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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ㅡ작가 시점







어두컴컴한 하늘과 죽음 같이 고요한 땅.


낮의 생기가 밤의 음기를 만나 사라진 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을씨년스러웠다.


사락거리는 소리가 거리를 메우고, 가로등조차 켜지지 않은 이 새벽에 설혜는 눈을 떴다. 창 밖으로 썰렁한 거리가 훤히 보였다.




이젠 움직여야 할 시간이다.




집사조차 잠이 든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는 완벽한 기회였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슬그머니 바닥을 더듬기 시작했다.

바닥을 더듬거리는 그녀의 손이 점점 빨라지던 가운데, 그녀의 손에 차갑고 움푹 들어간 바닥이 만져진다.


그녀는 그 움푹 패인 부분에 손을 넣고 잠시 기다렸다.


그러자 몇 초 뒤, 바닥에서 철컥 하는 소리가 조용히 울려퍼졌다. 아무래도 지문 인식 장치가 숨어있었던 것 같았다.


그녀는 철컥하는 소리가 나자마자 그 움푹 패인 부분을 손잡이처럼 잡고 위로 끌어올렸다.

그 부분은 소리 없이 뚜껑처럼 열렸고, 그 안을 살펴보던 설혜는 손을 집어넣고 옷가지들을 덥썩 집어 올렸다.


그녀가 뚜껑을 살짝 밀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스스로 조용히 닫히던 뚜껑은 완전히 닫히는 동시에 또 한 번 철컥하는 소리를 낸다.


설혜는 주위를 한 번 쓰윽 훑더니 자신이 입고 있던 옷들을 벗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아까 꺼낸 옷가지들을 빠르게 입었다.


보통 사람들이 흔히 입는 옷들과는 조금 다른 소재다.


신축성과 보온성이 탁월하고, 적어도 4개의 총을 넣을 수 있는 허리띠가 달린 바지. 칼집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달린 가죽 재킷. 그 안에는 검은색 셔츠다.

설혜는 4개의 총집 중 2개를 떼어내고, 그 중 하나를 버클이 달린 띠에 고정해서 허벅지에 장착했다.

그녀는 울긋불긋하게 착색이 된 가죽 부츠를 신으며 침대에 던져 놓은 가죽 장갑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잠시 망설이는 듯 싶더니, 그녀는 마지못해 조심스럽게 장갑을 끼웠다.


평소에는 잘 끼지 않지만, 오늘은 끼는 편이 좋을 듯 했다.

오늘은 평소와 조금 다른 날이 될 테니까.


그녀의 입고리가 곡선을 그린다.




준비는 모두 끝났다.




그녀는 창문으로 휙 올라가더니 잠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바람에 그녀의 긴 생머리가 아름답게 휘날렸다.


그녀의 표정은 어딘가 좀 짜증스러운 듯 했지만, 그녀의 행동은 이에 반해 대범했다.



그녀는 곧바로 창문에서 뛰어내리며 잔디밭으로 몸을 뻗었다.


그녀는 손을 앞으로 내밀었고, 손이 잔디밭에 닿음으로써 그녀의 체중이 손목으로 전해지려던 순간 몸을 활처럼 굽히고 어깨로 한 바퀴를 구른다.


더할 나위 없는 깔끔한 착지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완벽하게 집을 빠져나온 그녀는 머리에 묻은 잔디를 쓱 털어내고는 곧장 담을 넘고 은행으로 향했다.


지금 시각은 새벽 1시를 한참 넘긴 상태였기에 은행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그러나, 은행 뒷쪽으로 빠져나가서 골목을 조금 지나가면 나오는 빌딩 수준의 건물은 어느 한 문이 삐거덕 거리고 있다.


설혜는 그 문을 주먹으로 톡톡 두들겨보더니, 갑자기 있는 힘껏 발을 날려 문을 쾅 걷어찼다.



아니나 다를까, 문은 저항 없이 설혜의 힘에 굴복하며 활짝 열렸고, 그녀는 안으로 들어서며 녹슨 걸쇠를 잡고 문을 안에서 다시 잠궜다.


아까는 설헤가 들어올 수 있도록 누군가가 걸쇠가 아닌 사슬을 걸어놓은 것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안에서 열지 않는 이상, 혹은 열쇠가 있지 않는 이상은 절대로 열리지 않을 것이다.


설혜는 그 문을 뒤로하고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는 2층까지였고, 그 곳에 다다르자 설혜의 발 끝에 푸른 빛이 비추어졌다.

조금씩 느껴지는 한기가 그녀의 목을 간지럽혔으나 그녀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의 앞에 또 다시 UFO처럼 생긴 문이 으스스하게 드러났다.


그 문에 다가서는 설혜의 눈에 푸른 빛이 일렁였다.


그녀는 문 가운데에 움푹 파여있는 손바닥 모양의 판에 손을 가져다댔다.

그러자, 문의 푸르스름한 빛이 갑작스레 붉은 핏빛으로 변했다.

마치 출입하려는 자를 위협하는 듯한, 그런 색의 빛은 UFO를 연상시키는 문을 더욱 더 살벌하게 비추었다.


그녀를 스캔하는 것 같은 기계음이 붉은 빛과 동시에 규칙적으로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 삐비빅ㅡ 치직... 경고, 경고합니다. 이 건물은 관계자 외 출입을 금합ㅡ ]



" 관계자 출입을 허가해. "



[ 접ㅡ 접속 되었습니다. 관등성명을 대십시오. ]





그녀는 한숨을 푹 쉬더니 짜증이 묻어나는 말투로 그 기계음에 대꾸했다.





" 코드네임 제로. 통칭 어세신 리엔 아르티스. "



[ 인식 완료. 어서 오세요. 어세신 님. ]





기계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붉은 빛은 다시 푸르스름한 빛으로 바뀌었고, 문 또한 자동으로 스르륵 열렸다.


그녀는 한기에 몸을 한 번 부르르 떨고서 안으로 들어섰고, 곧장 화살표의 반대 방향인 오른쪽으로 향한다.


오른편에 있는 방은 오직 하나, 무기고 뿐이다.


문이 열리자, 그 곳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설혜가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둘의 눈이 마주치자 그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 설혜야! "





그가 다가오려는 듯이 발걸음을 옮겼지만, 설혜의 싸늘한 눈빛에 움직이려던 발을 멈추어야 했다.


둘 사이에서 불편한 정적이 흘렀고, 둘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서로의 눈만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 죽음 같은 정적을 깬 사람은, 다름 아닌 천우다.





" ...렌즈 뺐네? "





하지만 그의 말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꾸 없이 그를 스쳐지나 무기 쪽으로 가려고 하는 그녀였다.


그녀가 천우의 어깨를 스치는 순간, 그가 조용히 말했다.





" 인사도 안 해줘? "



" ...... "



" 우리 되게 오랜만이잖아. "



" ...... "



" ...나 안 봐? "





그의 목소리가 점점 무언가에 꽉 잠기는 듯한 소리로 변해갔다.

설혜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곤 모기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안녕. "





그녀의 그 한 마디에, 천우의 표정이 1000배는 밝아진다.


그가 뒤로 돌아 무슨 말을 하려고 하기도 전에, 그녀는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 전등 하나를 더 켜고 방 안 쪽의 거대한 철문을 활짝 열어재꼈다.


철문 안에는 몇 백가지는 족히 되는 듯한 온갖 권총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천우가 약간 급하게 설혜 쪽으로 걸어왔고, 그가 옆에 오자 시선을 앞에 고정하고 절대 고개를 돌리지 않는 설혜였다.

천우는 그런 설혜를 슬쩍 보더니 킥하고 실소를 터트린다. 그녀가 천우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 ...뭐야. 왜 처 웃고 지랄이야. "



" 으음. 오늘은 무슨 총으로 할까ㅡ "



" ....기분 나쁜 새끼. "





설혜는 그렇게 말한 뒤 고개를 돌려 다시 총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별 망설임 없이 검은색 권총 2개를 한 손으로 집어들었다.

그녀는 한 곳에 모여 있는 탄창도 한 움큼을 집어들다가, 뭔가가 갑자기 생각난 듯 손에 있던 것들을 옆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손을 뻗어 철문 뒤에 있는 빨간 버튼을 눌렀다. 그녀가 천우를 힐끔 쳐다본다.





" ...너도 필요해? "



" 어. 38정도로. "





그가 자신의 앞에 있던 네일건(공사에 사용되는 물건. 못을 총알처럼 장전한 뒤 발사하면 못이 물체에 강하게 박힌다. -작가)을 흥미롭게 쳐다보며 대꾸했다.


설혜는 그의 말에 다시 한 번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기계음이 들려왔다.





[ 무엇을 꺼내드릴까요? ]



" 구경 38. 전용 권총으로 꺼내줘. "



[ 통칭을 대십시오. ]



" 아르티스. 그리고 넌.... 뭐더라. "



" 클라믹. "





그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설혜가 다시 최종적으로 말한다.





" 아르티스, 클라믹. "



[ 접속 되었습니다. ]





그러자 정확히 3초 뒤에 덜컹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철문 아래쪽에 나 있는 구멍의 덮개를 열어보자, 탄창 8개와 은색 총 하나, 검은색 총 하나가 놓여있었다.


설혜는 탄창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은 뒤, 총들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검은색 총을 천우에게 휙 던진다.


설혜에게 받은 총을 살펴보던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 젠장, 흠집이 났잖아. 무슨 총을 자판기 커피 뽑듯이 주는 거야. 망할 시스템. "



" 무슨 상관이야. "





설혜가 자신의 은색 총에 탄창을 끼워 넣고 장전을 하며 말했다.


그리곤 허리띠가 아닌 허벅지에 난 총집에다가 총을 집어 넣었고, 나머지 2개의 권총도 장전한 뒤 허리춤에 집어 넣는다.


그녀는 내버려두었던 바닥의 탄창들도 재킷 안 쪽 주머니에다가 왕창 쑤셔 넣었다.


설혜는 걸음을 옮겨서 바로 옆 철문에 있는 단검들과 장검들을 살펴보며, 항상 쓰는 톱니가 달린 단검과 제법 큰 단검도 집어든다.


둘 다 재킷 안 쪽 칼집에다 끼우고 또 한 번 버튼을 눌러 전용 단검과 칼집까지 꺼내드는 그녀다.


거의 살인 기계 수준으로 무장을 마친 그녀는 빨아도 잘 지워지지 않아 내버려 둔 가죽 부츠의 핏자국을 엄지 손가락으로 쓸었다.




오늘만이다. 오늘 하루면 끝이다.


이변 따위는 없어야 했다.




천우도 준비를 마친 듯 자리에서 일어난다.

설혜는 천우가 뒤로 물러서자, 철문을 한 손으로 가볍게 밀어 닫고는 항상 그렇듯 머리를 높게 올려 묶었다.


천우도 그녀와 똑같은 가죽 옷 차림이었는데, 둘의 표정은 어느새 아까보다 한층 살벌해져 있었다.


설혜가 머리를 다 묶고 장갑을 고쳐 끼우며 말했다.





" 너... 저번에 통화할 때, 누군가와 같이 있었지? "





그 말을 듣자마자, 천우의 눈이 2배로 커진다.

그는 고개를 휙 돌려 설혜를 바라보았다.





" ...어떻게 알았어? "



" 평소와 다르게 말투도 변하고, 둘 뿐일 때는 '어세스' 라고 잘 부르지 않던 니가 계속 날 그런 식으로 부르길래. "



" ..... "



" 뭐, 그래서 나도 니 장단에 맞춰 움직여준거지. "



" ....예리하네. "





천우가 피식 웃으면서 손목에 있는 전자 기어를 만지작거렸다. 그가 한참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 ....진혁이 아버지가 같이 계셨어. "



" 뭐? "



" 아버님께서는 너와 내가 완전 원수인 줄 아시니까... 어쩔 수 없었지. "



" 그랬군. "



" 그럼.. 너도 화난 게 아니었어? "





그가 약간 기대에 찬 눈빛으로 물었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딱 잘라 말했다.





" 아니. 진심이었는데. "



" ...아무리 진심이었어도 그렇게 말할 것 까진 없었잖아. "





그가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무기고의 전등을 다시 끈 다음, 문쪽으로 다가가 무기고의 문을 여는 것으로 그의 말을 무시한다.


천우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서 자신도 무기고에서 빠져나간 뒤 설혜를 바라보았다.





" 이젠 날 인간 취급도 안하는구만? "



" 아, 공기가 자꾸 나한테 말을 거네. "



" 똑바로 말해봐. 내가 싫어? "



" 어. "



" ...망설임이 없었어.... "



" ...있잖아. "



" 응? "






" ....다 죽이지 않는 건 힘들 것 같아. "





설혜가 지하를 빠져나와서 계단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말했다.

그녀의 뒤를 바짝 따르던 천우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억눌림을 느낄 수 있었다.





" ...그렇겠지. "



" ..... "



" ..우리, 그냥 싹 다 죽여버릴까? "





설혜가 그 말에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어서 그를 바라보았다.

설혜의 그런 반응에 천우의 기분은 날아갈 듯 좋아졌다.





" 앞길을 막아서는 놈들만 다 죽여버리고, 나중에 보스 염색이나 시켜드리자. "



" ...정말? "





설혜의 표정이 왠지 모르게 오묘했다.

항상 굳어있던 표정이 확 밝아졌는데, 웃고 있지는 않았다.


그녀는 절대 웃는 법이 없었다.


피식 하고 웃거나 킥킥거리는 것은 자주 볼 수 있었지만, 씨익 웃는 모습은 보기 드물 정도였다. 더군다나 환하게 미소짓는 모습은 심지어 보스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천우의 3가지 소원 중 하나는, 설혜가 배꼽 빠지게 웃는 것을 한 번만이라도 보는 것이었다.


상상이 불가능한 소원이었기에, 거의 포기한 상태였지만 말이다.





" 대신, 조건이 있어, "



" ...내가 그럴 줄 알았지. "





설혜가 시큰둥하게 중얼거리며 미간을 좁히자, 그는 계단에 한 발을 올려놓고 별 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 다른 건 아니고, 그냥...... "



" ..... "



" 다 다음주에... 너 경기 보러가도 돼? "



" ...미친. 너 스토커냐? 그건 또 언제 알아냈어? "



" 쯧. 이래 뵈도 정보 수집의 대가인거 몰라? "





천우가 거만하게 말하며 씨익 웃는다.


설혜는 여전히 짜증난다는 표정이었으나, 눈빛을 보아하니 약간 갈등하고 있는 듯 싶었다.



편하게 살인이냐, 불편하게 경기냐.



설혜는 끝까지 고민하더니, 결국 한숨을 쉬며 말했다.





" ....그러던지. "



" 진짜? 진짜지? 나 가도 되는거지? "



" 그래. "



" 좋았어! 약속이다? "





그가 싱글 벙글 웃으며 설혜에게 손을 내밀었다.

설혜는 무뚝뚝한 얼굴로 그의 손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자 그가 억지로 그녀의 손을 덥썩 잡아채더니 위 아래로 두 번 흔들었다.

그녀의 눈이 커졌고, 그가 어딘가 싸늘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 ....가서 총 좀 잡아보자고, 어세신. "



" ..그러지. 웨이렌(웨이렌 칸 클라믹 -백천우의 통칭). "





그들의 약속은 이렇게 맺어졌고, 그들은 서로 다른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단 한 가지의 길만 생각하게 되었다.












렌즈를 끼지 않은 설혜의 눈빛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잔혹함'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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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6-07-31 17:33 | 조회 : 1,150 목록
작가의 말
비제르

이보게들. 도대체 얼마나 죽일려고... 참, ㄱㄴㄱ지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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