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3)


<11> # part 3



ㅡ여주인공 시점(설혜)














“ ....아. ”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려던 손을 급히 바꿔 얼굴을 가렸다.


굳이 고개를 돌려 보지 않아도 누가 한 말인지 정도는 알 수 있다.


저 목소리는... 분명히.....







“ ..선생님. ”



“ 응? 왜 그래요? ”



“ 혹시 걸칠만한 옷을 갖고 계신지.. ”



“ 아아... 네. ”







내 말에 의료진 선생님이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검은색 후드집업을 하나 건네준다.


나는 선생님에게서 후드집업을 건네받자마자 신경질적으로 그것을 입은 뒤 거칠게 지퍼까지 모두 채웠고, 이윽고 온기가 몸에 돌기 시작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 나는 관중석의 어딘가를 향해 오만상을 찌푸리기에 이르렀다.


저건 도대체가 낯짝이 어떻게 되 먹은거야? 왜 그 창피함은 내가 겪어야 할 몫이냐고...


나는 경기만 마치면 바로 주둥이를 작살내리라 중얼거리면서 링 바로 옆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링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재윤이 나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가벼운 반팔 티에 긴 트레이닝 바지 차림이었는데,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그는 아까의 그 사자후를 본의 아니게 똑똑히 들은 모양이다.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넌지시 말했다.







“ 저기, 아까 그.. 소리친 사람 있잖아. 혹시 너 아는 사람.... ”



“ 아니. ”








내가 정색을 하며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부정을 하자, 그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더니 슬며시 손을 올려 내 어깨를 두드린다.







“ ..잘 참고 있어. 경기 금방 끝낼게. ”



“ 됐으니까 꼴사납게 처 맞지나 마. ”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무뚝뚝하게 대꾸한다.

그가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하는 건지는 잘 알았다.


스포츠브라..라. 나 또한 이런 걸 다시 입을 날이 올 줄은 정말 예상치 못했다.

애초에 내가 사전에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었지만, 다들 미리 짜기라도 한 듯 입을 꾹 닫고 말해주질 않았으니 의심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그나마 바지는 복숭아뼈 윗부분까지 내려온다지만, 어쨌든 남들 앞에서 신체의 일부를 훤히 드러내는 복장을 하고 있게 되었으니 기분이 언짢아 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경기 규정이 이러하다는데 뭘 어쩌겠는가. 그럼 옷 하나 때문에 경기를 포기해야하나?


남들이 내 신체를 보는 것 정도야 상관없다. 어차피 남들과 다를 게 없는 몸뚱아리고, 본다고 해서 닳아지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서 별 신경도 안 쓰고 경기장으로 올라왔는데.. 저 망할 놈이 아주 판을 벌려 놨다.


나는 또 다시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지압하며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다. 단순한 두통이라기엔, 너무나 많은 것이 밀려들어오는 느낌이다.



양 팀의 선수들이 모두 경기장 안에 들어서고 우리는 한 옆에 마련되어있는 의자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조명이 켜지고 함성소리가 커지자, 심판이 등장하여 선수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제법 간단한 소개를 끝낸 심판은 이윽고 선수들을 링 위로 부른다.


모두가 자리에 일어서서 링 위로 향한다. 단 한 사람, 의자에 앉아 움직일 생각을 않고 링을 노려보기만 하는 나를 제외하고 말이다.


심판이 내게 이리로 와서 양 팀 간 인사를 나누라고 다시금 지시하지만, 나는 거부한다는 듯 팔짱을 끼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심판은 난감한 듯 주변 눈치를 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다른 선수들만 적당히 인사를 시키기에 이르렀다.

아무래도 내가 지금껏 출전했던 경기를 모니터 해본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한 번이라도 오늘 경기에 출전할 선수들에 대하여 조사해 본적이 있다면 당연히 알 수 있는 사실일 텐데.

내가 경기 전 상대와 인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상대편 측 총감독이 내 태도에 대한 불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심판에게 항의했지만, 우리 측 총감독이 상황을 대충 설명하자 그는 못마땅한 얼굴로 슬며시 물러났다.


나는 그를 말없이 빤히 바라보다가, 첫 주자인 의준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이 내 곁으로 다가오자 이내 고개를 돌렸다. 전학생이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







“ 후아, 사람 진짜 많네. 멀미라도 할까봐 겁난다, ”



“ 그러게. 오늘 따라 사람들이 구역질나게 많이 왔는걸. ”







재윤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대꾸한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다가 벌떡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그의 턱을 잡고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내가 말했다.







“ 진짜 구역질하고 싶나보네. 너 지금 경기하다 중간에 토할 것 같은 얼굴이야. ”



“ 너 설마... 카메라 울렁증이라도 있는 건 아니지? ”







주스가 불안한 듯이 물었다.

하지만 이재윤은 그런 거 없다면서 고개를 저을 뿐이었고, 시선을 교환하던 우리는 그를 끌고 곧장 의료진 선생님에게 향했다.

아직 경기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파김치가 되어온 재윤을 본 의료진 선생님은 약간 황당해 하는 얼굴이었다. 선생님이 말했다.







“ 뭐야, 그새 골목에서 패싸움이라도 한 거야? ”



“ 아직도 싸우고 있는 중일걸요. 위에서 요동치는 음식물들이랑. ”







전학생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선생님은 구급상자에서 몇 가지를 주섬주섬 챙기더니 재윤에게로 다가갔다.

진찰을 받는 동안 재윤은 정말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있었고, 애써 태연하게 선생님이 건네주는 약과 물을 받아먹었다. 우리는 그를 불안한 듯이 바라보았다.


의료진 선생님이 이윽고 재윤에게서 떨어지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 아무래도 순서를 교체해야 할 것 같아. ”



“ 네? 무슨.. ”



“ 지금 재윤이가 먹은 약에는 수면제 성분도 포함 되어 있거든. 대충 30분에서 40분 정도 지나면 약효가 돌 거야. ”







어느새 목소리가 진지해진 선생님은 자신의 손목시계를 가리켰다.


그러자 모두의 안색이 파리해진다.







“ 그건 너무 애매하잖아요. 이재윤이 네 번째인데! ”



“ 그래서 하는 말이야. 재윤이의 순서를 좀 앞당기는 게 좋겠어. ”



“ 그렇다면 저기 있는 안의준과 차례를 바꾸는 게 낫지 않나요? 30분 뒤에는 아예 경기를 못하게 될 텐데, 차라리...! ”







주스의 표정이 다급해지고, 선생님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곧이어 나를 돌아보았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의료진 선생님이 물었다.







“ 설혜 양. 의준이는 복싱을 잘하는 편인가요? ”







그나저나 이 양반은 왜 나한테만 존댓말이지..?

선생님의 뜬금없는 말투에 조금 의아해하던 것도 잠시, 나는 고개를 저었다.







“ 아뇨. 복싱을 좋아하긴 하나, 그리 잘 하지는 못합니다. 다만 이중격투기에 제법 능하여 참여시켰습니다. ”



“ 그렇다면, 머릿수를 채우는 카드나 마찬가지네요? ”



“ 뭐.. 대충 그렇습니다. ”



“ 그렇다면야 금방 끝나겠군요. ”



“ 네. 전학생과 바꾸어도 지장 없습니다. ”



“ 어엉? 나? ”







전학생이 미간을 찌푸리며 자기 자신을 가리키자,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끄덕인다.


재윤이 아무리 잠결이라고 해도 호락호락하진 않을 테니... 오히려 이 선택이 나을 수도 있었다.

재윤의 선에서 끝내면, 어쩌면 전학생의 차례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또한 내 차례까지도.

정말 운이 좋다면 말이다.


나는 재윤의 등을 탁치며 말했다.







“ 그럼 변경된 순서는 이렇다. 의준, 주스, 재윤, 전학생, 나. 멍 때리다가 순서 놓치면 죽어. ”



“ 설혜야. 그냥 나랑 바꾸는 게 낫지 않겠어? ”



“ 너도 버리는 카드야. ”







내가 무심하게 딱 잘라 말하자 주스는 입을 다물고 상처받은 얼굴로 재윤을 바라보았다.

재윤은 웃음을 애써 억누르며 킥킥대기 시작했고, 전학생도 그의 옆에서 조용히 미소 짓더니 갑자기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잠시 딴 생각에 빠져 있다가, 갑작스레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이미 다른 이들은 링 근처로 가버린 지 오래다.







“ 뭐. ”







내가 묻자, 그가 천천히 다가와 크다 못해 거대한 키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느릿하게 입을 뗀다.







“ 내 이름은 전학생이 아니야. ”



“ 그래서? ”



“ ..내 이름으로 불러. ”







나는 그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사실 나는 다른 분야에서의 기억력은 굉장히 좋은 편에 속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에 대한, 특히 사람의 이름에 대한 것에는 생각보다 쉽게 한계를 경험하곤 했다. 한 마디로, 나는 사람의 이름을 지독히도 못 외운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서 가장 쉽게 연상되는 단어로 이름을 대신하는 것이 나의 습관이었다.

1년이나 2년 쯤 함께 지내다보면 외워지는 경우도 가끔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그보다 훨씬 더 많았다.


그래서일까. 나는 누군가가 내게 이름을 알려주든 말든 별 큰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길어봤자 몇 시간이면 기억에서 완전히 삭제되어 버리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들이 이름을 알려주며 그렇게 불러 달라 부탁한들 내가 뭘 어찌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에게 망설임 없이 거절의 뜻을 전하기 위해 입을 벌렸다.

그런데, 순간 기억의 저편에서 몇 개의 글자들이 두루뭉술하게 움직이는 것을 느낀다. 나는 흠칫한다.


설마 이미... 알려줬었나? 이미 내게 이름을 소개한 적이 있었던 건가?


내가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며 생각에 잠기자, 이번엔 그가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일단 물어는 봐야겠지...







“ 뭔데, 이름. ”







내 말에 그가 어이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한참을 쳐다봐도 내가 별다른 말이 없자, 그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표정을 풀고 나지막이 말했다.







“ 강유현. ”



“ 뭐? ”







강유현..?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지, 이 느낌은..? 왠지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인데.

어디서 들었기에 이렇게... 기분 나쁜 기시감이 느껴지는 거지?


단순한 통성명 따위의 상황에서가 아니야. 이건 절대...











‘ 언니도 잘 자. ’











그런 느낌이 아니야.







“ 너... 혹시 형제 있냐? ”







내가 그에게서 약간 떨어지며 물었다. 그가 고개를 기웃한다.







“ 동생 있어. 여동생. 그건 왜? ”



“ 그 애, 혹시 이름이.... ”







그 때, 갑자기 구름 같은 함성 소리와 야유 소리가 사방에서 뿜어져 나와 나의 말허리를 뚝 끊어버린다.

나와 그가 움찔하며 시선을 교환했고, 그 다음 순간 우리는 말없이 다급히 경기장 쪽으로 달려 나간다.


확실히 기억나는 것도 아니니... 아직 성급히 물어볼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속으로 아우성치는 묘한 기시감을 잠재우며 링에 도착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나와 전학생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가워진다.

전학생이 조그맣게 욕을 중얼거리기 시작했고, 어느새 나타난 커다란 손이 내 시야를 불쑥 가린다. 주스의 손이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 지금 당장 허락해줘. ”



“ ..... ”



“ 설혜야. ”



“ ...내 의자 위에 있어. ”



“ ....응. ”







주스의 손이 스르륵 내려간다. 그는 발걸음을 옮겨서 내 의자 위에 걸쳐져 있는 흰색 수건을 집어 들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잠시 그를 마주 쳐다보다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다.


어느새 다가온 재윤은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링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 ..준비해. ”



“ 언제나 되어있어. ”







재윤이 속삭인다. 그 때, 우리의 바로 앞까지 누군가가 날아오더니 링 줄에 부딪혀 그대로 튕겨나간다. 나와 재윤의 근육이 순식간에 수축한다.







“ 크억ㅡ ”



“ 컥... 쿨럭.... ”




[ 아, 두 선수 다 꼴이 말이 아닙니다. 이거 자칫하다가는 서로에게 큰 부상이 남을 수....

아! 말씀드리는 순간 화인고등학교 최민욱 선수가 흰 수건을 들고 링 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아직 1라운드 중인데요. 이대로 안의준 선수를 보류하나요?

네, 최민욱 선수가 흰 수건을 링 위로 던지면서 안의준 선수를 보류시킵니다. 안의준 선수가 마지막 선수의 경기가 끝날 때까지 체력을 회복한다면 보류로 인정되며, 그 때까지 체력을 회복하지 못할 시엔 탈락, 즉 규정에 따라 진 것으로 판단하겠습니다. 이는 현재 시합 불가 사인이 떨어진 일신남자고등학교의 한종현 선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제 2경기의 선수들께서는 1분간 몸을 푼 후 심판의 지시에 따라 링 위로 올라와 주시고, 다른 선수 분들께선 두 선수를 링에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







캐스터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링 줄을 잡고 그대로 몸을 훌쩍 넘겨버린다.

재윤도 곧이어 나를 따라 링 안으로 들어오고, 그 사이에 나는 의준으로 보이는 이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 때마다 그의 심장소리가 내 귀를 날카롭게 후벼 팠다.


1라운드를 채 마치지도 못했음에도 시합 불가 사인이 떨어졌다는 건 생각보다 많은 부상을 입었다는 소리인데...

아무리 의준이 버리는 카드였다고 해도, 그가 어엿한 우리 복싱부의 일원인 것은 변함이 없었다. 당연히 1명 정도는 제칠 수 있으리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설마 일신남고의 복싱 실력이 이 정도였던가?


나는 의준이 심하게 다쳤을까봐, 그가 자책하고 있을까봐 서둘러 들썩거리고 있는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붙잡고 내 쪽으로 돌렸다.


설마 우는 건 아니겠지. 난 우는 사람을 달래는 것엔 조금도 소질이 없는데.







“ 이 봐, 괜찮..... ”







하지만 곧장 내 눈으로 곤두박질 친 의준의 눈빛과 표정은, 내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맑았다.

내가 석상처럼 굳은 것을 발견한 재윤이 허겁지겁 뛰어온다.







“ 뭐야, 뭔데 그러는.... 잠깐만. 야, 너... 왜 웃고 있냐...? ”



“ 크흐... 크흐흐흑... 큭큭..... ”



“ ....머리를 맞은 건가? ”



“ 이 새끼 이거 뇌진탕 아님? ”



“ 우와, 이거 오랜만에 피가 끓어오르는 기분이야! ”







의준이 해맑게 웃더니 밝은 목소리로 재윤의 말에 생뚱맞게 대답한다.


정말 머리라도 맞은 건가... 애가 상태가 심각한데.


나는 말없이 의준의 얼굴을 조금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눈 밑에 울긋불긋하게 남은 저 부분은 얼마 가지 않아 피멍이 들 것처럼 보였고, 입술은 보기 좋게 터졌으며. 그의 파란색 티셔츠가 둥글게 구겨져있었다.

저건 정말 정면으로 들어오는 훅(Hook)에 맞았을 때나 생길 법한 자국인데. 하필이면 명치 부근이라니, 이건 좀 아팠겠군.

무엇보다도 그의 이마에는 손톱자국이 굉장히 선명했는데, 어찌나 세게 긁힌 건지 그 사이로 굵은 핏방울이 흘러내려 땀과 뒤섞이고 있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아파서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아무 말이나 중얼거리는 동안 나는 그를 거의 통째로 던지다시피 하며 링에서 끌어냈고, 어느새 다가오신 의료진 선생님은 의준을 자신의 앞에 앉히고 바쁘게 치료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다시 링과 링 너머 쪽에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한다.


뭐, 아무래도 우리가 마냥 당하기만 한건 아니었나 보네. 아니, 오히려 저쪽이 더 심한가?


시퍼렇게 부은 상대편 선수의 눈두덩을 바라보며 조금 흡족한 표정을 짓는 나였다.


그 때, 심판이 링 위에서 바삐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제 제 2경기를 시작하려는 모양이었다.

한 쪽에는 목을 꺾으며 몸을 풀고 있는 주스가 서 있었고, 또 한 쪽에는 완전히 군대식으로 머리를 바짝 깎은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눈썹이 굉장히 진했는데, 어딜 봐도 고등학생이라기엔 삭은 감이 없지 않아 있어 보였다.


하지만 그가 허리를 숙이며 주스를 노려보기 시작하자, 나는 어디선가 많이 본 모습 같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마치..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은 눈빛....


미처 방금 스쳐지나간 그 생각을 신중히 되짚어보기도 전에, 경기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댕 하고 울린다. 나는 어깨를 손으로 천천히 주무른다.

너무 성급한 생각이다. 지금 이 상황에 너무나 어색하기 그지없는 단어가 아닌가.

지금 이 곳은 ‘밖’의 세계인데 말이다.


종이 울리고 곧바로 가드를 올린 주스는, 내가 스치듯 해줬던 조언 그대로 자세를 낮추며 상대방을 천천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짧은 머리의 남자도 아직은 공격할 생각이 없는 듯 미소를 띠며 옆으로 왔다 갔다 거릴 뿐이다.


먼저 파고들 생각이 없는 건가? 이러면 주스가 불리해지는데.

도대체 무슨 속셈들이 그렇게 많은지 그들은 약 1분 동안 서로 간만 볼 뿐 아무런 육탄전도 벌이질 않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남자의 미소가 점점 더 진해지고 있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왜 저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웃는 거지? 왜 자꾸 저런 식으로 움직이는 거야?


순간 끔찍할 정도로 알 수 없는 기시감이 온 몸을 관통하고, 내가 남자의 움직임을 읽어낸 즉시 주스에게 뭐라 소리치려던 그 때, 그가 움직인다.

아주 찰나의 순간, 경기장에는 죽음 같은 정적이 흐른다.





퍼억ㅡ!!






“ 으윽..! ”






남자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꽃피기 시작했다.








[ 오... 이런, 세상에. 일신남자고등학교 이병건 선수. 화인고등학교 최민욱 선수를 폭풍이 휘몰아치듯 거세게 몰아붙입니다! 꼭 상대편 선수의 움직임을 다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 같은 모양새인데요.

잠깐. 아, 저건 반칙 아닌가요? 최민욱 선수를 거의 팔꿈치로 내려찍는 듯한 모습입니다! 정확히 최민욱 선수의 뒤통수에 이병건 선수의 팔꿈치 부분이 내리 꽂힙니다. 저건 아무리 강한 정신력을 가진 선수라도 견디기 힘들겠는데요.

심판이 엘보우 사용에 대한 판정을 내립니다. 아, 기각입니다. 정당한 몸싸움으로 판단합니다.

이렇게 되면 최민욱 선수도 조금 살벌하게 나오기 시작해야할 텐데, 이병건 선수가 한 대를 내어줄 때마다 너무나도 강력한 보복을 해옵니다.

이병건 선수, 너무 심합니다! 저건 경기가 아니라 일방적인 폭행 수준인데요. 아, 말씀 드리는 순간, 최민욱 선수의 로우킥이 정확하게 들어갑니다! 하지만 곧바로 태클을 당하고 맙니다.

아... 맙소사. 잔혹할 정도입니다. 차라리 기권을 하는 것이 나을 듯싶은데요... ]







지금... 저걸 정당한 경기라고 볼 수가 있는 건가? 저 폭행에 가까운 경기를?


나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이를 까드득 갈았다.

밀릴 수 밖에 없다. 저 녀석... 심판의 눈을 피해 엘보우를 5번이나 날렸다.

심판이란 작자가 눈을 장식으로 달고 다니나. 상처가 저 정도인데 도대체 어떻게 판단하면 엘보우가 아니라고 할 수가 있지?







[ 네. 결국 일신남자고등학교 이병건 선수, 화인고등학교 최민욱 선수를 기절시키고 K.O. 승을 거둡니다. ]







아니, 아직 기절하지 않았어! 기절한 게 아니라 팔꿈치로 명치를 맞아서 호흡곤란이 온 거라고!


나는 심판의 라운드 종료 사인이 떨어지기도 전에 냅다 링 위로 몸을 날린다. 나는 헛웃음이 나온다.


맙소사. 도대체 어떻게 애를 이 지경까지 만들 수 있지?


그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뻐끔거린다. 그의 입 쪽으로 귀를 갖다대보지만, 목소리마저 쉬어 버린 건지 잘 들리지 않는다.

어느새 재윤이 내 곁으로 다가온다. 내가 그를 바라보자, 그는 조용히 주스의 옆에 쪼그려서 앉을 뿐이었다.








“ ...설혜야. ”



“ ..... ”



“ ..내가 나갈게. ”



“ 안 돼. 지금 30분 다 된 거 몰라? ”







다급히 재윤의 팔을 덥석 잡아보지만, 그는 처음으로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앞으로 걸어 나간다.


이가 또 다시 까득 갈린다. 저 멍청이가..!







[ 오늘 따라 시간이 너무나도 빠르게 지나갑니다. 네! 다음 선수는 화인고등학교 이재윤 선수입니다. 현재 부상 중이라고 들었는데 괜찮은 걸까요-? ]







재윤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하고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얼마못가 휘청거리기 시작한다.

‘잠’은 절대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가 할 수 없음을 알았다.


이를 꾹 물면서 그를 쫓아 링 쪽으로 걸어가는데, 순간 그가 아닌 다른 곳에 시선이 꽂힌다.

상대편 진영이었는데, 왜인지 그들은 재윤을 보면서 비열하게 웃음 짓고 있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다가 낯익은 얼굴 하나를 발견하고 멈칫한다.

그는 굉장히 재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그의 입방정이 얼마 안가 내 고막으로 쏜살같이 곤두박질친다.







“ 쿡.. 큭큭.... 쟤가 우리 학교 학생이 아니라 전직 권투선수였다는 건 아무도 모를 거야. 안 그래? 잔혹하게 상대를 밟아버리는 그 잘못된 방식 때문에 선수 자격을 박탈당했잖아.

뭐, 그 덕분에 우리 측에서 손쉽게 영입할 수 있었으니 다행인건가? 크크큭... “




[ 제 3경기, 시작합니다..! ]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쳤다.

머릿속에서 알 수 없는 말들이 공명하기 시작했고, 나는 헛웃음이 나와 멍하니 링 위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 옆에서 의료진 선생님이 급하게 재윤을 소리쳐 불러보지만, 이미 종이 울려버린 상태다. 환호성이 경기장을 가득 메운다.



이병건.... 그래.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다.


전직 복싱선수였지만 너무나도 폭력적인 경기 방식 때문에 급기야 선수 자격을 박탈당했고, 그 후로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혀 진 남자.

선수 자격 박탈 사실이 보도되던 어느 날 우리 보스가 눈 여겨서 보던 남자.






그리고 현재....

...우리 조직에서 일하고 있는 남자.






나는 이성이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쩐지. 자세도 그렇고 눈빛도 그렇고 익숙하더라니.



그렇다면... 막아야겠지.



나는 성큼성큼 링 쪽으로 걸어갔다.

감독과 의료진 선생님, 전학생 모두가 나를 다급히 부르는 것이 느껴지지만, 나의 청각은 더 이상 그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단 한 곳만. 링에서 벌어지게 될 이 끔찍한 경기에만 내 온 신경이 집중된다.


분명히 이성의 존재가 느껴지는데... 어느새 내 몸속에서 본능이 잔혹하게 꿈틀대고 있었다.


고로 현재의 난, 이성과 본능이 공존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 이 봐, 뭐하는 거야! 당장 내려가! ”







심판이 소리치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로 쏠린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천천히 이재윤의 뒤로 다가간다.

심판의 고함을 들은 재윤과 이병건 또한 움직임을 멈추고 내 쪽을 바라보았고, 재윤은 그새 한 대를 맞은 건지 턱 아래가 벌겋게 부어있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고개를 내린다.

내가 아직 고개를 제대로 들지 않은 덕분일까. 아님 그 세계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일까. 이병건은 나를 몰라보는 눈치였다.

그 순간, 상대편 총감독이 내게 신랄한 욕을 퍼부으며 나의 개입에 항의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에 나는 조용히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후드집업을 홱 벗어 그에게 강한 힘으로 날려버린다. 후드집업은 그대로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다, 보기 좋게 총감독의 머리에 명중한다.


순식간에 관중석까지 고요해진다. 나는 경직된 얼굴로 서있는 재윤을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 들어가. ”



“ 야, 너 미쳤... ”



“ 들어가라고. ”









내가 살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자, 그가 움찔한다.

내가 재윤을 링 밖으로 밀치며 몸을 돌리고 있던 와중에, 이병건의 코웃음 소리가 내 귀를 날카롭게 파고든다. 그가 역겨운 어조로 말했다.







“ 큭. 뭐야, 이 말라빠진 새끼는? 미친 거 아냐? ”







나는 선수 교체 사인을 표하며 그의 말을 무시하고 목을 우드득 꺾었다.


그러고 보니 관중석엔 그 애들이 있을텐데... 좋은 꼴은 못 보이겠는걸.


내가 한 순간 피식 실소를 터뜨리자, 이병건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나는 그에게만 들릴 정도의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재미있군. 하극상이라도 할 생각인가? 입에 걸레를 문 후배님아. ”



“ 뭐야?! 저 씨발년이..! ”









그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나는 다시 한 번 헛웃음을 쳤다.









“ 흐음. 제 정신이 아닌 건 인정하겠는데, 어디까지 내 인내심을 시험할 작정이지? ”



“ 별 지랄을 다 하네. 처 맞고 싶지 않으면 꺼져, 미친 새끼야! ”



“ 이병건. ”









그가 움찔한다. 내가 그의 쪽으로 천천히 다가가자, 그의 표정이 점점 어리둥절해진다.











“ 자꾸 입에 걸레물고 더럽게 말하면... ”











이윽고 나는 고개를 들어올린다.

입가에 자꾸 이상한 표정이 뜨는데, 이 자리의 모두가 기겁하는 것을 보면 장난 아니게 못생긴 표정인가 보다.


혹은... 내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노가 얼굴로 표출되고 있는 중인가보다.



이병건의 얼굴이 새파래진다.



나는 더 이상 참지 않고, 내 본능을 감싼 울타리를 망설임 없이 허물어버린다.













“ ...입을 통째로 도려내버린다? ”

















이참에 하찮은 벌레들의 정신머리를 시원하게 뜯어고쳐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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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8-13 21:55 | 조회 : 832 목록
작가의 말
비제르

분량 조절 실패.. 오늘도 재미있게 봐주세요. 참, 루연, 슈냥, 레닌 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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