 있을 거야? 심심할 텐데.”
“괜찮아, 너 보면서 정리할 것도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알지?”

싱그러운 윙크를 날리는 시연의 모습에 은성의 볼이 조그맣게 달아올랐다. 항상 마주하는 그녀의 애교였지만, 한결 같은 해바라기마냥 그녀를 바라보는 그로서는 언제나 마주하면서도 쉽사리 적응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서야 은성은 황급히 고개를 젓고 아무렇지 않은 척 발걸음을 재촉했다. 덕분에 그는 눈치 채지 못했지만, 마치 부끄러워하는 어린 애 같은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시연의 입가에는 조그마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는 말없이 몇 분을 걸었을까? 두 사람은 드디어 목표했던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 그곳은 바로 서울 도심의 한복판, 그것도 싱그러운 신학기에 풋풋한 신입생들과 한껏 들뜬 재학생들이 북적거리는 대학로의 개인 카페 앞이었다.

“빨리 열어줘. 손님이 기다리잖아.”
“그래그래 알았어.”

장난스럽게 재촉하는 시연의 한 마디에 은성은 못 이기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능숙하게 잠금장치를 해제하고 가게의 셔터를 들어올렸다.

드르륵!

철그럭거리는 쇳소리와 함께 셔터가 올라가고 몇 번의 기계음과 함께 닫혀있던 굳게 닫혀있던 카페의 문이 열렸다. 불이 꺼지고 커튼이 쳐져 있는 탓에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내부는 조금 어두웠다.

“어디 보자 이 근처에 불이......”

매번 하는 행동임에도 찾기 어려운 것인지 한참을 헤매고서야 은성은 카페의 불을 켤 수 있었다. 금세 환하게 불이 켜진 카페는 편안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여자들로 하여금 지갑의 돈을 꺼내 기꺼이 차 한 잔을 주문하게 만드는 분위기랄까? 온화하면서도 고고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대학로의 카페 ‘클라리스’. 은성은 바로 이곳 ‘클라리스’의 사장이었다. 비록 부모님의 원조를 받긴 했지만, 대학교 시절부터 학군사관으로 임관, 전역 할 때까지 꼬박꼬박 모아두었던 돈을 모두 투자하여 지은 카페이니 그 의미가 사뭇 남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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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8-31 10:24 | 조회 : 1,029 목록
작가의 말
류운

아직 여분이 있어서 당분간은 오전 오후를 기점으로 1편씩 올리겠습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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