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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작가 시점












" 아오! 야, 살살 좀 해!!! "



재윤이 참다 못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바닥에 덩그러니 굴러다니는 샌드백만 벌써 4개 째다.


그 중 3개는 거의 반으로 잘리다 시피 터지는 바람에, 뒷처리는 온전히 재윤의 몫이다.

속이 다 빠져나온 샌드백을 치우느라, 재윤은 허리를 한 번 필 틈도 없다.



부글거리는 속을 애써 진정시키며 바닥을 정리하고 있던 차에, 어디선가 바람이 홱 불어서 잔해들이 공기중으로 흩날린다. 하지만, 재윤의 옆에 있던 설혜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없었다.






콰앙ㅡ!!





설혜가 로우킥을 강하게 날리자, 샌드백에서 거의 대포 수준의 굉음이 울린다.


그래도 이번 샌드백은 용케 버틴 건지, 아직 설헤의 주위에는 잔해가 날리지 않았다.



설혜는 말없이 발을 한 번 더 뒤로 물린다.

그리고, 한 순간 날아오르는 듯이 점프하더니 몸을 홱 눕혀서 다리를 사선으로 뻗는다.

설혜의 발등은 그대로 샌드백에 적중했고, 샌드백은 설혜의 완벽한 뒤돌려차기를 그대로 받아낸다. 아까의 굉음에 3배 정도 되는 소리가 울린다.


이번에는 절대로 샌드백이 흡수할 수 있는 정도의 파워가 아니었다.


설혜가 가볍게 땅에 착지하는 그 순간, 샌드백에서 기이할 정도의 갈라지는 소리가 새어나온다. 그리고 가엾게도 곧이어 반으로 부욱 찢어지면서 터져버린다.


설혜는 약한 샌드백이 짜증난다는 듯 쳇하고 성질을 내더니 터진 샌드백을 슬쩍 재윤의 쪽으로 굴린다.

그걸 본 재윤은 참다 못해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를 질렀다.






" 야!! 이 미친 여자가! 어떻게 샌드백을 5개나 찢어먹어!! 발에 톱이라도 달았냐?!! "



" 미안. 오랜만이라 힘 조절이 안되네. "



" 너 좀 무리하는 거 아니야? "




재윤이 샌드백을 치우다 말고 허리를 펴가며 물었다.

그러자 설혜가 렌즈를 끼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재윤은 눈을 가늘게 떠 봤지만, 그녀의 이마에는 땀 한 방울 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심지어, 그녀는 지금 막 이곳에 도착한 듯이 호흡조차 가쁜 기색이 없었다.


한 마디로, 그녀에겐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고작해 봐야 준비 운동이었다는 것.


그녀가 땀 한 방울 흘릴 쯔음에는 몇 개의 샌드백이 죽어있을까? 한 100개쯤 될까?


재윤은 그 생각을 하면서 몸서리를 쳤다.





" 전혀. "





설혜가 재윤의 말에 대꾸하며 고개를 돌린다.


재윤은 한 순간 벙져 있다가, 그 말에 정신을 차리고는 피식 웃음 지었다. 그럼, 그렇겠지. 멀쩡하겠지. 그게 너의 강점이니까.





" 그보다, 샌드백은 더 없어? "



" ....니가 다 터트려 먹었다. 죽은 샌드백들의 총 값이 얼만 줄 아냐? "



" 싸구려로 사니까 그렇지. 걔들이 약한거야. "



" ...니가 발로 찬게 샌드백이 아니라 사람이었다면, 지금쯤 뼈들이 바닥에 나뒹굴걸. "



" 뭔 소리야. 농담 한거지? "





진담이었다. 그녀의 발차기에 맞아서 무사했던 인간들은 단 한명도 없었기에.


재윤은 무서워 죽겠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고, 그녀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지금 그녀를 재윤과 같은 눈빛으로 쳐다보는 이는 6명이 더 있었는데, 5명은 재윤과 설혜의 복싱부 후배들이었고, 1명은 선배였다.


그들은 방금 전까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저기 저 터진 샌드백을 마구 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설혜와 재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들어와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후배들과 선배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히 구석에 있는 소파로 물러갔다.


설혜와 재윤은 그들을 신경도 쓰지 않으며 한동안 서서 무언갈 의논했다.


그러다 뜬금없이, 설혜가 샌드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걸 본 재윤과 다른 이들이 미처 그녀를 붙잡을 새도 없이,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샌드백에게 걸어가 곧바로 묵직한 스트레이트를 날렸다.


그와 동시에 그들이 수 백번, 수 천번을 때리고, 차고, 박아도 멀쩡하던 샌드백이 부욱 찢어져 버렸다.


그 뒤로도 그런 장면의 연속이었다.

그들은 새삼 설혜의 능력에 탄복하는 중이었다.


설혜와 재윤은 고작 고등학교 2학년이었지만, 이 복싱부에서는 강력한 '선수'랑 다름이 없었다.

전체 인원이 서른 명 내외하는 정도인 이 복싱부에서, 그들은 가장 뛰어난 실력을 자랑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설혜는 단언컨대 눈에 확 튀는 선수였다.



그래도 이 부의 모든 인원들이 자신의 실력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편이었는데, 설혜의 등장으로 모두 쭈꾸미가 되어버렸다.

설혜는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남자조차 뛰어넘지 못하는 한계점을 너무나도 쉽게 왔다 갔다 거렸다.


그녀의 주 종목은 킥복싱과 태권도였으나, 그녀는 이중격투기는 물론이고 유도, 검도, 무에타이, 우슈 같은 배우기 힘든 무술도 프로 이상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한 마디로, 인간 병기의 수준이었다.


그래서 이번 일신남고와의 경기에는 반드시 설혜가 참전해야했다.


이 곳, 화인고는 이 근방에서 복싱부로 유명한 편이지만, 그건 일신남고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설혜는 예전부터 이러한 경기를 나가는 걸 꺼려했었다. 항상 귀찮다며 내빼기 일쑤였다.


하지만 화인고등학교의 첫 주자를 설혜가 맡게 된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가 시합에서 질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 어이, 선배님. "




설혜가 느닷없이 이 곳의 유일한 3학년을 부르자, 선배는 소스라치게 놀랄 수 밖에 없었다.




" 으..응? "



" 내일 정상 수업인가? "



" 음... 아마도 그럴테지. 왜? "



" 내일은 학교가 끝나자 마자 모든 인원 집합이다. 3학년 모두 다 데리고 와. "



" 아... 알겠어. "



" ..너희도 마찬가지다. 1학년들 다 모아 와. "



" 네...네! "





1학년들도 갑자기 군기가 든 듯이 기합을 불어넣으며 대답한다.


이 쯤에서 드는 의문이 하나 있다면, 그녀는 정말 일진이 아닌가 싶다는 거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아까 그녀가 5번째로 던져버린 샌드백의 뒷처리를 마저 하는 재윤이었다.


설혜는 할 말을 끝낸 후 시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마치, 시간에 쫓기기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그러더니 무언가 결심한 듯 재윤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재윤은 자신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설혜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그 때, 설혜가 입을 열었다.





" 미안한데.... "



" 싫어. "



" ..아직 아무말도 안했는데. "



" 안 돼. "



" ..... "



" ....뭔데? "



" 나 먼저 가야할 것 같다. "



" ....지금까지 혼자 연습하더니, 이젠 날 버리고 가겠다? "



" 약속이 있어. 중요한 약속. "



" 남자냐? "





재윤이 반 쯤은 장난스럽지만, 반 쯤은 짜증이 차올라 있는 어조로 물었다.

지금까지 설혜의 뒷처리를 해주느라 자신은 연습 한 번 제대로 못했는데. 이젠 가겠다고 하는 그녀이니 짜증이 날 법도 했다.


하지만 그의 말에는 무언가 다른 감정이 불만스럽게 섞여있었다.




우우웅ㅡ




설혜가 대꾸하려는 듯 입을 벌리는 그 순간, 설혜의 운동복 주머니에서 날카로운 진동이 울려 퍼진다.


설혜는 재윤에게서 시선을 떼고 핸드폰을 꺼내들었고, 재윤은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발신자를 확인하자마자 눈에 띄게 구겨지는 설혜의 얼굴.


그녀는 재윤을 쓱 쳐다보다가, 마지못해 구석진 곳으로 걸어갔다.


사람들에게서 조금 거리를 두고 나서야, 통화 버튼과 녹음 버튼을 동시에 누르는 그녀였다.









" 뭐야. "




설혜가 남들은 절대 듣지 못하기를 빌며 작게 속삭였다.


그런데, 수화기 너머로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이의 목소리가 얼핏 들려왔다.




설혜의 몸이 흠칫 떨린다.



설마... 지금 이 전화는... '확인' 인건가?











[ 여전하네, 그 말투. ]






그렇다면... 일단 그의 계획대로 놀아줘야겠지.

눈치 채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 씹... 용건만 말해. 나 지금 학교라고. "




[ 뭐? 너 그 놈의 학교를 아직도 다녀? 그냥 진혁이나 나처럼 자퇴하고 일에 전념하는게... ]




" 씨발. 용건만 하라고 몇 번을 말해! "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설혜였다.


재윤과 모두가 깜짝 놀라서 그녀 쪽을 쳐다보자, 그제서야 그녀는 아차 하고 다시 목소리를 낮춘다.






" 할 말 없으면 끊어, 백천우. "




[ 워워. 진정해, 어세스. 저번에 통화한 싸가지처럼 너와 대화하긴 싫으니까. ]





지금, 어세스라고 부른건가? 어세스라고?





" ..... "




[ ...후. 내일 밤 자정이 넘으면 회장이 별장에 도착한다고 하더군. 새벽 3시 쯤에는 모두 잠들고 경비들만 남겠지.

본가의 경비는 사장 때의 경비보다 3배는 삼엄해서 너 혼자서는 무리야.

더군다나 그 경비들을 다 죽여서는 안 돼. 저번에도 분명 말살은 안된다고 당부했건만, 니가 그 난리를 치는 바람에 보스가 뒷처리를 하시느라 염색을 한 번 더 하셨다고. ]





" 알 게 뭐야. 그 영감이 늙어 가는 거랑 내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




[ 아무튼 이번엔 몰살은 안 돼. 조용히 메모리카드만 훔쳐온다. ]




" 이 봐, 차라리 도둑을 고용하지 그래? "




[ 보스의 명령이야. 군소리 하지 마. ]




" ...끊는다. "




[ 아, 어세스. 잠깐. ]





또, 또 어세스. 그녀가 아는 바 대로라면... 이건 확실히 누군가의 '확인'이 틀림 없었다.

설혜는 천우가 자꾸 자신을 '어세스'라고 부르는 것이 신경 쓰였지만, 잠자코 있었다.





[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번 의뢰는 너 혼자 완수하지 못해. 그러니까.... ]




" ..... "




[ ...나도 가겠어. ]




" ...뭐? "




[ 내일 조직에 있는 무기고로 와. 끊는다. ]




" 야, 미쳤어? 백....! "





설혜가 뒤늦게 소리쳤지만, 전화는 이미 끊긴 뒤였다.


설혜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의 눈이 분노로 가득 차올랐다.




" 젠장. 누군가와 같이 하라니... 그것도 그 새끼랑... "




설혜는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만지다가, 퍼뜩 무엇인가가 떠올랐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하필 이럴 때 그 때 생각이 날 건 뭐람. 벌써 1년 전의 일인데.









" 반설혜? "




뒤에서 재윤이 부르자, 생각에 잠겨있던 설헤는 한 박자 늦게 그를 돌아봤다.


어느새 그녀의 바로 뒤에 서있는 재윤은 무언가 걱정스럽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 무슨 일이야? 뭔 일 있어? "




" 아니, 전혀. "




설혜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넣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 이제 갈께. "



" 어? 어어... 가 봐. "



" 내일 봐. "



" 야.... "




설혜가 짐을 싸서 문을 열고 나가려던 찰나, 재윤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를 왜 그러냐는듯 바라보았다.








" ..... "




"..음..... "




" ..... "




" ...뭐, 뭔 일 생기면... 말하라고. 그냥 그거야. "





재윤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자, 설혜는 말 없이 눈을 끔뻑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가볍게 피식 웃어버린다.





" 그래. "



" .... "




" 간다? "





그녀는 고맙다는 말도 잘 하지 않을 정도로 무뚝뚝했다.


다른 모르는 사람이 그녀를 보면, 어떻게 요즘 시대에 저런 냉혈한이 있냐고 말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싸늘한 기운이 감도는 그녀였다.


하지만 재윤은 그녀를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적어도 재윤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알아 차릴 수 있었다. 지금, 그녀가 한 순간 그에게 고마워 했다는 것을.




그녀가 나간 뒤, 재윤은 그 자리에서 꽤 오랫동안 꿈쩍도 하지 않고 서 있기만 했다.



마치 그 곳에 아직 설혜가 있는 것 처럼.




그런 재윤을 바보 같은 망상에서 끌어내 준 것은, 잊혀졌던 사람들이었다.








" 저기... 샌드백이 없는데 저희는 이제 뭘로 연습하죠? "





그제서야 퍼뜩 정신을 차리더니 이를 바드득 가는 재윤이었다.


하지만 이를 가는 것이 익숙치 않은 듯, 곧바로 인상을 찌푸렸다.





" 반설혜... 내일 보기만 해 봐. 샌드백은 다 그 녀석 사비로 결제하고 말테다. "




" ..... "




" ...스파링이나 하자. 내가 상대해줄께. "




" ....아..... "







그 날 복싱부에서는, 잊혀졌던 사람들의 원성이 천장을 뚫고 그녀를 향해 용솟음 쳤다.


설혜는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길을 가다가,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작은 기침을 토해내었다.




















" ..누가 내 욕하나 보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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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6-07-20 16:41 | 조회 : 1,772 목록
작가의 말
비제르

이제 자주 올리겠습니다ㅠㅠ 드디어 다음 화부터 설혜의 진짜 모습이 밝혀지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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