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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아는 드라마의 주연으로 참가하기 전 이영욱에 대한 그렇다 한 감정이 없었다. 그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연기자로서 대단한 재능을 펼쳤지만, 너무 높은 나무는 쳐다보기도 싫은 법. 그녀는 그저 자신의 역할이 그에게 묻혀버릴까 노심초사할 뿐이었다.

하지만 같은 촬영지에서 마주한 이영욱은 생각보다 옅었다. 물론 무섭게 다가올 때면 무엇보다 두려웠지만. 그는 자신을 숨길 줄 알았다. 그녀는 언제나 담백하고 무덤덤하게 바라봐오는 이영욱의 시선을 느낄 때, 첫 만남을 제외하곤 오히려 긴장이 풀려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래, 이를테면 지금.

이영욱과 신지아의 어깨 너머로 카메라가 배치된다. 이 순간, 이영욱은 교주인 김지완으로, 신지아는 여주인공인 비나라로 둔갑한다. 적당한 소란스러움으로 채워진 레스토랑 안에서 차분한 음이 흐른다. 레스토랑의 직원을 맡은 극 중의 단역이 그들에게 다가와 메뉴를 물어보고, 일정한 걸음으로 자리에서 사라진다. 쨍, 어디선가 들려온 유리잔 부딪히는 소리가 극을 시작하듯 작게 울린다.

“우연이네요. 아니면 인연이라고 하는 게 좋을까요?”

비나라는 부드러운 미소를 만면에 드리운 채 인사를 건네오는 김지완의 말에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다. 자연스러운 연기. 제 몸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임에도 이상할 정도로 물 흐르는 연기가 연출된다. 처음엔, 그저 운이 좋다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말이 없는데…. 섭섭하네요.”
“…일부러 찾아온 거예요.”
“무엇을 위해서요?”

김지완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진다. 모두 저 사람이 만들어낸 흐름. 신지아는 이영욱에 대한 존경심이 싹을 트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아마 자신은 이 촬영이 끝나고 나서 바로 집으로 달려가 그의 작품들을 하나하나 훑어볼 것이다. 물론 대학교에 다니며 몇 번이고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건 뭣도 모를 때의 이야기.

“알고 싶어요. 이 빚더미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 당신, 수연 그룹이랑 아는 사이잖아요. 아닌가요?”
“오. 아는 사이보단… 알 수밖에 없는 사이라고 보는 게 좋을 텐데요.”
“…무슨 뜻이죠?”
“하하, 글쎄요. 하지만 알고 있어요. 당신이 빚더미에서 벗어날 방법. 그쪽이 척을 지고 있는 수연 그룹과도 연을 끊게 해줄 수 있겠네요.”

이 사람은 보지 않고선 재단할 수 없다. 그가 내놓은 작품만으론 가치가 드러나지 않는다. 신지아는 연기를 하고 있음에도 그의 말에 빨려 들어가듯이 입을 열었다. 허벅지 위로 주먹을 쥔 손에 땀이 인다. 이건 기대감인가. 아니면….

“그걸 제발, 알려주세요.”
“그럼 나라 씨는 제게 뭘 해줄 수 있죠? 다짜고짜 찾아와서 이런 말이라 많이 당황하고 있어요, 저.”

김지완의 눈이 도르르 아래로 떨어지더니 난처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다.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연약해 보이는 지라 비나라의 기세가 조금 죽는다. 턱, 숨이 막히고. 비나라는 입을 잠시 뻐끔 이다 차분하게 말을 잇는다.

“뭐든지.”

가능하다면요. 그녀는 살고 싶었다. 하루라도 빨리 빚을 갚아버리고 평화로운 생활을 영위하고 싶었다. 그건 욕심이었다. 고작 그뿐인 욕심. 김지완은 그런 비나라를 바라보며 웃었다. 기이하게도 눈은 뱀과 같이 번들거리면서, 따사하게만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그래요…. 하지만 전 비윤리적인 방법은 취하지 않아요. 수연 그룹, 엮여서 힘들었겠어요. 사실은 별로 사이가 좋지 않거든요. 그쪽은 너무 폭력적이에요. 야만적이고. 안 그래요?”

비나라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진다. 그와 함께 그녀의 어깨 너머로 자리 잡고 있던 카메라의 렌즈가 미세하게 좁혀진다. 화면에 크게 잡혀 오는 김지완의 모습.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워킹이 차례로 이루어지며 그를 비춘다.

“꿈을 꾸죠. 항상 이루지 못할 꿈 말이에요. 하지만 이건 달라요. 이루어질 수 있잖아요. 나라 씨의 빚은 내일이면 사라질 거에요. 대신, 해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어요.”

그의 손이 테이블 위로 깍지를 낀다. 순간 손가락의 틈새로 보여오는 까맣게 새겨진 역 십자가. 비나라의 눈이 깜빡인다. 김지완은 그런 비나라의 모습에 재미있다는 듯 조금 웃고는 입을 연다.

“혹시, 신을 믿나요?”

카메라의 렌즈가 이내 움직임을 멈춘다. 그리고 다시금 벌어지는 렌즈의 모양. 테이블 앞으로 잠시간 말이 없는 김지완과 비나라의 모습을 비춘다.

컷!

촬영장을 울리는 굵직한 감독의 목소리. 동시에 정신을 차린 신지아가 금세 자리에서 일어서서 빠져나가려는 영욱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침을 꼴딱, 삼킨다.

계 탄 거였구나. 이 작품의 주연을 맡은 것은 엄청난 행운이었다. 그녀는 한순간에 그의 재능에 빠져버린 자신의 심정에 격렬한 끄덕임으로 예를 표했다.

7
“씹, 봤냐? 저게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이야?”
“조용히 해, 병신아. 쪽팔리니까.”

레스토랑의 직원, 정확히 말하자면 서빙 역을 맡은 그들은 고작 “세트 메뉴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한마디에 모든 정신을 쏟았다. 비록 주역들의 이야기에 묻혀 버렸겠지만, 테이블을 정리하고 치우는 데 얼마나 얼굴 근육이 떨리던지. 티비 너머로 봤을 때는 몰랐는데 거의 전장과 비슷한 분위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김희원은 천재라 해도 고작 배우라고 치부했던 자신의 생각을 뒤엎었다.

“일단 확인했어?”
“능력자는 아니야.”
“관계성은 있을지 몰라.”
“그걸 누가 모르냐?”

말끝마다 시발. 부글거리는 속을 가라앉히며 가까스로 평정을 유지한 김희원이 박태원의 옆구리를 쳤다.

“뒤질래? 정신 나갔냐?”
“안 찍으니까 이제 막, 말이 나오나 봐? 꼴사납게 카메라 앞에서 떠는 모습하고는. 어쨌든 빨리 가서 이영욱에게 접근해.”
“씨발, 그게 쉬워? 친분을 쌓으라면서 이렇게 접점 없는 곳으로 내빼면 어쩌라고?”
“내 알 바야?”

무시하는 투로 툭 내뱉어진 자신의 말에 어지간히 열이 올랐는지 손가락 끝으로 열을 피워올린 박태원이다. 아, 저 븅딱. 이곳이 아직은 촬영지 내부라는 걸 잊은 모양이다. 김희원은 박태원의 목으로 헤드락을 걸며 밖으로 나섰다.

“잘 봐.”

그리곤 박태원을 바닥으로 패대기친 채 당당하게 이영욱에게 다가간 김희원. 박태원은 그런 김희원이 종이를 들고 몇 번 이영욱과 대화를 나누더니 다시 돌아오는 모습을 보며 쯧, 혀를 찼다.

“뭐라디? 파란 대가리.”
“…사인. 원래 친분은 이렇게 쌓아가는 거야.”
“네 병신력이 쌓여져 가는 것 같은데.”
“그럼 시팔 이제 기회도 없는 걸 놓쳐?”

김희원은 영욱의 사인이 담긴 종이를 움켜쥐며 혀로 입안을 쓸었다. 뭐, 생각해보면 그 최 실장이 친분을 쌓아오라고 전했는데도 이런 접점 없는 역을 추천했을 리가 없지. 이번은 일차적인 감시역으로 붙여진 거야. 아마 곧 다른 직업을 추천하며 다가가 보아라 말하겠지.

…그리고 이 정도로 거물의 사인이면 꽤. 하핫, 이번 신상이 얼마더라.

실쭉. 김희원의 입꼬리가 음흉하게 휘어진다. 비록 임무라도 챙길 건 챙겨야지. 그가 뛰어난 배우건― 오범과 관련이 있건― 그게 대체 무슨 소용이람?

8
“방금 누구였어요?”
“어…. 팬?”

영문 없이 다짜고짜 다가와 팬이라며 종이를 내민 김희원은 극 중 레스토랑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아마 초반부에 메뉴를 물었던… 아니라면, 미안하지만. 조금 어색한 모습으로 목덜미를 문지른 영욱이 고개를 까딱이며 “사인이 필요하대서.”하고는 말꼬리를 흐린다.

“필요하다고 했다고요? 사인을요? 이상한 사람이네요….”
“음.”
“여튼 어서 가요. 피곤하죠? 오늘은 바로 집으로 보내라고 회장님이 그러셨어요. 저번부터 계속 안 좋은 일에 휘말릴 뻔하셨잖아요. 빌런 말예요. 전만 해도 얼마나 식겁했는지. 엉망으로 변한 집 안을 보고 제가 얼마나 놀랬는지 아세요?”

이한의 걱정으로부터 시작한 이야기는 잔소리로 줄기차게 이어진다. 영욱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일주일 전, 엉망으로 변했던 자신의 집 안. 그건 빌런이라기보다는 히어로의 탓이었지. 텅 빈 곳에 날벼락처럼 날아든 불공. 그건 자신이 제일 소중하게 여겼던 강아지 마크의 이불을 불태우고 주변의 가구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금방 천장에 달린 센서가 반응해 불공을 꺼트리긴 했지만, 자신의 소중한 이불은 돌이킬 수 없었다. 그 후 당사자에게 사과의 편지―형식적인 내용으로, 복붙의 향기가 느껴졌다.―와 보상금을 받았지만 그것만으로 자신의 착잡한 심정은 다독여지지 않았다.

아, 그때의 기억이 머리를 맴돌자 침울해진 영욱이 힘없이 차 문을 열고 시트 위로 몸을 뉘인다.

“눈 좀 붙이세요.”

운전석의 앞에 달린 룸미러로 지친 듯 눈을 감는 영욱의 모습을 힐끔 바라본 이한이 곧이어 시동을 건다. 부드러이 영욱의 집을 향하는 까만 벤. 시트 위로 쏟아져 내린 영욱의 머리칼이 간간히 흔들리는 차체와 함께 흐트러진다.

9
“마지막으로 찍을 거라고 했다면서.”
“맞아. 이번이 마지막.”
“질리기라도 한 거야?”

아니라는 걸 다 알면서도 굳이 물어오는 건 무슨 심보일까.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맞이하며 저를 거실로 이끄는 해원에 한숨을 내쉰 영욱이다.

“들어오는 건 상관없는데. 문자라도 보내줄 순 없어?”
“어라, 네 매니저한테 말했는걸. 촬영이 끝나면 바로 집으로 보내라고.”
“…그게 말한 거야?”
“그럼?”

소속사 회장이라는 권력을 남용하며 싱긋 웃어 보이는 해원의 눈동자가 한층 가증스럽다. 영욱은 학창 시절부터 꽤 귀찮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해원에 머리를 저었다. 아니, 적어도 이정도까지는 아니었나.

“그래. 마음대로 해.”

어차피 암만 말해도 제멋대로 행할 놈이었다. 휘적휘적 거실로 걸어 들어간 영욱이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해원은 그런 영욱의 뒤꽁무니를 따라 움직인다. 변하지 않았구나. 해원은 변함없이 일관된 무표정으로 저를 대하는 영욱에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꼈다.

“마지막이라는 건 역시 빌런과 히어로들 때문?”
“알면서 왜 물어?”
“과거에나 지금이나 사건사고를 달고 다니는 건 여전한 것 같아서.”

짜증 난다는 듯 눈을 흘긴 영욱이 해원을 바라본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별일 아니면 나가. 피곤하니까. 눈 밑을 가볍게 문지른 후 살짝 붉은 기가 도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인 영욱이다. 분명 시답지 않은 내용이겠지. 드문드문 주인의 허락도 없이 출입하는 저 무뢰배는 오늘 아침 날씨가 굉장히 좋다, 라는 이유로 형형색색의 꽃을 들고 나타나 저를 괴롭히곤 했다.

해원은 이제는 거의 소파에 몸을 묻고 기절하려는 영욱을 막으며 서둘러 입을 열었다.

“경호원을 붙이기로 했어.”
“…뭐.”

누구한테?
너한테.
누구 마음대로. 영욱의 입이 스르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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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11-10 14:44 | 조회 : 529 목록
작가의 말
nic23075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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