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2)

<11> (2)



ㅡ남주인공 1 시점(천우)

















‘ ...아직도 아니야? ’







언제부터였을까. 도대체 언제부터.







‘ 아직도 난... 안 된다는 거야? ’







단순하기 그지없던 그 욕망이, 그저 한낱 수단일 뿐이었던 이 관계가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어디서부터 목적이 변해버렸는지.







‘ 너... 진짜 잔인하다. ’







그녀가 나를 돌아본다.


어느 한 곳에 우두커니 멈춰서 시간을 거스르는 나와는 달리 여전히 흘러가는 존재.


그녀의 차가운 두 눈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결국엔 너도 남들과 똑같을 뿐이잖아, 라고.









‘ ..그렇지 않아. ’







그런 게 아니야.







‘ 난 그래서 그런 게 아니야..! ’









이미 그 사소한 욕망 따윈 이 몸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어.


내 머릿속 그 어디에도 널 그렇게 여기는 마음 따위 존재하지 않아.


하지만 난 다른 싹을 찾아냈어.

새까맣게 타버린 욕망과 그 한 줌의 재 속에서 돋아난 새로운 싹.


그 싹은 태울 수가 없어.

이제 더 이상 그럴 수가 없어.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양 어깨를 붙잡고 눈을 마주친다.


여전히 똑같았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









‘ 차라리... 이게 동정이었으면 좋겠어. ’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어.








‘ 욕심이었으면 좋겠어... ’








그런 가벼운 마음이었으면 좋겠어.








‘ 그런데 이젠... 그게 아닌 것 같아... ’








그런 마음이라고 애써 외면하기엔 내 마음이... 심장이.... 이렇게나 무거워...










‘ 널 보고만 있어도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눈 앞이 아찔해지고. 정말 미쳐버릴 것 같다고... 진짜.... 돌아버릴 것 같다고...! ’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그녀에겐 들리지 않는 듯, 내 목소리를 그저 바람이라고 여기는 듯... 그녀는 눈썹 하나 꿈틀거리지 않았다.

나는 눈이 뜨거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가슴이 미어지는 듯 아팠다.







‘ 하지만 넌... 여전히 내가 안 보이나 봐... ’







나는 무력하게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내리며 고개를 떨어뜨린다.


나도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어.

내가 왜 이러는지, 왜 이 지경까지 왔는지, 왜... 포기하지 못하는 건지.







‘ 한 번만.. 네 이름이 아니라... 내 이름... 불러주면 안될까...? ’







그녀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눈빛이 내 몸을 스쳐지나가지만, 그것을 붙잡을 힘 따윈 내게 없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걸까. 난.. 도대체 언제까지 널....















‘ ...웨이렌. ’












언제까지 너의 모든 순간을

한 편의 동화를 보듯이 흘러가게 두어야 하는 걸까.















‘ ...너의 감정을.. 착각하지 마. ’





























* * *









“ ...야. 죽었어? ”







옆의 여자애에게 대충 얼버무린 이름을 던져준 다음, 고개를 돌려 옆을 툭 친다.

그러자 약하게 숨을 몰아쉬던 그가 나를 쳐다보았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얘는 눈빛만으로도 사람 열 댓 명은 그냥 죽일 것 같단 말이지.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 죽지 않았으면 앞 좀 봐. 이제 경기도 시작할 테니까. ”







그러자 바로 벌떡 자세를 바로하며 앞을 뚫어져라 처다 보는 그였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 넌 땀이 벌써 다 증발했냐? 뽀송뽀송하네 아주. ”



“ 네가 땀이 많이 나는 거다. ”







그의 오한이 드는 목소리에 나는 뒷목이 시원해지는 듯한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역시.. 이 녀석의 목소리는 여름에 들어야 좋다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인 뒤 다시 한 번 이마를 닦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충 천 칠백 여든 아홉 명 정도인가... 아니, 아까 화장실로 빠진 노인 한 명과 남성 4명을 포함하면 천 칠백 아흔 넷이군.

생각보다 경기장이 그렇게 크지 않아 대충 눈으로 훑어만 봐도 관객의 숫자 정도는 파악이 가능했다.


나는 씨익 웃다가, 순간 멈칫하고 다시 관중석을 살핀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검고 형광 빛을 내는 물체들... 플랜카드인가.

나는 호기심에 몇 개의 문구를 읽어보다가 곧이어 표정을 굳혔다.

내 옆의 그도 내 표정을 보자마자 시선을 플랜카드로 옮긴다. 우리 둘은 그렇게 앉은 채로 자리에서 굳어버린다.


도대체... 저게 뭐래....?





‘ 타팀 박멸 반설혜 ’


‘ 설혜 마누라♥ '


' 꽃길만 걷자 설혜야 ‘


‘ 섹도시발 반설혜 ’





순간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나온다. 나는 중얼거렸다.







“ 나 원. 설혜 쟤는 연예인이라도 하겠대? 저 저 팬클럽 규모 좀 봐라! ”



“ 섹.... 도.... 시발? ”







그가 플랜카드들 중 한 문구를 또박또박 읽어내는데, 목소리가 어째 심상치 않다.


나는 설마 설마 하는 마음으로 그를 곁눈질 했다.


그의 얼굴이 아주 미세하게 찡그러져 있다.

보나마나 저 글자들을 직독 직해 한 것이리라.

이래도 두었다간 공간이동이라도 해서 저 플랜카드를 든 사람을 토막이라도 내버릴 기세다.


나는 그를 세게 툭 친다.







“ 샨. 저건 설혜에게 욕을 한 것이 아니야. 정신 차려. ”



“ ..... ”



“ 그냥 ‘섹시도발’ 의 글자 배열을 섞어 놓은 거라고. 뭐, 내게도 별로 듣기 좋은 말은 아니다만. ”



“ ...누가 뭐래? ”







그가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나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기지개를 켰다.







“ 에휴. 니가 당장이라도 플랜카드 찢으러 날아 갈까봐 무서워 죽겠다 임마. ”



“ 안 그래. ”



“ 내가 널 믿을 수가 있어야지. 기억 안 나냐?

저번에 설혜에게 순수한 마음으로 풍선을 나누어주려던 곰 인형 탈의 아르바이트생한테 니가 다짜고짜 엄청 으르렁거린 거? ”



“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거지. ”



“ 몇 주 전이다. 불과 몇 주 전. ”







그가 시큰둥하게 말하자, 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대꾸했다.

그는 애써 내 말을 무시하며 고개를 돌렸고, 모자를 벗은 뒤 머리를 헝클어뜨린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에 조용히 키득키득 웃는다.


이 녀석도 은근히 놀리는 재미가 있단 말이지. 설혜에겐 맞을 짓이지만...


가끔 이런 반응을 보일 때면 그가 생각보다 귀여워 보일 때가 있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이 지구상에서 나 혼자 뿐이다.


그는 내가 지금껏 봐온 사람들 중 가장 표정 변화가 없는 사람이었고, 그건 설혜도 인정할 정도였다.

무표정을 유지하는 것이라면 설혜도 결코 지지 않긴 하나 그에 비하면 설혜는 표정 변화가 다양한 편에 속했다.


그가 살면서 보인 표정들을 손으로 세었을 때 손가락이 모자라지 않을 정도니까 말이다.


그의 무표정은 뭐랄까... 한 여름 새벽녘까지 혼자 팝콘을 먹으며 공포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거, 표정만 좀 피면 절대 누구한테 꿀리지 않을 얼굴인데 말이지.

얼굴에 철갑을 두른 그가 그나마 라도 표정이 피는 순간은 나나 설혜를 볼 때, 혹은 일을 할 때 뿐이다. 다른 때는 없다.

뭐... 그조차도 조금씩 편차가 있다는 게 함정이지만.







“ 마음은 정했냐? ”



“ 뭘. ”



“ 설혜랑, 만나고 갈거야? ”



“ ....... ”



“ 네가 병원에서 말도 안하고 튄 이유가 이 것 때문이라는 걸 알면, 설혜가 가만히 안 있을걸? ”



“ ........ ”



“ 가만. 생각해보니 또 열 받네. ”







내가 뜬금없이 중얼거리자 그가 나를 힐끔 처다 본다. 내가 분개한다.






“ 니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건 이미 나도 존나 처 맞을 일이잖아! 안 그래도 요즘 미움 받는데, 이젠 너 때문에도 내가 설혜 눈 밖에 나야하는 거야?! ”



“ .....왜 나 때문 인건데. ”



“ 이 사람 보게. 너 나 협박한 거 기억 안 나냐? 그러게, 나 혼자 가려던 걸 왜 따라와서는! ”







내가 갑자기 심각해져서는 머리를 쥐어뜯자, 모자가 무릎 위로 툭하고 떨어진다.

그러지 않아도 이미 미움이란 미움은 다 받는 중인데... 어쩌다 이런 꼴이 되어버렸는지.


일주일 전 새벽, 그녀에게서 뜬금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가 내게 먼저 전화를 거는 일은 생각보다도 더 드문 일이기에 발신자가 그녀임을 확인한 나는 기대에 부풀어 전화를 받았고, 오랜만에 걸려온 이 전화가 제발 일 이야기는 아니길 바랐다.

뭐, 일 이야기는 아니었다. 바로 샨에 대한 이야기였으니까.





' 너 그 새끼 데려올 생각이면 관 둬라. 절대, 절대 데려오지 마. 알았어? '


' 알았다니까. 오랜만에 전화해서 하는 얘기라곤. '


' 됐고. 병원에 얌전히 박혀있으라고 해. 오기만 해 봐, 다른 쪽 다리도 박살내 버릴 거니까. '


' ...넌 걱정된다는 말을 꼭 그렇게 잔인하게 하더라.. '




나는 그녀가 무슨 의미로 그러한 당부를 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그러겠다고 답했고, 그 뒤로 샨에게는 절대 티를 내지 않았다.

병문안을 갈 때도 설혜에 대한 주제는 피했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샨도 한 때 나와 같은 해커로 활동한 적이 있었기에, 그에게 비밀이란 허용될 수 없는 것이었나 보다.

뜬금없이 자신을 데리러 병원으로 오라고 한 것을 보면 말이다. 그것도, 경기 당일에.




' 데려가. '


' 아까부터 무슨 소리야? 널 어디로 데려가란 건데? '


' 다 알아. 나도 데려가. '


' 아니, 그러니까 어딜... '


' 계속 잡아떼면, 나도 내 마음대로 할 거야. '


' 무슨... '





그가 그런 말을 할 줄 누가 알았으랴. 그가 데리러 와 달라고 부탁할 때부터 눈치 챘어야 했는데... 설혜를 보러 갈 생각에만 들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데리고 가지 않겠다면 병원 창문을 깨고 뛰쳐나가선 경기장에 뛰어들 거라니...

이건 그냥 나더러 설혜한테 살해당하라는 소리다.


내가 옆에서 계속 붙잡아도 날아다니는 인간인데, 고삐가 풀린 채 경기장으로 뛰어들어 버린다면...?


맙소사. 그는 물론이고 나도 그날부로 설혜에게 두 다리가 분질러질 것이 뻔했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어떻게든 내가 죽는 결과가 초래되는 상황...

그렇다면 적어도 보스에게까지는 밟히지 않도록 하는 쪽을 선택해야겠지.



그 결과가 지금... 이거고.







" 으으! 내가 미움 받는 이유는 다 너 때문이야! "



" 애초에 날 병원에만 처박혀 있도록 하겠다는 발상이 문제 아닌가? "







그가 억양 없는 말투로 조용히 말했다. 나는 어이없는 눈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무릎에 턱을 괴고 말했다.







" 미친 새끼. 그러게 누가 맨몸으로 차 문에 매달리래?

걔가 운전면허도 없는 초보였기에 망정이지. 너 겨우 전치 2주 나온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설혜랑 나랑 전화 받고 얼마나 기절초풍했는데! "



" 거짓말. "



" ...그래, 나 혼자 얼마나 기절초풍했는데! 설혜도 네가 걱정해서 한 말이잖아. 너 이쯤 되면 일중독 아니냐? 아무리 그래도...! "



" 칸. "







그가 나를 나지막이 부른다.

나는 그의 말에 의아해하다가, 순간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를 자각하고 입을 조용히 다물었다.



일중독이라... 그런 말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가 이렇게 일에 매진하는 이유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않고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그를 힐끔 쳐다보지만, 그는 여전히 방금 전과 다름없는 표정이었다.



이럴 땐 참 부럽다니까.

계속 저런 표정을 짓고 있을 수 있다는 게...



우리 둘 사이에는 아까와는 다른 침묵이 흘렀다. 아까와는 다른, 서로에 대한 사죄의 침묵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주변의 관중들이 우렁차게 함성을 질러대기 시작했고, 나는 모자를 다시 눌러쓴다.


나는 갑자기 속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어 투덜거리며 소리쳤다.







" 쳇. 야, 반설혜! 여기 너의 자칭 동료들이 응원 왔는데, 한 대라도 맞아서 몸에 작은 흠이라도 나면 절대 가만 안 있을 거야! "



" ...칸, 입 다물어. "



" 너한테 손 댄 새끼 다음날에 흰 가운에 덮여서 뉴스에 실려 나올 거다!! "



" 입 다물랬지. "







주위의 함성이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고, 곧이어 시력이 아주 좋은 나의 두 눈에 무언가가 포착된다.


양 쪽에 나있는 거대한 철문들. 다시 말해서 각 대기실로 이어지는 문들이 동시에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 문들에서 각각 7명의 사람들이 걸어 나왔다.

아무래도 5명의 선수들과 감독, 의료진으로 구성되어있는 것 같았다.


나는 빠르게 오른쪽으로 눈을 돌려서 문으로부터 걸어 나오고 있는 이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손을 흔들며 입장하는 감독과 나이가 조금 있어 보이는 여자 의료진, 차례로 입장하는 4명의 남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위풍당당하게 걸어 들어오는, 이 경기에 참가하는 유일한 여자 선수.







" 뭐.... 뭐야, 저건? "



" 왜? "







내가 갑자기 흥분하자, 그가 짧게 물었다.

나는 순식간에 내 두 손으로 살기가 가득 들어차는 것이 느껴졌다.







" 반설혜.. 저, 저.... "



" 뭔데. "







나보다 시력이 좋은 편은 아닌 그가 재촉하듯 물었다. 내가 분노로 잔뜩 상기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 저게 지금.... 지금 감히 위에 스포츠브라만 입고 뭐하는 거야!!!! "



" 뭐..? "







그가 멍하니 그 쪽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하지만 나완 달리 그렇게 흥분하지는 않는 모습이다.

걔가 그런 걸 스스로 입었다면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하는 표정이었다.

몸을 드러내는 걸 가장 꺼려하던 사람은 오히려 그 아이인데.



상대적으로 평온한 그에 비해, 나는 피가 거꾸로 솟을 노릇이었다.


스포츠브라가 명치까지는 가려주는 건지 그 상처는 보이지 않지만... 그녀의 몸 곳곳에 자리 잡힌 자잘한 흉터들이 내 눈 한 구석에 박혀 떠나질 않는다.


나는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이 감정을 참을 생각이 없었다.



지금 경기를 하겠단 거야, 뭘 하겠단 거야?

그것도 저런 천 조각만 입고, 저 남정네들이랑 뭘 하겠다고?



심지어 카메라까지 있는 여기서. 전 세계에 생중계 되는 이 보는 눈 많은 경기장에서. 여기서...!!




나는 주위의 시선 따위 아랑곳 하지 않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화가 나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삿대질까지 하며 소리쳤다.










" 야!! 너 당장 위에 안 입어?! 왜 다 벗어 재끼고 이 추운 날에 그 지랄인데!!!

지금 거기로 뛰쳐나가서 다 찢어버리기 전에 당장 입어. 당장!!! "







" ....... "



" ....... "



" ....... "




" ...웨이, 혹시 어디 아프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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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8-10 21:09 | 조회 : 805 목록
작가의 말
비제르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컴퓨터 오류로 그동안 못 올리고 있었어요.. 사죄의 의미로 눈깜짝할 새에 다음 편 들고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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