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1)




<9> # part 1






“ 야. 설마 지금 농담 하는거냐? ”



[ 음.... 아닌데. ]



“ 씨... 망할 노인네. 날 속였겠다... ”



[ 하하. 그게 그렇게 싫어? ]



“ 말이라고 하냐? 지금 남의 일당을 N분의 1로 지급한다는데? ”



[ 내 일당은 너한테 줄 거 알잖아. 난 필요 없어. ]



“ 근데 그 노인네가 내 일당을 가져가잖아! ”



[ 보스도 통신망이랑 뒷수습으로 고생했잖아. 용돈 쥐어드린다 생각해. ]



“ 쳇... ”



[ ...그보다, 경기 준비는 잘 되어가? ]



“ 니가 그걸 왜 물어봐. ”



[ 그냥, 기대되서. 궁금하단 말이야. ]



“ 신경 끄고 경기만 잽싸게 봐. 너 입장시키느라 꽤 고생했다고. ”



[ 알았어. 그때 볼게.... 몸 좀 사리면서 하고. ]



“ 별걸 다 신경쓰긴. 끊는다. ”





나는 급하게 끊는다고 말한 후 전화기를 가방 안에 쑤셔 넣었다.

누군가가 화장실 쪽으로 걸어오는 듯한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핸드폰을 내지 않은데다가, 화장실에서 몰래 전화를 한 것까지 걸리기라도 한다면 낭패였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하여 아무 것도 없는 변기의 물을 내리고, 세면대에서 손까지 씻으며 화장실을 벗어난다.

손을 털며 복도로 들어서자, 아무도 내가 화장실에서 딴 짓을 했다고 보는 것 같지 않았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앞문을 드르륵 열고,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 자리에 앉는다.

사실상 나는 지금 교실에 온 것이기에, 등교를 지금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종은 친지 오래였고, 엄연히 나는 지각이었다. 하지만 운 좋게도 담임선생님은 자리에 계시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안도하며 항상 그렇듯 책상에 엎드려서 두 눈을 감았다.


그런데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반 아이들의 소리가 이상하리만큼 컸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듣지 않으려고 했지만, 여자아이들은 물론 남자아이들까지 다 동일한 주제를 떠들어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나는 자는 척 하면서 얼굴을 묻은 후, 귓속을 파고드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 야, 들었어? 어제 SQ그룹 저택 털렸다는 거? ”



“ 아니야. 새벽에 일어난 일이니까 오늘이지. ”



“ 회장은 이미 피신해 있었대. 근데 손녀딸은 거기 그대로 있었다는데. ”



“ 헐? 근데 살아있대? ”



“ 어. CCTV도 몽땅 망가지고,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싹 다 죽었대. ”



“ 100명 넘게?! 뭐야, 킬러 집단이라도 떼거지로 갔냐? ”





킬러 집단? 내 상황으로 비교해보자면.. 우리 조직원들이 떼거지로 가는 것을 말하는 건가?



겨우 그런 저택 따위에?





“ 아닐걸. 뉴스에 보니까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긴 있었어. 게다가 그 사람들이 말한 바로는.... ”



“ ...... ”



“ ...모두 한 사람의 짓이랬어. ”



“ 뭐어? 구라 아니야? ”





구라 맞네.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인데.

스나이퍼를 쓴 사람과 근거리에서 총을 쏜 사람까지 하면 적어도 두 명 이상이어야 하잖아. 생각이란 게 없는 건가?


나는 대화에 끼어들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잠자코 계속 엿들었다.




“ 살아남은 이들이 진술하는 범인의 모습이 다 일치한대. 그러니까 한 사람의 소행이었다는 거지. ”





뭐?

나는 순간 어깨를 흠칫했다.


그럼 백천우 이 자식은 자기가 맡은 곳의 인간들은 다 죽였다, 이거지? 이게 나한테는 최대한 죽이지 말라고 해놓고선?





" 그래서? 범인은 어떻게 생겼다는데? “



“ 머리가 길었고... 젊은 여자였대. ”



“ 젊은 여자? 미친, 대박이네. ”



“ 잘못 본 거 아니야? 그냥 예쁘게 생긴 남자였다던가... ”



“ 아니래. 얼굴은 전혀 보질 못했지만, 몸의 굴곡이라던가 움직임이 확실한 여자였대. ”



“ 소오름.. 근데, 이거 단서가 있긴 있는 거야? ”





단서. 나는 그 말에 귀를 쫑긋 기울인다.

오늘 아침 깜빡하고 뉴스를 보지 않았던 탓에 나도 정보가 필요하던 참이었다.

만약 단서가 잡혔다면, 안 좋은 경우에는 경찰서까지 쓸어버리러 가야 할 수도 있었다. 그건 굉장히 귀찮은 일이었다.





“ 아니. 보통 프로가 아니었나봐. 지문은 고사하고 DNA 하나 채취하지 못했대. ”



“ 그런 사람이 내 주변이 있다면 얼마나 무섭겠냐. ”




그들이 몸을 부르르 떨며 재잘댔다.

나는 엎드려있던 몸을 일으키고 턱을 괴며 눈을 내리깔았다.



뭐.. 별로 무섭지도 않나본데. 바로 곁에 있어도.



나는 그들이 하는 이야기가 점점 길어지자 더 이상 엿듣지 않았다.

오늘은 또 어떻게 하루를 버티나 싶어 혼자 조용히 먼 산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눈 앞에 둥그스름한 무언가가 불쑥 튀어 나온다.



조직 생활을 하다 보면, 가만히 있었음에도 느닷없이 머리에 총구가 와 있거나, 느닷없이 폭탄이 눈 앞으로 날아오고 있거나 하는 등의 이상한 상황을 많이 겪게 된다.

그렇기에 그런 황당한 상황을 빠르게 대처하는 습관이 어쩔 수 없이 몸에 밴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순간 파악이 되지 않은 어떤 물체가 내 앞으로 튀어 나오자, 나는 몸 전체에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기 시작했다.

내 뇌는 이성을 잃고 이 물체는 분명 총이거나 폭탄일 거라고 비명을 질러댔다.

지금 내가 있는 장소가 학교라는 사실도, 학생들이 필기구가 아닌 폭탄을 지니고 다닐 리가 없다는 사실도 망각한 채 말이다.


순식간에 본능이 내 이성을 지배했다.


이성이 사라짐과 동시에, 내 오른손은 무언가의 팔을 덥석 붙잡고 확 끌어당겼다.


그리고 자유로운 나의 왼손은.... 나에게 끌려온 무언가의 목을 강하게 휘어잡는다.





" 윽...? 켁.. 커억.... "



" 꺄아악!! 설혜야!? "



" 반설혜!! "





내 왼손은 무언가의 목을 사정없이 조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무언가는 숨이 막히는 듯 켁켁 거렸고, 몇몇 여학생들이 비명을 지른다.

내 어깨 위로 한 손이 올라오고,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뜯어 말리지만 나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나는 이들이 나를 왜 이렇게 말리는 건가 싶었다. 나는 그저 막으려고 했을 뿐이었다.


그 순간, 자취를 감추었던 나의 이성이 되돌아오면서 눈 앞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내 손으로 느껴지는 누군가의 몸부림에 흠칫하며 시선을 위로, 더 위로 올린다.



그러자 내 눈에 비추어진 것은, 새파래진 남자의 얼굴과...


....손에 들린 바나나 우유였다.





" 아.... "





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나는 다급히 그의 목을 조르던 손에 힘을 풀었고, 그의 손목도 놓아주었다.


그러자 공중에 떠있던 그가 쿵하고 아래로 떨어진다.

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새파랬던 얼굴을 다시금 붉히며 쿨럭거렸다.


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 쿨럭, 쿨럭... 으.. "



" 유현아, 괜찮아? "



" 어... 난 괜찮아. "





그가 괜찮다고 답하는 그 다음 순간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로 향한다. 나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거지?





" 반설혜. "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려보니, 안의준이 있었다. 지나가던 도중 소란을 듣고 나를 말렸나보다.

아까 내 어깨를 잡던 손이 의준의 손이었구나. 자신의 반이 아닌 다른 반에 들어오면 벌점이라는 것을 알면서....


그의 눈빛은 나를 책망한다기보다 약간 걱정스러워 하는 듯했다.





" 너 무슨 짓이야? "



" 아... 아니, 난..... "





대답하기 위하여 입을 열었는데,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이 더듬거리고 있었다.


안의준을 비롯한 모두의 눈이 커진다.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말을 더듬어 본 적이 없었다. 더욱이 지난 10년간은 말이다.


이들도 내가 말을 더듬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지 놀랍고도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 너... 왜 말을 더듬고 그래...? "




의준이 눈살을 찌푸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곤 내 양 어깨를 잡는다. 나는 이제 머릿속이 하얗다 못해 검어졌다.





" 나... 방금 무슨 짓을.... "





내가 멍한 눈으로 웅얼거리자, 그가 나를 흔들기 시작했다.





" 설혜야. 너 왜 그래? 무섭게 왜 그러는 거야! 어? "



" 들..... "



" 뭐? "



" 들킨... 들킨거야.... 난... 이제.... "



" 야... 설혜야? 반설혜? "








들킨건가?



들킨거야?





난.... 들킨거야.





' 무슨 일이 있어도 네 모습을 들켜서는 안 돼. 알겠니? '



' 들키면 어떻게 되는데? '



' 글쎄? 아마도 우린.... '





나는......





' ....널 버리겠지? '





버려질거야.









" ...반설혜!!! "





의준이 내 귀에다가 소리를 지른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들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혹은 두려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김없이 대형 사고를 낸 본능은 다시 자취를 감추고, 이성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젠장,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해버렸군.


나는 불현듯 다른 이들에게 비친 내 모습이 상상이 가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이런 감정이 드는 것을 보면 일단 지금의 나는 정상이 확실했다.


나는 의준의 양손을 치우며 말했다.





" ....목청 한 번 좋네. 시끄러워. "



" 야, 너...! "



" 괜찮냐고? 멀쩡하다. "



" 아니, 그게 아니라.... "



" 신경 쓰지마. 아무렇지도 않아. "




나는 그를 보며 이렇게 말하고는 숨을 가다듬고 쓰러진 전학생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려던 그 때,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말없이 내 손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손을 내어주고 몸을 일으킨다.


나는 손을 빼려는 그의 동작을 멈추게 한다.

그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나는 그의 손목을 꽉 붙잡고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 ....미안. "



" ...... "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재빠르게 손을 놓는 나였다.


옆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입을 쩌억 벌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의준이 보였다.

몇몇의 학생들도 놀란 토끼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나는 울컥 올라오는 구역질에 재빨리 인파를 헤치고 걸어 나갔다.


나는 이를 까드득 갈았다.





" ..젠장. 남한테 이런 말 해보기는 또 오랜만이군. "





그리고는 수업 종이 치기 일보직전이라는 사실도 잊고, 교실 문을 박차며 뛰어나가 버렸다.







* * *




" 후... "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쯤 수업 종은 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렇다보니 이제와 다시 돌아가기도 애매했다.


나는 학교 뒤편의 벤치에 앉아서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냥 이렇게 가만히 있는 편이 나을 듯 했다.



그리고 나는 아까 떠올랐던 기억을 천천히 되짚기 시작했다.


도대체 뜬금없이 왜 그런 기억이 떠오른 거지? 버려진다니... 내가 왜? 누구에게?

더 이상 버려질 곳도, 버려질 사람도 없는데.


나는 머릿속을 스치는 한 생각에 돌연 씁쓸한 기색이 역력한 실소를 살짝 터뜨린다.



역시 그건가. 그 '기억' 때문이라는 건가.


날 죽어서까지도 꼬리표처럼 쫓아올 나의 흔적들 때문인가.


나는 허무했다.

다 잊었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아직 잊지 못했다는 것을. 그건 합리화였을 뿐이라는 것을.


내 몸의 일부가 갑자기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그것도 사라지지 않는 건데 말이다.





" 반설혜. "





갑자기 앞에서 목소리가 들리자, 나는 흠칫하며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아까부터 이쪽으로 뛰어오는 듯한 발소리가 들리긴 했었으나, 설마 내 쪽으로 오는 거겠어 하는 생각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 전...학생? "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 니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지금은 수업 중 아닌가? "



" 그러는 너는. "



" ..... "



" 너는 왜 여기에 있어? "



" 무슨 상관이야. "





내가 인상을 찡그리며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자, 그가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면서 말했다.





" 상관할 건 많지. 그 예로 방금 그 사건이라던가. "



" 난 이미 사과 했어. "



" ....정말, 요즘 인간들은 다 똑같아. 사과만 하면 다 끝난 줄 안다니까. "





그가 내 옆에 털썩 앉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그가 내 옆에 앉음과 동시에 자리를 옮겨 그와 멀리 떨어져 앉는다.


갑자기 나에게 친한 듯 말을 거는 이 남자가 부담스러워서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그를 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가 더 컸다.





" 그럼 사과만 하면 된 거지, 뭘 더 바래? "



" 설명이 필요하지. 아주 구체적인 설명. "





그가 내 말투를 따라하더니, 별안간 손을 부스럭거리며 내게 무언가를 건넨다.


아까 보았던 바나나 우유였다.


나는 여기에 독이라도 탄 건 아닌가 싶어 애꿎은 우유를 강하게 노려보았다.

아까는 달랐을지 몰라도 지금 상황에 독을 탔다는 설정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방금까지 자신의 목을 조른 이에게 그런 것 밖에 줄 게 더 있는가?





" 독 안 탔어. 받아. "





그가 내 생각을 읽었는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나는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우유를 받아들었다.





" 뭐야. "



" 최민욱인가, 걔가 너한테 갖다 주랬어. 말하자면 심부름이지. "





그가 또 다른 하나의 바나나 우유를 주머니에서 꺼내더니 빨대를 꽂으며 말했다.

그가 나에게 또 다른 빨대를 하나 건네자, 나는 받아들면서 순간 고개를 갸웃한다.


최민욱? 최민욱.... 어디서 들어봤는데?





" 걔가 누구더라. "



" ....니가 맨날 주스라고 부르던 애. "



" 아, 그 주스. "





내가 그제야 기억해내며 말하자, 그 주스가 불쌍하다는 듯 혀를 차는 그였다. 나는 뚜껑에 빨대를 꽂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 근데 그 주스가 왜 나한테 이걸 줘. "



" 글쎄. 니가 좋아서 그런 거 아니야? "



" 좋으면 바나나 우유를 줘야 하는 거냐? "



" 뭐... 그건 아니지만. "





그가 웅얼거렸다. 하지만 곧이어 이어갈 말이 생각났는지 곧바로 말했다.





" 아, 자꾸 딴 얘기 하지 말고 말해. 나한테 왜 그랬냐? "



" 엉? "



" 갑자기 주먹으로 날 패질 않나, 목을 조르질 않나. "



" 음... "



" 혹시 내가 뭘 잘못했어? "



" ...그런 건 아니야. "



" 그럼? "





나는 무엇이라 말할지 고민하다가, 홧김에 아무 말이나 던져버린다.





" 잠결에... 잠결에 그랬어. "



" ...잠결? "



" 응. 꿈에서 누구 목을 좀 조르느라.... "





나는 말꼬리를 흐리며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으로 봐서는 전혀 믿지 않는 듯 했다.


그렇다면.... 목을 조른 사건이 아닌, 갑자기 주먹으로 팬 사건으로 주의를 분산시켜야 했다.





" ....주스가 설명 안해주든? "



" 해주긴 했지. 경기 날짜 뿐이었지만. "



" ...씨발. 일 제대로 처 안하는 새끼 같으니.... "





그가 바나나 우유를 쪼륵 마시며 시큰둥하게 말하자, 나는 입을 대지도 않은 내 우유를 바닥에 팽개치며 중얼거렸다.


바나나 우유는 저 멀리로 날아가며 그대로 박살이 난다. 나는 후 하고 숨을 고르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 ...내가 너를 다짜고짜 때렸던 건, 너를 평가하기 위해서였어. "



" ..뭐? "



" 니가 경기에 나갈 수 있는 실력이 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고, "



" 왜... 나를? "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내가 왜 이런 설명까지 해줘야 하나 싶어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며 말했다.





" 경기에 나갈 인원이 부족했으니까. 다들 지는 게 두려워 지원을 하지 않았지.

그럴 때 아무 것도 모르는 신참을 꿰어버리는 게 가장 쉬운 방법 아니겠어? "



" 헐.... "




그가 다 먹은 바나나 우유를 툭 떨구며 말했다.





" 그래서 나를 그렇게 때렸다고? "



" 그래. 네 실력을 보기 위해서 살살하긴 했지만. "



" ...어쩌면 그 피떡이 된다는 소문이 네가 맞을지도... "



" 소문? "



"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





그가 다급히 말하자 나는 캐물으려고 했으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망할 주스 놈 때문에 그는 지금 앞으로 우리가 치루어야 할 경기에 대해 완전히 백지인 상태다.

이대로 내버려둔다면 그는 링 위에서 졸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 좋아. 그럼 설명해 줄테니 잘 들어. "



" 어... 응. "





그가 엉겹결에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복싱부에서 했던 연설 수준의 말을 그대로 읊으며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가 나를 지나치게 초롱초롱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대수롭잖게 넘어갔다.





" 아무튼 그렇다고. 그리고, 이건 아는지 모르겠는데.... 상품이 나야. "



" 음... 음? 뭐라고? "





그가 깜짝 놀라더니 되물었다. 나는 또박또박 말했다.





" 우승 상품이 바로 나라고. "



" 우리가 지면 니가 팔려간단 소리야? "



" 비슷해. 일주일 간 대여하는 것 뿐이지만. "



" 그럼 우리가 이기면? "



" 그게 뭐? "



" 우리가 이기면, 너를 사가는 거야? "





그의 표정이 꽤나 진지했다. 나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그의 발을 힘껏 밟았다.





" 으악!! "



" 뭔 개소리야. 이 새끼 이거.... 너도 음탕한 새끼구만. "



" 아오.. 왜 혼자 김칫국을 들이 마시고 그런대. 뭘 상상한거야? "



" 닥쳐. 다음엔 얼굴이야. "





내가 발목을 풀며 싸늘하게 말하자, 그는 발을 붙들고 있던 두 손을 슬그머니 빼서 얼굴을 가렸다.

저런 걸 보면 왠지 안의준을 닮은 것 같기도 한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의 신체를 전체적으로 쭉 훑어보았다. 그가 고개를 갸웃하자, 나는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 습관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오른손잡이인 것 같고, 복싱을 한지 기껏 해봤자 1년 정도로 밖에 안 보이는군. 키는 185 정도 되나?

오른쪽 눈의 시력이 왼쪽 보다 더 안 좋아 보이고... 설마 너 평발은 아니겠지? 신발 사이즈를 원래 발 사이즈보다 크게 신는 건가? 음... 그리고.... "



" 뭐지... 이 스캔당하는 기분은.... 왠지 내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쳐지지 않은 듯한.... "



" 너, 솔직히 말해. 복싱에 자신 있냐? "



" 나? 음... 나는.... "





내 싸늘한 한 마디에, 그가 갑자기 긴가민가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이것도 확인해봐야 하는 건가.





" 내가 너에 대해 좀 알려줄까? 너, 복싱 못 해.

스텝은 느리지, 무게 중심은 불안정하지, 가드는 헐렁하지, 자세는 어색하지.

그리고 제일 마음에 안 드는 건, 넌 너무 틈이 많아. 그 틈 사이로 너의 얄팍한 자신감이 막을 수도 없이 빠져나가고 있어. "



" ..... "





내 말에, 그가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살짝 돌렸다. 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시선을 먼저 피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먼저 맞는 거다.





" 딴 데 보지 마. 날 똑바로 봐. "





내가 그의 턱을 붙잡고 내 쪽으로 돌리자, 그의 눈이 3배는 커진다.


그와 내 얼굴 사이의 거리는 불과 10cm 정도였으나, 나는 오히려 그를 더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그는 몸을 움찔 떨더니, 얼굴에 홍조가 뜬다. 그의 동공이 요동쳤다.



그것은 나를 두려워해서인가? 아니면.... 또 다른 틈에서 빠져나오는 수치심인가.





" 상대에게서 먼저 눈을 돌리지마. 맞고 싶은 게 아니라면. "



" ...... "



" 내가 너의 그런 취약한 모습을 보고도 널 택한 이유는 하나였어. "



" ...... "



" 주먹이 온다고 눈을 돌리지 않고, 끝까지 노려보았다는 것. "



" ...... "



" 근데 그건 우연이었나? "





내 목소리는 점점 더 낮고, 차갑고, 무섭게 변해갔다.

그가 당황스러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나는 마음을 이미 굳게 결정한 상태였다.


화인고의 명예가 달려 있다. 그리고.... 이번에는 초대 손님까지 온다.


이미 천우에게 혼자만 오라고 신신당부한 상태라지만, 그가 혼자만 오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나였다.


그의 옆에 찰떡처럼 붙어서 오는 애가 있을 거고, 둘 다 경기를 관람하게 될 터다.

그 녀석은 와서 내가 경기하는 것을 보며 자신도 하겠다고 뛰어들지나 않으면 다행일 텐데. 천우가 잘 타이르고 데려오길 비는 수 밖에.


보는 눈이 많다. TV로도 생중계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분명.... 보스도 보겠지. 조직원들 모두도.


나는 끝까지 해야만 했다. 적어도 대충할 수는 없었다. 무너질 순 없었다.





" 강해지고 싶지 않냐? "





내 말에 그가 동공을 딱 멈춰 세운다. 나는 그의 턱을 놓고 냉랭하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냉랭한 게 먹히지 않을 텐데. 이 망할 놈의 입 고리는 올라가질 않는다.


난 항상 능청스러운 연기를 잘하는 천우가 부러웠는데, 그 이유는 난 표정 연기를 지지리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처럼 매사에 굳어 있는 인상의 경우는, 감춰지는 감정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3가지는 전혀 가릴 수가 없다.



혐오, 분노, 살기.



차라리 분노가 제일 나을 판이다.

나는 지금 내 얼굴에 혐오는 둘째 치고 살기만이라도 없었으면 하고 잠자코 있었다. 그가 한참을 있다가 말했다.





" ...그게 무슨 말이야. "



" 글쎄. 궁금해? "



" 내가 먼저 물었잖.... "



" 일어나. "





내 갑작스러운 말에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의 손목을 붙잡고 억지로 일으켜 세우며 그를 넓은 곳으로 밀어 넣었다.


그가 황당한 눈으로 나를 돌아보자, 내가 말했다.





" 난 널 바꿔 놓을 수 있어. "



" 그게 무슨.... "



" 넌 이미 복싱부의 일원이지. 이제 와서 널 나가라고 할 수도 없어.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널 바꿔야 놓아야 하겠지. "



" ...니가 날 어떻게? "



" 패고, 차고, 굴리고, 욕하고. 그러다보면 저절로 바뀌겠지, 뭐. "



" .....내가 개냐? "



" 난 시간이 많지 않아. "



" ...... "



" 널 봐줄 수 있는 시간은 턱없이 적어. 하지만..... "



" ..... "





나는 땅을 바라보며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 ....적어도 일어나려 애쓰는 한 사람의 손을 잡아줄 정도의 실력은 있지. "





그는 나를 무슨 다이아몬드라도 된다는 듯이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뜬금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가 내 손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의아한 듯 머뭇거렸다.


사실 손까지 내밀 생각은 없었다.

내 손은 웬만한 험한 일은 다 겪어 본 듯한, 노동에 찌든 중후한 남성의 손보다도 상처가 많았다.


내 신체에 나 있는 상처들은 거의 다 어릴 때에 난 것이라지만, 손은 최근에도 계속 자잘하게 상처가 생길 수 밖에 없는 부위였다.

복싱을 자주 해서이기도 하고, 총을 자주 잡아서이기도 했다. 그래서 딱히 남에게 보이고 싶은 부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손은 내밀어버렸고, 이 상황에서 귀찮다고 손을 다시 거둬들이면 어색한 분위기가 흐를 듯 싶어 참을성을 있는 힘껏 쥐어짜냈다.


그 때, 손에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나는 정신을 번쩍 차리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 으, 손 되게 차갑네... 수족냉증이라도 있어? "





나는 대답 대신 그를 멀뚱히 쳐다보다가, 재빨리 손을 거두어 들였다. 그가 고개를 갸웃하지만, 애써 그의 그런 행동을 무시했다.





" ...하겠다고 하니 다행이군. "



" 뭐.... 나도 우리 학교의 명예를 더럽히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으니까. "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 질질 끄는 거 좋아하냐? "



" ...아니. "



" 그럼.... 수업 듣는 거 좋아하냐? "



" 아니. "





나와 그의 눈이 동시에 마주친다. 나는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 그럼 덤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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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6-08-05 19:46 | 조회 : 1,091 목록
작가의 말
비제르

그는 좋은 학생이었습니다.... 수정하느라 힘들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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